동망봉 정순황후 문화제 그리고..
낙산성곽길-창신동골목길과 동대문
함께한 사람들...물바람 발트 최실비아 그리고 이같또로따
▲ 마로니에공원
젊음이 넘쳐나는 핫 프레이스, 푸리마켓 주말장터가 열렸습니다.
▲ 지금도 마로니에는... 그 마로니에 나무 앞에서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의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조용필 버전의
https://youtu.be/f60pDN55eT4
▲김상옥 열사는...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애국열사 상
1890. 1 서울 어의동에서 구한말의 군관인 김규현과 경주 김씨 점순 여사 사이에 2남으로 출생
1909 한문을 수학하고 불우청소년을 위해 동흥야학(東興夜學)을 설립
1911 YMCA(기독교청년회) 청년부장으로 활동
1913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염창순, 한훈 등과 광복단 조직
1916 한훈, 유장열 등과 친일반역자를 오성헌병소를 습격, 무기를 탈취
1917 신형 말총모자를 창안 보급하고 각종 면직, 철공류를 생산하여 국산품 장려운동 전개
1919 3.1 운동이 일어나자 시위대열에 앞장서 무장경관의 장검을 빼앗는 등 담대한 활동을 감행,
그 뒤 영국인 피어슨 여사 댁에서 혁신단과 암살단을 조직, 혁신공보를 발행
1920 총독 주살 계획을 추진하다 실패하자 상해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
1921 임정 요인들과 군자금 모금계획을 의논하고 귀국, 평양과 충청, 전라도 등지를 순회 모금하여
상해로 돌아가 임시정부에 전달
1922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의열단의 지원 아래 폭탄 등 무기를 휴대하고 안흥한과 함께 귀국
1923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1월 17일 재등총독 주살을 재차
계획한 채 삼판통에서 추격한 왜경과 총격전을 전개한 후 이곳저곳을 신출귀몰하다가
1월 22일 종로 효제동에서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4, 5채 가옥을 넘나들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일기당전의 장렬한 격전을 전개,
수십 명의 왜경을 살상 후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
1962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됨.
▲ 구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 입구의 조각상
▲ 구상나무
한국 특산종으로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지에서만 자란다. 키는 18m에 달하며 오래된 줄기의 껍질은
거칠다. 황록색을 띠는 어린가지에는 털이 약간 있으며 자라면서 털이 없어지고 갈색으로 변한다. 잎은
길이 0.9~1.4㎝, 너비 2.1~2.4㎜ 정도로 작으며 잎 끝이 얕게 갈라졌다. 열매는 원통처럼 생겼는데 길이 4~6㎝
, 지름 2~3㎝ 정도이며, 녹갈색 또는 자갈색을 띤다. 씨를 감싸는 조그만 잎처럼 생긴 포편의 끝에는 뾰족한
돌기가 나와 있다. 제주도 한라산에서는 해발 1,500m에서부터 산꼭대기 근처까지 군락을 이루며 자란다.
잎 뒤에 나란히 나 있는 기공선이 매우 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나무 전체가 은녹색으로 보이며, 모양이
아름다워 정원수로 쓰인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로 사용되며, 수형이 적합하여 크리스마스 트리용으로
선호된다./다음백과
▲아르코예술극장 앞 정경 김수근님의 작품입니다. 대학로 상징적인 건물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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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으로 가는 길
▲ 성곽 너머에는 ... 3女心 같은 듯 다른 눈과 가슴으로. 사알~짝 양해 없이 찰칵^^
▲성곽 밖으로 나와... 북한산 자락 보현봉이 보입니다.
▲ 낙산공원 성곽 앞에서 인증 샷~
▲동망봉을 향해~
▲산이 직각으로 절개.
▲ 4층 창신 아파트 단지
▲ 좁은 골목길도 걸어보고... 차도 못들어오는 이 골목. 이삿짐은 어떻게 욺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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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가 단종과 마지막 밤을 지새운 그 사찰, 바로 청룡사.
▲앞에는 산봉우리 두에는 큰 바위가 있는 여기, 천만년을...
정업원이 있던 누각 간판. 영조시대에 지었다고 합니다.
▲ 우화루. 바로 여기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던 단종이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지낸 곳.
직역하면 꽃비가 내리는 누각.비처럼 쏟은 피눈물에도 꽃이 피던가?
후~ 한숨을 토하며 빛바랜 누각을 봅니다.
대웅전 꽃등이 우화루 창문에 형형색색으로 피었습니다.
▲이곳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가 궁에서 물러난 뒤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년(영조 47)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원래 정업원이란 양반 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정업원과
마주하는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업원 터 비석에는 ‘정업원 옛 터 신묘년(영조 4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淚書)’라는 글씨와 비각 현판에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前峰後巖於千萬年)’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모두 영조의 친필이다.
이 비석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비각 안에 있다./ 위키백과
■ 여기서 잠깐~ 행사장 시간도 촉박했지만... 깜빡 알바로 시간을 다소 소비하는 바람에...
아래 두 곳을 놓쳤습니다. 죄송 ㅠㅠ
유관 대감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았다. 초가는 비가 오면 방에 비가
새는 집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대감이 아내에게 한 말인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꼬”였다고
한다. 이 집을 유관은 증손녀 사위인 이수광의 아버지 병조판서 이희검에게 물려주었으며, 역시 청백리에
선정되었던 이희검이 이수광에게 남겨주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이 터에 이수광이
다시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역시 초가 3간으로 짓고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이란 의미로 비우당(庇雨堂)
이란 당호를 달았다고 한다. 그 역시 태종대왕의 후궁이었던 효빈 김씨의 아들인 경녕군의 후손으로 왕손으로
서의 긍지와 아버지와 외 5대조의 청백리정신을 이어 이 집에서 청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호가 지봉인
것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을 알 수 있다.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1563~1628)이 그 비우당(庇雨堂)에서 광해군 6년(1614)에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
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했던 것이다. 그는 1590년(선조 23), 1597년(선조 30) 그리고 1611년
(광해군 4) 등 세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험과 그때마다 중국에서 만난 각국의 사신들과의 교제
로 수집한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저술을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유구,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
과 영국, 포르투갈 등 서양 세계 각국의 역사와 지리,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언어, 복식과 동식물 등과
천문에 이르기까지를 방대하게 수록하였다.
이 저술은 총 3,435 항목에 전 20권, 여기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와도 스스럼없이 교제하였는가 하면 천주교의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우리나라에 들여
오기도 했던, 실학정신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당시 백성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진정한 실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퍼온 글
이수광의 묘는 노고산 서쪽 산등선 아래 있습니다. 특이 한것은 소위 역장이라는,
부모 산소 위에 그의 묘가 있더군요.하산 길에 찾오보시기를/로따
그리고 일부 인터넷에 떠도는정순왕후와 연관 짓는 글은 순왕후와 비우당은 무관합니다.
▲ 자주동천(紫芝洞泉)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의 우물로 흰 옷감을 이곳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지금은 샘물이 말라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일설에는 동네 부녀들이 정순왕후를 도와 옷감에 염색을 하여 옷을 팔았다고 합니다.
영도교 인근(현 초등학교 정문 앞)에 정순왕후를 돕기 위한 여인시장이 섰다고도 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꼭~ 비우당과 자주동천(바로 옆에 있음)을 찾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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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문화제
▲ 개회식 후 궁중무가 펼쳐집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 학춤도...
▲ 잠시 밖으로 나왔다가 출연한 분들의 촬영 장면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학무를 펼친 두 분의 얼굴도 보입니다. 땀 좀 흘리셨으리라.
▲ 김별아 작가의 영영이별 영이별 중 주요 내용을 낭소합니다. 낭송가 이름을 깜빡 잊었네요.
동영상으로 녹화를 못해... ㅠㅠ
아쉬움에 아래 동영상 올려 봅니다.
https://youtu.be/a_GJZTGVIb8
▲ 정순왕후로 선발된 분(인적사항 잊었음 ㅠㅠ)인터뷰 머리에 쓴 왕관(?)이 자그만치 10Kg이랍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정순왕후 추모제향 의식을 합니다.30분 정도 걸린 듯.
▲ 동망봉을 끝으로 마을로 내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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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만에 찾은 냉면 묵밥 식당. 아는 사람은 아는 맛집입니다.
식기는 안성産 놋그릇입니다.
▲역시 3년만에 들어간 커피숍. Yummy.맛집이라는 상호다. 가격도 저렴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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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걷기
안양암~ 동대문(세 분의 절대적(?) 동조하에...ㅎ)
▲ 두꺼비 형상을 한 바위. 그래서 이 바위를 두꺼비 바위로 불립니다.
큰 바위로 둘러 샇인 암자입니다. 봄에 동백꽃 보러 왔던 지가 얼마인지...
▲ 사찰 벽면에 빼놓을 수 없는 벽화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삼천리(ㅎ)하지만... 결국 그 소는 집 외양간에 있다는...
불가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림으로 비유한 것이지요.
우리는 주먹에, 혹은 주머니에 넣고 삼지사방을 찾느라 난리를 치르는 일이 다반사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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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길 담벼락에 핀 꽃. 바로 불두화(佛頭花). 수국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이 꽃의 꽃말은
은혜 베품 그리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지요.
제행무상...정해진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뜻이지요.
불두화는 이 꽃송이가 부처님의 머리 처럼 곱기 때문이라던가요.
▲ 창신시장 골목. 맛집 몇 곳은 통행로를 가로 막는 장사진입니다.
침만 꼴깍 삼기고 통과~다음 창신동 골목길 탐방하며 이곳 맛집을 찾을까 합니다.
▲흥인지문(동대문) 앞 흥인지문공원. 성곽길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출발해 낙산공원, 이어서 성북동이나 동망봉을 가도 좋을 듯합니다.
▲ 동대문. 이미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립니다. 7시가 다 되었네요.
초등학교 때 불렀던 " 동동동동 동대문을 열어라...."를 부르며 지하철역으로 갑니다.
첫댓글 로따지기님.
리딩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많은것을 보고 알고 하였네요~~
오랜만에 함께하시어 오붓하고 정겨운 시간였습니다.
저 역시 역사 공부도 많이 하였답니다.
로따님의 후기를 읽으며
새삼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의미가 큰 곳들을 안내하여 주시고
후기로 안목을 넓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함께하여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어 뜻 깊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삶을 돌아보며 역사 공부도 하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