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叔章挽(이숙장만)
홍세태(洪世泰:1653~1725)
본관은 남양.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 유하(柳下).
대대로 무인 출신 집안에 태어나서 역관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위항시인으로, 그의 명성은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져 있었다.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의 시를 얻으려고 줄을 설 정도였으며,
1695년 청나라 한림학사 상수(尙壽)가 사신으로 왔는데, 『동문선(東文選)』· 『난설헌집』 과 최치원, 김생, 안평대군의 글씨를 구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홍세태에게 시를 짓게 하여 가지고 갔다. 1723년 사신으로 왔던 도란(圖蘭) 일행은 아무런 뇌물도 요구하지 않고, 작은 부채 하나를 내놓으며 시 한 편만 지어 달라고 하여, “시인 홍세태로 하여금 율시 1수를 짓게 하였다”는 『경종실록』 3년 7월 11일 자에 기록되어 있다.
8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앞서 보내며 불행한 그의 삶이 시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저서로는 『유하집』이 있다.
춘부장은 병이 들어서 알지 못하고
阿爹病不知 아다병부지
다만 아이가 해 질 무렵 나갔다고 말하네
只謂兒暮出 지위아모출
슬프고 슬퍼서 관만 어루만지니
哀哀一拊棺 애애일부관
넋만 홀로 방에 들어와 있네
獨有魂入室 독유혼입실
*
예전에는
집에서 태어나서
태어난 방(房)에서 장례를 치렀다
마루에 시상(屍床)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향을 피우고 장례 준비를 하다가
지관(地官)이 고인의 사주를 따져
입관(入棺) 시기를 정해준다
입관이 되면 안방에 모시고 병풍을 치고
곡을 하면서 문상객을 맞는다.
잠을 자는 것은 커다란 불효라서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관(棺)을 지켰다
그리고 발인날은
천년의 집에 꽃상여를 타고 가셨다
그리고 사랑방에 빈소를 만련하여
조석으로 곡을 하였다.
살아있을 때 혼(魂)이 깃들고
죽으면 백(魄)이 깃든다고 하지만
이 시는
벗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상을 갔다
오랜 병치레로 정신까지 온전하지 않은
어르신은 용케 친구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은 해 질 무렵에 나가서 안 돌아온다고 한다
죽어서도 부모님께 알릴 수 없는 죽음.
사랑채에 조용히 울먹이면서
벗의 관(棺)을 어루만지며
애달퍼서 속으로 울고 있다
그러면서
방에 홀로 있으니
넋이라도 들어와서
못다 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
벗의 간절한 열망이 묻어나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문상(問喪) 갈 일이 많아졌다.
애달프고 애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