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전날 밤기차로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었지만 다행히 나이젤 아저씨가 오슬로에서 베르겐을 오가는 기차를 밤에 타면 좋은 경치를 다 놓친다고 말해 주어 나는 다행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은 자연경관을 즐기며 갈 수 있었다.
내가 탄 칸에는 나와 노르웨이 아가씨만 타고 있었다.
그 노르웨이 아가씨는 나보다 두 줄 정도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잘 보이진 않았으나 상당한 미녀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란 셈 치고 먼저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곧 도착하게 될 역이 '보스'역이었을 때 나는 알면서도 시치미 떼고 이번역이 '미르달'역이냐고 물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나 때문에 놀랐던지 그녀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이번이 아니고 다음이라고 말해 주었다. 덕분에 앞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예쁜 미녀였다. 잠시였지만 그 한마디를 나누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녀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이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런 미녀가 남자보고 오라는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면 남자가 알아서 기어야 하는 법.
나는 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지가 좋으면 나랑 계속 이야기 하겠고 아니면 말겠지 뭐' 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다시 한번 다가가기로 했다. 질문할 건덕지를 생각해야 했는데 마땅한 게 없어 일단 그녀한테 다시 한번 실례한다고 하고 오슬로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렇다고 해서 그럼 알고 있는 호스텔 같은 숙박시설이 혹시 있냐고 물었더니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여행 중이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이야기가 길어질 분위기였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아예 끌낭과 식량이 들은 수퍼마켓 봉지를 들고 그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통로를 두고 양쪽에 의자가 두개씩 있는 구조라서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건너편에 앉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통로 우측 편에 앉아 통로 쪽으로 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원래 있던 줄에서 짐을 챙겨오자 내가 그녀 옆에 바로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정리하여 창가 쪽으로 붙어 앉았다.
결국 나는 짐을 통로 건너편에 두고 그녀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런 미녀 바로 옆에 붙어 앉아 그녀를 쳐다보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금발머리, 뽀얀 피부에 파란눈 과 오똑한 코를 가진 그녀를 보고 있자니 예술작품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이상 더 이상 완벽하게 태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고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필이면 그때 내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30분 남짓 남은 것이 가슴 아팠다.
그녀의 이름은 '토어봐', 그녀는 독일어 시험을 보기 위해 오슬로로 가고 있다고 했다.
몇 마디 나누고 보니 정신이 좀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서 개기름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냄새로 미뤄 보건데 한 2∼3일은 머리를 감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때마침 창 밖을 보니 눈덮힌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차는 그날따라 연착도 안 되고 잘만 달렸다.
그냥 그녀와 함께 오슬로까지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미녀 하나 보고 내 여행을 망칠 수는 없었다.
기차가 미르달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녀와 헤어지며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받고는 그녀와 작별인사를 했다. 기차는 잠시 정차해 있었다. 미르달은 정말 작은 동네였다.
기차역에서 보이는 주변의 건물들이 동네 전체의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작은 동네에도 'B&B'(Bed & Breakfast 의 약자)라고 크게 건물 벽에 적어 놓은 숙박시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기차역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렸다.
기차는 시간이 되어 서서히 출발하였고 점점 속도를 높이며 내 눈 앞을 지나쳐 갔다. 기차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나는 더욱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려 하였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있는 칸이 지나갔을 때 기차는 속도가 꽤 붙어있었으나 분명히 그녀는 내 쪽을 보고 있었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최소한 마주쳤다고 믿고 싶었다.
플롬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플롬행 기차가 와서 탔는데 그 기차는 유레일을 이용한 할인을 받아 왕복요금 36,500원 정도의 돈을 더 내고 타야 했다.
미르달에서 플롬까지가 불과 10Km 거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롬으로 가는 기차는 산을 내려가는 기차였는데 좌우를 번갈아 가며 장관이 펼쳐지는 바람에 승객들이 경치를 쫒아 좌우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승객들이 좌우로 옮겨 다녀 다른칸 승객들도 볼 수 있었는데 웬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한명 보였다.
기차가 중간에 폭포가 있는 곳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기념사진을 찍고 그 청년을 찾아가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영준'이라는 한국청년이었는데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뜸 오슬로에 가면 지낼 곳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호스텔에서 지낼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숙박비가 비싸니 자기가 있는 기숙사로 오라고 했다. 나는 그날 오후 오슬로로 갈 예정이었고 그는 주말을 베르겐에서 보낼 생각이어서 나는 그 다음 주 월요일에 그의 기숙사로 찾아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플롬까지 동행했다가 플롬에서 헤어져 나는 미르달로 왔다. 미르달에서 오슬로행 기차를 기다릴 때 기차역에는 나를 포함해 달랑 4명의 승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