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17~31)
25절)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자본주의 사회적 분위기와 관성에서
부(재물, 돈)에 사람의 욕망이 다 모여있다.
부가 세상에서 매우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누구에게든 큰 도전이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돈으로 욕망이 모일 것을 아시고
돈을 비유로 드셨지만,
그 밖에도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를 수 있는 어떤 욕망, 또는 집착이
모두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입시킴에도 흔들릴만할 정도로
내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자청년은 결국 모든 돈을 헌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천국을 포기하고 도망했다.
그 청년이 심판의 자리에 서는 그날까지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변화가 있었기를 바랄 뿐이다.
유독 청년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신앙적 자세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않자 예수님께 천국에 가는 방도에 대해서 질문했다.
신앙적으로 매우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 그것과 똑같다.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열심히 탐구하고,
성경을 암송하며, 모범적 생활태도를 가졌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를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여기며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그가 내밀히 가진 놓지 못하는 어떤 욕망의 요소로
단번에 신앙의 길을 벗어나거나, 그릇된 행동을 한다면 충격적이다.
아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반듯한 후배. 어느 것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그가
진급심사를 앞두고 철저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방법을 모두 버리고
지극히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는가의 여부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나와의 상담도 자신의 추구가 옳은가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진급여부의 불투명성을 위로받고,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빙산의 일각으로부터 본체를 드러내듯,
그 후배는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내와의 불화 등의 문제 등
연쇄적으로 문제를 드러냈다.
일련의 현상이 충격적일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매우 헌신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도 천로역정의 길 위에서 부분적인 방황이기를 기도한다.
모든 것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단지, 그 후배처럼 우리도 항상 그런 위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겉의 멀쩡함으로 가지고 단언하긴 힘들다.
오늘 묵상에세이에서
집회에서 큰 은혜를 나눈 목사님이 자신의 구두를 분실한 것이
마음에 큰 실망감으로 방해하는 현상을 설명했다.
영적 대차 대조표(또는 손익계산서)를 계산해보면
득에 비해서 실이 아무것도 안 되는데 그 조그마한 것이 너무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큰 부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고 계시고
궁극적 좋은 나라에서 주실 복과 은혜에 비할 바가 될까?
누군가 가치중립적인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를
부정적인 것으로 폄훼할 때 영적 손익계산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이 갚아주실 대가를 더하기, 빼기에 포함시키는
대차 대조표를 보유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경우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대차대조표가 주의해야 할 대상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포함한 대차대조표(손익계산서)는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했다면 오늘 본문에서 계산에 능한 부자 청년이
자신이 보유한 부의 크기와 비교도 되지 않는 이익을 받을 일을 거부하고
그렇게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