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벌핀치 / 이윤기 편역 / 768쪽>
271 ~ 399쪽에서 발췌
파리스의 심판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혜의 여신이 한번 아주 지혜롭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있다. 헤라, 아프로디테와 아름다움을 겨루어 그 현상품을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전말은 이러하다.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결혼했을 때 신들은 모두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초대를 받지 못했다. 에리스 여신은 따돌림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혼인 잔치 좌중에다 황금 사과 한 알을 던졌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 이런 글씨가 쒸어져 있었다.
그러자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아테나는 서로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이 미묘한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제우스는 이 세 여신들을 이데 산으로 데려갔다. 이데 산에는, 잘생긴 양치기 파리스가 양을 먹이고 있었다. 제우스는 이 파리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게 했다.
여신들이 곧 파리스 앞에 나타났다. 양치기 파리스에게, 헤라 여신은 권력과 부를, 아테나 여신은 전장에서의 명예와 명성을, 아프로디테 여신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면서 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심판을 부탁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제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지 이 여신에게 황금 사과를 바쳤다. 이로써 그는 헤라 여신과 아테나 여신의 적이 되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보호 아래 그리스 땅으로 건너가, 스파르타 왕 메넬레오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메넬라오스 왕의 비(妃) 헬레네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파리스에게 아내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원래 결혼 전의 헬레네에게는 구혼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헬레네가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기 전에, 구혼자의 한 사람이었던 오뒤쎄우스의 제안에 따라, 누가 뽑히든 모두 힘을 합하여 이 여성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필요하다면 헬레네의 원수 갚음에도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결국 헬레네는 메넬라오스를 지아비로 선택하여 행복한 나날을 살고 있었는데, 파리스는 그런 두 사람을 찾아와 손님으로 유숙했던 것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꾀어 낸 뒤 함께 궁궐에서 빠져 나와 트로이아로 가 버렸다. 이 때문에 저 유명한 트로이아 전쟁이,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의 소재가 된 트로이아 전쟁이 터진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친구들인 그리스의 왕후장상(王侯將相)들에게 파발을 보내어, 그 때 함께 모여 서약했으니 부디 자기에게 힘을 빌려 주어 아내를 되찾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중략)
이피게네이아
2년 간에 걸친 준비가 끝나자 그리스 함대와 군대는 보이오티아의 아우리스 항에 집결했다.
바로 이 지방에서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사냥 나갔다가 아르테미스에게 봉헌된 수사슴 한 마리를 죽인 일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 벌로 전염병을 보내어 군대의 수를 줄이고 바람을 멎게 하여 군함의 출항을 방해했다.
예언자 칼카스는 점을 쳤다. 점괘에 따르면 처녀신 아르테미스의 분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제단에다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길뿐이었다. 점괘에 따르면, 산 제물은 죄를 지은 자의 딸이어야 하지 다른 처녀는 아무리 많아도 쓸 데 없었다. 아가멤논은 그러기가 죽어도 싫어 오래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그도 마침내 그러자고 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딸 이피게네이아를 데려오게 했다. 아버지 아가멤논이 내세운 구실은 아킬레우스와 짝을 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왔다.
이피게네이아가 산 제물로 바쳐지려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은 문득 가여웠던지 처녀를 거두고 그 자리에다 대신 암사슴 한 마리를 놓았다. 그리고는 이피게네이아를 구름에 싸서 타우리스로 데려갔다. 타우리스에서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자기 신전의 여사제로 만들었다.
아르테미스의 분노가 가라앉자 순풍이 불어 함대가 출항할 수 있었다.
(중략)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모두들 고국 그리스로 귀향한다.
트로이의 멸망과 그 이후 ... <아이네이아스 이야기>
이제 <정복당한> 트로이아 쪽 생존자들을 좇아 그들의 험한 여정을 지켜보기로 하자.
트로이아 인들은 고국이 멸망하자 대장 아이네이아스 휘하로 들어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 저 운명의 밤, 목마가 무장한 그리스 장수들을 토해 내고, 이어 도시가 함락되고 도성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 아이네이아스는 그 난중에서 아버지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구해 내어 그곳을 떠났다.
아버지 안키세스는 너무 늙고 병약하여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런 아버지를 어깨에다 무등 태우고 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아들을 손잡고 아내는 뒤따르게 하여 있는 힘을 다해 그 불바다가 된 도성을 빠져 나왔으나, 뒤에 보니 그 난리통에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마침내 미리 약속해 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있다가 아이네이아스의 휘하에 몸 붙여 왔다. 몇 달 동안 이곳에서 항해 준비를 한 뒤 이들은 새 터전을 향해 출범했다.
처음에는 거기에서 가까운 트라케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를 건설할 생각이었으나, 아이네이아스는 해괴한 일을 당하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략)
트로이아 인들이 목적지를 향해 순조롭게 항해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헤라 여신의 저 심통을 부리는 고질병이 도지지 않을 리 없었다. 헤라 여신은, 파리스라는 트로이아 인이 자기 아름다움을 우습게 보아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 주었던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천상의 신들이 이렇게 한(恨)을 품을 수 있을까?
헤라 여신은 황급히 아이올로스를 찾아갔다. 아이올로스는 바람의 지배자로서, 오뒤쎄우스에게 순풍을 보내 주고, 역풍은 자루에 넣어 주둥이를 꽁꽁 묶어서 건네 주던 신이었다.
아이올로스는 여신의 명을 좇아, 아들 보레아스와 튀폰을 비롯, 바람이란 바람은 다 보내어 바다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랬으니 폭풍이 몰아쳤을 수밖에.
트로이아 유민들의 배는 진로를 벗어나 멀리 아프리카 해안까지 떠밀려 갔다. 선단은 가까스로 침몰을 면하면서 풍비박산하니, 아이네이아스는 자기가 탄 배 한 척만이 무사하거니 여겼다.
이렇게 위급할 때, 포세이돈은 바다 위로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며 파도 위로 고개를 내밀고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폭풍에 떠밀리는 아이네이아스의 선단을 보았다.
포세이돈은 누이 헤라가 평소에 트로이아 인들을 껄끄럽게 여기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렵지않게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포세이돈으로서는, 아무리 누이라지만 자기 영역에까지 들어와 난장판을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람을 모두 불러 호된 명령으로 물러가게 했다. 포세이돈은 또 폭풍에 떠밀려 바위 위에 올라가 있던 배 몇 척을 삼지창으로 푹 찍어 바다에다 내려놓았다. 그 동안 트리톤과 바다의 요정들은 가라앉은 배 밑창에 어깨를 대고 밀어 다시 물 위로 떠오르게 했다. 트로이아 유민들은 바다가 잔잔해지자 가까운 해안을 바라보고 돛을 올렸다. 그곳이 바로 카르타고 해안이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배가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월러(Waller)는 <호민관(크롬웰)에게 부치는 찬사 A Panegyric to my Lord Protector>라는 시에서, 포세이돈이 폭풍을 진압하던 일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포세이돈이 거친 파도 위로 얼굴을 내밀고
바람을 꾸짖어 트로이아 인들을 구했듯이
전하(殿下)께서도 제후 위에 서시어 세간을 시끄럽게 하는
야망의 폭풍을 잠재우셨다.
디도
트로이아 유민들이 천신만고 끝에 상륙한 카르타고는, 시실리 맞은편에 있는 아프리카의 해안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당시 튀로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여왕 디도의 영도 아래 새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건설된 국가는 후일 로마의 숙적이 된다.
디도는 튀로스 왕 벨로스의 딸이자 아버지의 왕위를 이은 퓌그말리온의 누이였다. 디도의 남편은 시카이오스라고 하는 갑부였으나, 재산을 탐내던 처남 퓌그말리온 손에 죽었다.
디도는 남편이 오라비 손에 죽자, 남편의 재산을 챙기고는 많은 친구, 하인 그리고 백성들을 이끌고 튀로스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디도 일행은 미래의 보금자리가 될 땅을 고르고는 원주민들에게 소가죽 하나로 덮을 만한 땅만 떼어달라고 부탁했다. 원주민들이 이를 쾌히 승낙하자 디도는 소가죽을 가늘게 잘라 몇 개의 끈을 만들고는 그것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안에다 성을 쌓고 그 성을 뷔르사(<소가죽)>이라는 뜻이다)라고 명명했다. 이 성을 중심으로 카르타고 도성이 일어나, 이윽고 강대 화려한 도시로 발전했던 것이다.
아이네이아스를 비롯한 트로이아 유민은 바로 정황이 이러한 도성에 당도한 것이다. 디도는 이 유명한 나라 유민들을 환영하여 호의와 우정을 아끼지 않았다. 디도는,
"나도 고생해 본 사람이라 어려운 사람들 사정을 잘 압니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트로이아 유민들을 위해 잔치도 베풀어 주고 힘과 재주 겨루기 시합도 열어 주었다. 유민들은 여왕 휘하의 장병들과 같은 조건에서 겨루었다. 여왕은,
"승리자가 트로이아 사람이건, 튀로스 사람이건 나에겐 아무 상관이 없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경기가 끝나자 잔치가 벌어졌는데, 아이네이아스는 이 자리에서 여왕의 청에 따라 트로이아 멸망 당시의 갖가지 사건, 트로이아가 함락된 후 그들이 겪었던 신고만난을 두루 이야기했다. 디도는 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의 공적에 감격한 나머지 아이네이아스에게 불 같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도 마침 유민으로서 방랑도 끝난 참인데다 일거에 집과 왕국과 신부를 얻는 셈이어서, 디도의 사랑이라는 행운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꿈같은 세월이 열 달이나 지나갔다.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도, 그 해변에다 세울 왕국의 도성도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본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어 아이네이아스의 사명을 상기시키고 항해를 계속하게 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렇게 해서 디도를 버렸다. 물론 디도는 감언이설로 그를 유혹하거나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네이아스의 마음은 더 이상 디도에게 있지 않았다.
아이네이아스에게 버림받은 디도는 자기 사랑과 긍지에 대한 이 같은 모욕을 참을 길 없었다. 아이네이아스가 기어이 떠났다는 사실을 안 디도는 장작을 높이 쌓아 올리게 하고는 그 위로 올라가 칼로 제 몸을 찌르고는 장작과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트로이아 인들도 도성 하늘로 솟아오르는 그 불길을 보았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게 무슨 불길인지 모르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다음 풍자시는 <명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디도여, 그대 팔자가 기구하구나.
초혼도 그랬고 재혼도 그랬다!
첫 남편이 죽자 그대는 나라를 떠났고,
두 번째 남편이 나라를 떠나자 그대는 죽었으니.
비극의 탄생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은 메넬라오스의 형이었다. 아가멤논은, 동생이 입은 피해를 복수한답시고 그 전쟁의 와중에 휘말렸으나, 동생과는 달리 그 뒤끝이 좋지 못했다. 아가멤논이 전장에 나가 있을 동안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남편을 배신했던 것이다. 이 여자는 남편이 귀국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남편을 죽이려 했다. 결국 이 둘은 귀국 축하 잔치 자리에서 아가멤논을 죽이고 말았다.
이 배신자들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까지 죽일 계획이었다. 당시는 아직 어렸으나 살려 두면 후환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의 누나인 엘렉트라는 동생을 숙부인 포키스 왕 스트로피오스에게로 망명하게 했다. 오레스테스는 스트로피오스의 궁전에서 왕자 필라테스와 함께 자랐다. 이 둘의 우정은 오늘날 속담으로 남아 있을 만큼 각별했다. 엘렉트라는 동생에게 사자를 보내어 아버지의 원수 갚음을 몇 번이나 상기시켰다. 장성한 오레스테스는 뎊로이 신전을 찾아가 신의 뜻을 물었다. 신의 뜻은 그가 기왕에 다지던 복수의 결의를 한층 더 단단하게 다지게 했다.
오레스테스는 변장하고 아르고스로 가서, 스트로피오스의 사자로,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유골이 담긴 항아리까지 가지고 갔다. 오레스테스는 당시의 관습대로 아버지의 산소에 고유(告由)하고 제물을 드린 뒤에 누나인 엘렉트라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고는 아이기스토스와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였다. 자식이 그 어미를 죽이는 이 차마 못할 행위는, 어미 쪽에 죽어 마땅할 죄가 있고, 신들의 뜻이 명백히 그러했다는 사실로 그 죄가 덜어질 것이긴 하나, 예나 오늘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복수의 여신 에리뉘에스는 오레스테스를 미치게 한 뒤 이 나라 저 나라로 쫓겨다니게 했다.
친구 필라테스는 늘 오레스테스를 따라다니며 돌보고 지켜주었다. 다시 신의 뜻을 물은 오레스테스는, 스퀴티아 지방 타우리스에 가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아르테미스 상을 모셔 오라는 쾌를 얻었다.
오레스테스와 필라테스는 타우리스로 갔다. 이 땅에 사는 야만족에게는, 제 나라로 숨어든 이방인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오레스테스와 필라테스도 이들에게 잡혀 포박당한 채 여신의 제단에 제물로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아르테미스 신전의 여사제는 다름 아닌 오레스테스의 누이인 이피게네이아였다.
독자 여러분은, 이피게네이아가 아르테미스 신전에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를 구해 가지고 데려간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제물이 될 두 청년의 정체를 알자 자기 정체도 밝혔다. 세 사람은 여신상을 가지고 이 나라를 떠나 뮈케나이로 갔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에 대한 에리뉘에스의 복수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레스테스는 결국 아테나이에 있는 아테네 여신에게로 도망쳤다. 아테나 여신은 그를 보호하는 한편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법정에 명하여 오레스테스의 운명을 재판에 회부하게 했다.
에리뉘에스가 오레스테스를 기소햇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델포이에서 알아본 신의 뜻이 그러했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자신을 변호햇다. 투표 결과 유죄를 주장하는 자의 수와 무죄를 주장하는 자의 수가 같았다. 오레스테스는 아테나가 정한 규정에 따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중략)
그리스 고전극 중에서도 가장 비장한 장면의 하나는, 소포클레스가 그린,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만나는 장면이다. 오레스테스가 포키스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그는 복수할 기회가 올 때까지 자기의 귀환을 비밀에 부칠 것을 결심하고는 엘렉트라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엘렉트라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엘렉트라를 시녀로 오해하고, 누나에게 자기 자신 곧 오레스테스의 유골이 든 것이라면서 항아리를 내민다. 엘렉트라는 정말 동생이 죽은 줄만 알고 그 항아리를 가슴에 안고는, 그 슬픔을 정감 어린 언어, 절망의 언어로 쏟아낸다.
구혼자들의 최후
다음 날 오뒤쎄우스는 파이아케스 인들의 배로 출항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고향 이타케에 도착했다. 배가 해안에 닿았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뱃사람들은 그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뭍에 내려놓은 다음 선물 상자를 항구에 부리고는 그 길로 돌아가 버렸다.
오뒤쎄우스는 잠을 깨었지만 20년 간이나 떠나 있던 고향 이타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테나 여신이 젊은 양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나, 그곳이 어디며 그의 부재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자세히 들려 주었다. 이타케와 인근의 여러 섬에 사는 백 명 이상의 귀족들이 벌써 몇 년 전부터 오뒤쎄우스가 죽은 것으로 알고,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러 와서는 그의 집을 차지하고 하인을 부리는 등 주인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복수하려면 오뒤쎄우스는 한동안 자기 정체를 밝히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아테나 여신은 그를 꼴사나운 거지로 변신하게 했다. 오뒤쎄우스는 이런 모습으로 돼지치기인 에우마이오스를 찾아갔다. 오뒤쎄우스의 충복이었던 에우마이오스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뒤쎄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집에 없었다. 트로이아 원정에 참가했던 다른 나라 국왕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행 도중에 텔레마코스는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아테나 여신의 계시를 받았다. 황급히 귀국한 텔레마코스는 에우마이오스의 집으로 갔다. 한동안 정세를 관망한 뒤에 어머니에게 결혼을 조르는 무리들 앞에 나타나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텔레마코스는 에우마이오스의 집에서 낯선 사나이를 만났다. 상대가 거지 행색을 하고 있는데도 텔레마코스는 그를 정중하게 대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에우마이오스는 페넬로페에게 텔레마코스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알리러 갔다. 텔레마코스가 직접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구혼자들 무리가, 귀국길에 오른 텔레마코스를 잡아 죽이려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텔레마코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다. 에우마이오스가 나가자 아테나 여신이 오뒤쎄우스 앞에 나타나, 아들에게 정체를 밝히라면서 오뒤쎄우스의 몸에다 손을 대었다. 그러자 초라한 거지 행색은 간 곳 없고 대신 정력이 넘치는 장년의 헌헌장부가 텔레마코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텔레마코스는 그 모습에 놀라서 처음에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거니 여겼다. 그러나 오뒤쎄우스는, 자기가 바로 아버지임을 밝히고, 거지 행색은 아테나 여신이 부린 조화였다고 설명했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목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목 놓아 울고 싶었던 두 사람은
정담을 나누며 눈물로 설움을 달랬다.
(호메로스의 <오뒤쎄이아> 제16권 254~258행)
오뒤쎄우스 부자는 구혼자들을 내쫓고 가증스러운 그들의 행위를 복수할 방도를 의논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텔레마코스는 집으로 돌아가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구혼자들을 대하고, 오뒤쎄우스는 동냥하러 그곳에 간다는 것이었다.
옛날 거지는 오늘날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특권을 누렸다. 말하자면 길손으로서, 갖가지 풍물을 접한 귀한 이야기꾼으로서 족장들의 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고, 그 집안에서도 귀한 손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때로 모욕을 당하는 수가 물론 있기는 했다.
오뒤쎄우스는 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고, 혹 자기가 모욕을 당하거나 매를 맞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길손이나 거지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듯이 그저 수수방관하라고 당부했다.
텔레마코스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늘 그렇듯 술자리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텔레마코스가 돌아온 것을 보고 겉으로는 반갑게 맞으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저희 계획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고는 혀를 찼다.
이윽고 늙은 거지에게도 그 잔치 자리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거지가 먹을 음식이 술상에서 나뉘어져 넘어왔다.
그런데 오뒤쎄우스가 자기 집 안뜰에 들어섰을 때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그 뜰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죽을 날만 기다리며 누워 있었는데, 이 개가 늙은 거지를 보자 고개를 들고 귀를 세운 것이었다. 그 개는 오뒤쎄우스 자신이 기르던 <아르고스>로, 사냥 다닐 때 곧잘 데리고 다니던 개였다.
개는 오래 못 보던 오뒤쎄우스가 가까이 오는 걸 알고,
귀를 세우고 고개를 흔들어 환영 인사를 했으나,
일어날 힘도 없었고,
옛날처럼 주인 옆으로 갈 기력도 없었다.
오뒤쎄우스는 그 개를 보고 몰래 울었다.
……
드디어 아르고스의 운명은
그 늙은 생명을 해방했다.
살아서
20년 만에 오뒤쎄우스를 본 순간에.
(호메로스의 <오뒤쎄이아> 제17권 361~392행)
오뒤쎄우스가 대전(大殿)에 앉아, 술자리에서 물린 음식을 먹고 있는데 구혼자들이 그에게 거만을 떨기 시작했다. 오뒤쎄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자, 그 중 하나가 의자를 들어 그를 때렸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자기 집 대전에서 그 같은 봉변을 당하는 걸 보고 분을 참을 수 없었으나 아버지의 당부를 생각하고는, 나이는 많지 않으나 손님을 보호해야 할 집주인의 입장을 보아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페넬로페의 이야기
페넬로페는 용모의 아름다움보다는 성격이나 행실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해진 신화의 영웅적인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페넬로페는 스파르타의 왕 이카리오스의 딸이었다. 이타케 왕 오뒤쎄우스는 많은 경쟁 상대를 물리치고 이 페넬로페를 아내로 삼는 데 성공했다. 신부가 친정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이카리오스는 차마 딸을 떠나 보내기 싫었던 나머지, 남편을 따라 이타케로 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살자고 했다. 오뒤쎄우스는 페넬로페에게 그 선택을 맡겨 친정에 머물든 자기와 함께 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페넬로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
이카리오스는 더 이상 강권할 수 없어 딸을 떠나 보내고는 부녀가 이별한 장소에다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정절>의 여신에게 봉헌했다.
오뒤쎄우스와 페넬로페는 의좋게 살았지만 결혼한 지 겨우 1년 남짓 지나 이 행복은 끝났다. 트로이아 전쟁이 터져 오뒤쎄우스가 소집된 것이다. 오뒤쎄우스가 오랜 세월 집을 비운데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판국이어서 페넬로페는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구혼자들 중 하나를 골라 혼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들 등쌀을 이겨 내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오뒤쎄우스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차일피일 구혼자 선택을 미루었다.
구혼자 선택을 미루는 빌미의 하나로,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壽衣) 짜기를 시작하고는, 그 수의 마련이 끝나면 구혼자들 중 한 사람을 고르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낮에는 베를 짜고 밤이 되면 짠 베를 풀었다. 이것이 유명한 <페넬로페 베짜기>라는 것인데 이 말은 오늘날 쉴새없이 하는 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가리킬 때 쓰인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 중 누군가를 남편으로 선택하겠다는 약속을 오래 미루어 오고 있었다. 너무 오래 미루어 왔기 때문에 페넬로페에게는 더 이상 구실 삼을 거리가 없었다.
페넬로페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어쩌면 남편이 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오랜 부재가, 남편의 귀국 가능성을 무산시키는 증거로 보인 것이었다.
그 동안 아들은 장성해 있어서 혼자 제 앞을 닦을 만했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에게 재주를 겨루게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재주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남편으로 삼는다는 데 동의한 터였다.
재주 겨루기는 활쏘기 시합으로 결정되었다. 열두 개의 고리를 나란히 걸어놓고, 화살 열두 개를 쏘아 열두 개의 고리 구멍으로 빠져 나가게 하는 자가 상으로 페넬로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텔레마코스는 무기고에서, 옛날 어느 영웅이 오뒤쎄우스에게 주었던 활을 꺼내어 와서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과 함께 대전에다 놓았다. 텔레마코스는 시합에 앞서, 시합 때문에 모두가 흥분하면 혹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워 구혼자들의 무기는 모두 다른 데 치워 놓게 했다.
시합 준비가 끝나자, 이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활을 구부려 시위를 매는 일이었다. 텔레마코스가 해보려 했으나 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텔레마코스는, 자기 힘으로는 무리라고 솔직하게 시인하고는 그 활을 다른 사람 손으로 넘겼다. 그러나 그 사내도 활을 구부리려다 실패하고 동료들의 비웃음 속에 물러났다.
구혼자들이 차례로 나섰다. 아무도 활을 구부려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때 오뒤쎄우스가 나서며, 허리를 구부리고는 자기에게도 한 번 시켜봐 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했다.
"자금은 거렁뱅이 신세올습니다만, 옛날에는 이놈도 무사였답니다. 그래서 이 늙어빠진 손발에도 아직 힘이 좀 남아 있습지요."
구혼자들은 거지의 말에 배를 잡고 웃다가 정색을 하고는, 이 무례한 자를 대전에서 끌어내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오뒤쎄우스를 변호하고, 노인의 소원을 한 번 들어주어 해가 될 게 무엇이냐면서 한 번 해볼 것을 명했다.
오뒤쎄우스는 활을 잡자 과연 명인(名人)다운 솜씨로 다루는데, 시위를 한쪽 오늬에 걸었다가 활대를 구부려 다른 쪽 오늬에다 걸고는, 살을 먹이고 시위를 당겨 화살이 틀림없이 고리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오뒤쎄우스는 무례한 자들에게 경탄할 여유도 주지 않고 돌아서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다음 표적은 이것이다!"
그리고는 구혼자 가운데서도 가장 무례한 자를 쏘아 죽였다. 화살이 목을 관통하자 사내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쓰러져 죽었다.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 그리고 또 하나의 충복은 이미 무장하고 오뒤쎄우스 옆에 서 있었다.
기겁을 한 구혼자들은 무기를 찾느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무기가 거기에 있을 리 없었다. 빠져 나갈 구멍도 물론 없었다.
에우마이오스가 이미 문을 굳게 잠근 뒤였기 때문이었다. 오뒤쎄우스는 더 이상 구혼자들에게 정체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 정체를 밝힌 다음, 자기야말로 오래 떠나 있었긴 하나 그들이 침범했던 집의 주인이며, 그들이 낭비한 재산의 소유자이며, 10년이란 오랜 세월(트로이아 함락에서 이타케 귀환까지) 그들이 괴롭혀 온 아내의 남편이며, 아들의 아버지인 오뒤쎄우스이니 이제 그동안 밀린 신세를 갚겠다면서 구혼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쏘아 죽였다.
오뒤쎄우스는 이로써 다시 그 궁궐의 주인이 되고 아내와 왕국을 되찾았다.
테니슨의 <오뒤쎄우스>라는 시는 노령의 오뒤쎄우스를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영웅은 수많은 위험과 싸워 이긴 뒤, 되찾은 궁전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 염증이 났던 나머지 다시 모험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57~65행)
자, 동무들이여,
다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도 늦지 않다.
노를 저어라, 그리고 제 위치를 지키며
노호하는 바다를 두드려라.
내 목적은,
해가 지는 곳보다, 서쪽 하늘 별들이 물에 잠기는 곳보다
더 먼 곳으로, 생명이 끝나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소용돌이가 우리를 삼키는 일도 있으리라.
혹 행복의 섬에 이르러
우리가 익히 아는, 저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일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