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 하바나 혁명광장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ón은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기념비가 있는 쿠바 하바나의 시민광장이었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쿠바혁명은 1959년 1월1일 카스트로가 부정부패로 국민의 미움을 받아온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쿠바혁명과 함께 이곳에서 수많은 혁명 시위, 퍼레이드, 투쟁 등이 열렸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매년 5월 1일과 7월 26일 100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2~4시간을 연설한 곳이다. 면적 72000㎡로 세계적으로 매우 큰 광장 중 하나다. 기념탑 뒤편에는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의 집무실을 경호하는 근위대가 있고 반대편에는 내무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전면에는 쿠바의 또 다른 영웅인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얼굴과 그의 표어인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건물 전면에 크게 걸려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밤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을 조명으로 장식한다.
광장에 들어서니 거대한 혁명탑이 솟구쳐 있다. 높이 110m의 혁명 기념탑이다. 혁명탑 앞에는 민족 해방운동가 호세 마르티 동상이 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로 이 나라의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호세 마르티 탑이다. 이곳 혁명광장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세 마르티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1948년부터 1951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쿠바 행정부 건물 외벽에 체 게바라 얼굴과 그의 표어가 크게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다. 그는 쿠바 국가원수 카스트로와 손잡고 쿠바 혁명을 이끌었다. 볼리비아에 잠입하여 혁명을 주도 하다가 미국 CIA의 사주에 의해 체포 사살되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인들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얼굴 밑에 써놓은 글 구절은 광장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은 ‘너 잘 하고 있어’이고 오른쪽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뜻이다. 체 게바라 얼굴이 붙어있는 건물은 현재는 내무부 건물이다. 뒤로 상당히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쿠바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쿠바에 도착한 이후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쿠바는 독립 이후에도 독재정치가 계속되었다.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 관광산업, 도박산업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으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었다.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와 그가 이끄는 156명의 무장 청년들이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습격작전이 독재정권과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하고 카스트로는 체포되었다.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역사는 나를 무죄라고 할 것’이라는 유명한 자기변론을 하였다. 카스트로는 15년 형을 받고 1955년 석방된 뒤 멕시코로 건너가 ‘7월 26일 운동’을 결성하고 독재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노선을 표방하였다. 이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중심으로 86명의 혁명군들은 1956년 12월 2일 쿠바 동부 지구에 상륙한 뒤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을 시작하여 1953년에 이은 혁명전쟁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독재정권에 시달려 왔던 농민들을 투쟁에 참가 시켰으며, 1958년에는 반反 바티스타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등 독재 권력과의 전쟁 끝에 1959년 1월 1일 드디어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쿠바혁명 정권은 곧바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으며,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획기적인 농지 개혁에 착수했다. 특히 1959년 10월에는 쿠바에서 미국의 이권을 폐기하고, 미국 자본이 착취하는 것을 제한했으며, 1960년에는 미국계 기업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지 2년 3개월 반이 지난 1961년 4월 16일에 카스트로는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처음으로 선언했다. 쿠바혁명 이후 소위 ‘피그만 침공The Bay of Pigs’ 이 일어났고, 2002년 현재까지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단절되어있다. 피그만 침공이란 1961년 4월 16일에 쿠바 혁명정권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선언을 하자 다음날인 4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이 주축이 돼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2506 공격여단’을 창설해 쿠바를 침공한 사건이다. 그러나 미 공군의 막판 지원 부족으로 실패, 1백여 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은 체포됐으며 카스트로와 미국 간의 대립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이후 61년 쿠바와 미국과의 외교가 단절되었으며, 미국은 이후 40년 이상 쿠바에 대한 무역제재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쿠바 방문은 1928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방문이 마지막이었으며, 2002년 5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했다.
세계 공산주의의 수도들 모스크바, 부다페스트, 등은 아직도 구소련이 배급한 어두컴컴한 코트를 덮어쓰고 있는 인상이다. 그러나 하바나는 화사한 혁명의 도시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눈부신 카리브해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도 한 몫 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이곳이 체 게바라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의 얼굴은 혁명광장의 벽을 비롯해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영웅적인 게릴라로 불리는 아이콘이다. 1950년대 체 게바라의 사진을 변형한 것이다. 사진을 찍은 알베르토 코르다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자신의 작품에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혁명과 자유의 아이콘이라는 경계를 넘어 상업적 이미지로 팔리는 데는 우려를 나타낸다. 혁명광장 주변에는 카스트로의 집무실과 내무성, 법원, 국방건물, 방송국, 국립극장, 국립도서관 등 많은 행정 부처들이 밀집해 있다. 아침 햇살이 혁명광장을 화사하게 밝힌다. 매우 넓어서 혁명탑과 내무부 건물에 걸린 체 게바라의 얼굴을 보는데 많은 걸음을 요구한다. 광장 주변 도로에는 오토바이 택시와 여러 차량들이 많이 들어온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때문이다. 쿠바의 혁명에 대하여 중요한 역사 한 단면을 배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