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Alexandre Dumas Père ( 알렉상드르 뒤마 1802-1870)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흥미롭게 엮어 내며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펼쳤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등으로
유명한 19세기의 대중소설가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홀로 프랑스 역사소설의 부흥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의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전환 기법,
오락소설에 어울리는 정형화되었으나 힘차고 밀도 있는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에서는
따를 이가 거의 없다고 여겨질 만큼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집필력 역시 왕성해서 무려 300편이 넘는 소설과 90여 편의 희곡을 썼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1802년 7월 24일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인 엔 빌레르코트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라 페예트리라는 시골 귀족과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뒤마라고 했으며,
나폴레옹 군대에 일반 병사로 들어가
장군의 위치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뒤마가 4세 때 아버지가 죽고,
상인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뒤마를 공부시켜 성공시키려 했다.
그러나 뒤마는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으며,
읽고 쓰기만을 간신히 했고,
집 근처의 숲을 뛰어다니면서 전쟁 놀이와 탐험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때문인지 어린 시절에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이야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세 때
뒤마는 파리에서 한 변호사 사무소에 사환으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옛 친구들인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귀족들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낭만주의 문학의 세계에 눈을 떴다.
20세 무렵에는
이런 귀족들과의 연줄을 바탕으로
루이 필리프의 서기로 일했으며,
생활이 안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극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여성 편력도 막을 올렸다.
그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자로,
에너지가 넘쳐 늘 주위에 사람들이 들끓었는데,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을 매일 갈아치웠다.
그의 매력은 당대 지식인들도 사로잡았는지
라마르틴, 빅토르 위고, 들라크루아 등과도 일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2세 때
뒤마는 한 여성 재단사와의 사이에서
후일 〈춘희〉를 써서 유명해질 사생아를 낳았다.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들은 소(小)뒤마,
그는 대(大)뒤마로 불린다.
뒤마는 이 아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생아로 자라난 아들은
희곡 〈사생아〉 및 〈방탕한 아버지〉 등을 통해
자신과 아버지의 처지를 극화하기도 한다.
27세 되던 해,
뒤마는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으로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작가 데뷔를 했다.
전형적인 낭만주의 작품인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은
화려한 문체와 정열적인 인물들, 로
맨틱한 설정,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단번에 관객들을 열광시켰고,
뒤마는 이후 20여 년간 당대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로 활동했다.
30세 때 쓴 〈넬르의 탑〉은
3년 연속 무대에 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뒤마가 희곡 작가로 활동하면서 쓴 희곡은 무려 90여 편에 달하는데,
그는 기존의 희곡 작법에 관한 규칙들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늘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그것을 바로 작품에 반영했다.
그는 이때의 극작법을 후일 소설에도 활용해 대중소설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한편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자
뒤마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일생 공화주의자였으며,
직접 총을 들고 선두에 설 정도로 혁명에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 문학과 연극계 전반을 일신하려던 포부가 좌절되고,
그 과정에서 빅토르 위고 등과 함께
배척당하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그해에는 연극배우와 동거를 하면서 딸 한 명을 낳기도 한다.
1834년부터
뒤마는 프랑스 남부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여행기를 쓰는 한편, 극작도 계속했다.
또한 정기간행물의 연재소설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쓴 희곡들을 개작하여 연재소설 시장에 뛰어들었다. 1
830년대 프랑스에서는
출판 검열이 해제되면서 많은 신문과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그에 따라 연재소설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뒤마는 점차 소설로 자리를 옮겨 갔다.
1838년,
뒤마는 자신의 희곡을 개작한 소설 《폴 대위》를 발표하여
소설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해에 작가 오귀스트 마케를 알게 되는데,
두 사람은 1840년대에 함께 '소설 공장'을 차려
엄청난 수의 연재소설들을 쏟아 냈다.
뒤마가 줄거리와 인물의 성격을 스케치하면,
다른 작가들이 플롯을 일부 보충하거나 세부 묘사를 담당하는 식으로
빠르게 소설들을 찍어 낸 것이다.
뒤마가 만들어 낸 것은 오락소설이었고,
여기에는 지적인 깊이나 섬세하고 정선된 문체, 철학적 숙고 등이 요구되지 않았다.
뒤마의 소설 공장에는
많을 때는 70여 명의 작가들이 함께 작업했으며,
1년에 20∼30편의 소설들을 발표했다고 한다.
뒤마의 유명한 소설인
《삼총사》와 《몬테 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역시 이런 방식으로 쓰였다.
그는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면
곧바로 후속작 집필에 착수했는데,
《삼총사》의 후속작인 《20년 후》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가 쓴 역사소설들은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극적인 설정들과 모험소설적인 전개로 역사소설의 유행을 이끌었다.
당대를 비롯해 오늘날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역사를 역사서보다 뒤마의 소설로 배웠다고 할 만큼,
그는 오늘날에도 인기 있는 역사소설가로 군림하고 있다.
뒤마의 가장 큰 장점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속도감 있는 서술을 하여
사건 전개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심리 묘사나 수사학적인 표현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쓰는 소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속필 실력 덕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대중소설가지만,
당대 평단의 평가는 그에게 싸늘하기 그지없다.
그는 소설 공장, 문학을 산업으로 만들었다 등의 혹평과 함께
가난한 작가들의 재능을 착취한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공동 작업 관행은 19세기에 유행하던 방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공동 작업가들이 작품을 나누어 쓴 데 비해
뒤마는 아이디어 스케치나 조연 스케치 정도에만 공동 작가들의 도움을 받았고,
마케와는 플롯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수준이었다.
작품 집필은 뒤마가 직접 했다.
희곡 작가 시절부터 소설가로의 변신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성공으로
뒤마는 엄청난 돈을 벌었으나,
방탕한 생활과 심한 낭비벽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미식, 여성 편력, 여행, 오페라 등 일생 자극적인 생활에 탐닉하며 보낸 것도 문제였지만,
특히 센 강변이 보이는 곳에
몬테크리스토 성을 짓고,
자신의 작품을 올릴 극장을 만드는 데 큰돈을 쓴 것이 요인이었다.
그런 와중에 1848년 혁명으로
연극과 연재소설 수요가 줄어들고,
몇 차례 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빚이 점점 불어났다.
결국 그는 몬테크리스토 성과 극장을 처분했지만,
1851년
파산 선고를 받고 빚쟁이들을 피해 브뤼셀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또 한 사람의 사생아를 낳고, 《회고록》 집필에 매달렸다.
1853년,
뒤마는 파리로 돌아왔다.
다시 재기하고자 가스파르 드 셰르빌이라는 작가와 공동 작업 형식을 꾸리고
다양한 형식의 소설들을 발표했으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가스파르의 역량이 오귀스트 마케에 미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시대가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 문학으로 이행하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전만큼 대중소설이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된 것이다.
뒤마는 1860년
이탈리아로 가서
부르봉 왕가로부터 벗어나려는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에 잠시 투신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지를 떠돌아다니다
1869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870년 12월 5일
디에프 근교의 집에서 가난 속에 숨을 거두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