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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한국댄스사 100년[교원대 김해연님의 석사논문 중에서 인용]
우리나라에 댄스스포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5년 청국 공관이 개최한 무도회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860년대에 이미 서양 문화의 한 부분으로 서양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의 영향으로, 당시 식민지 상태에 있던 우리 나라는 동경 유학생 등 일부 계층에 의하여 서양식 댄스가 도입되었다.
광복 이후, 서구 문물을 쉽게 접하게 되면서 사교댄스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 수요는 급증하게 되었다. 기록상 1890년 즈음 미국 공사 재임 중인 이하영씨가 보스턴왈츠(Boston waltz)를 추었고, 귀국 후 서울 종로의 손탁호텔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사교춤을 추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1930년대까지 춤에 대한 전문교사는 없었으며, 1945년 이후 경음악단의 밴드마스터였던 윤은석씨(일명 윤바람, 호는 풍(風)이었다 함)가 일본에 자주 왕래하면서 틈틈이 춤을 배우고 영국 황실무도교육협회에서 발간한 ‘Book dance’ 라는 책으로 독학하는 정도였었다고 한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서구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되면서 록앤롤이나 스윙댄스에 맞춰 추는 지터벅 등의 사교춤이 유행하였다.
1947년에는 댄스 음악만을 전담하는 경음악단이 생기고 1949년에는 서울 미도파의 21구락부가 최초의 댄스 홀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유우봉, 댄스스포츠의 이론과 실제 서울무도원, 2000 p. 14]
이렇듯 해방 이후 미군들에 의해 무분별한 영향받아 자유당 시대를 거치면서 고위장성 모임에서 사교댄스가 건전한 부부동반의 문화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서양의 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이를 생활스포츠로써 전파하고자 하는 많은 선각자와 무도인 및 단체들에 의해 자각이 일어났으며, 1957년 장충 체육관에서의 제1회 전국무도선수권 대회(한국일보후원)를 통해 비로소 경기대회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4.19와 5.16혁명을 통해 다시 무도계는 침체되었고,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1969년 대한무도예술 협회(김익수회장)가 당시 문화공보부의 사회단체로 등록되고 1970년에는 문교부의 허가를 얻어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김종기회장)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국내 무도계는 국제 기구에 가입하여 프로와 아마츄어 선수들을 배출하였으며,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youth camp에서 국제댄스스포츠대회(유고, 헝가리, 체코, 일본 참가)를 개최하고 이를 기점으로 무도학원의 양성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1990년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정을 계기로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되었다. 연이어 1991년 ‘풍속영업 규제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에는 무도계에 대한 장려보다 무도학원 및 무도장 설립과 운영에 규제를 가하였다. 따라서 무도는 양성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음성적으로 풍속법의 단속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규제 속에서 무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관련 단체가 꾸준히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도장 및 무도학원을 법적인 체육시설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계 당국과 당시 유일한 사단법인체인 한국무도교육협회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고, 무도교육 협회가 ICAD(1974)와 ICBD(1977)에 모두 가입한 것에 프로 무도인들의 갈등이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무도교육협회의 김종기 회장은 아마추어 회원들을 중심으로 1990년 2월 1일 분과로써 한국 아마츄어스포츠댄스협회(Korea Amateur Sport Dance Committee: KASDC)를 조직하여 당시 무도교육협회의 사무국장이었던 유우봉씨에게 일임하고, 동년 2월 15일 ICAD에 가입하게 하였다.
또한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천정태씨를 중심으로 한 일부 프로 무도인들은 1990년 5월 한국무도평의회(Korea National Council of Ballroom Dancing: KNCBD)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후 ICBD에 가입하였다. 아울러 한국무도교육협회는 한국 최초의 라틴 챔피언이었던 박영택 회장을 중심으로 재정비하여 후계자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한국무도평의회에서 부회장으로 활동해오던 前 모던 챔피언 박효씨를 중심으로 1998년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DanceSport Federation of Korea: DSFK)가 프로 무도인들의 경기운영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이렇듯 프로와 아마추어 댄스스포츠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KASDC는 1996년 11월 2일 서울 KBS 88체육관에서 IDSF 제3회 아?태지역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뤄냈고 아시아 댄스스포츠연맹(ADSF) 창설을 주도적으로 적극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인 1997년 7월 5일 서울총회에서 KADSC는 단체명칭을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SF)으로 개칭하였다. 현재(2000년 기준) 한국에는 1970년에 설립된 한국무도교육협회(KAEDS),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SF, 1990), 한국댄스스포츠평의회(KDC, 1990), 한국무도강사협회(KAEBD, 1996), 대한스포츠댄싱연맹(KSDF, 1997),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DSFK, 1998), 댄스스포츠진흥회(1998) 등이 활약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주요 언론기관 및 스포츠센터, 대학부설 사회교육원 등에서 교양강좌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 동안 풍속법 규제의 대상이 되었던 무도계는 국제사회의 추이에 따라 스포츠로써 각광 받게 되자 다년간 무도인들이 갈망하던 대로 1999년 7월 1일자로 무도학원, 무도장이 법률상 체육시설업으로 신설? 관리하게 되었으며 현재 세부 시행규칙이 마련 중에 있다. 전국적으로 등록된 무도시설은 98년 12월 현재 무도학원 1,221, 무도장 67, 총 1,288개소에 이르며, 그 종사자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대단히 많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도별 업소 현황은 다음과 같다. 문화관광부, 무도학원업? 무도장업 관리 행정지침, (서울: 문화관광부, 1999).
표 2. 전국 시?도별 무도학원 및 무도장 현황
무도학원 무도장
1,288 1,221
2. 댄스스포츠의 양성화 배경
우리 나라 무도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난의 시대를 거쳐 왔다. 해방과 6.25동란 등으로 인한 사회 전반의 혼란 상태에서 서구 문화인 무도가 무분별하게 준비도 없이 흡수되어 국제적으로 통용?보급되고 있는 국제표준무도에 이탈된 형태로 일부 사회적 물의를 야기한 상황 속에 1954년에는 서울 신문에 ‘자유 부인’ 이라는 소설이 연재되면서 이것이 책으로 발간된 이후 영화에까지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 내용은 모 교수 부인과 유한 마담들이 댄스 바람을 일으켜 일탈하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파헤친 것으로써 전 국민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었다. 또한 그러한 물의에 가세한 것으로 1954년 군에서 제대한 ‘박인수’ 사건을 들 수 있는데, 그가 대위로 사칭 계급장을 달고 댄스 홀을 휩쓸며 능숙한 춤 솜씨로 고관부인, 여대생 등 1년 동안 무려 70여 명의 여성들을 농락, 정조를 유린했다는 재판 과정(1955년 7월 22일, 서울 지법)이 각 신문에 대서특필로 연속 게재되면서 당시부터 무도계는 사회적 퇴폐 온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대한무도예술협회를 시작으로 여러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국내적으로는 국제표준무도의 보급을 위해 경기댄스대회를 집중적으로 개최하여 이의 정착에 주력하였다.
1987년부터는 무도교습소의 양성화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5가 18번지에 설치하고 전국의 무도인 지역대표자 1,500여 명의 서명날인을 받아 법적효력을 위한 장치로 개인의 인감증명서(무도양성화用)를 받아 영등포6가 소재 ‘대양합동법률사무소’ 에 공증을 거친 후, 국회사무처에는 청원서를, 대통령?국무총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탄원서의 내용은 무도유흥업소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이는 허용되면서 그 곳의 수요자들이 국제표준무도를 올바르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강습소가 불허되고 있다는 것은 모순된 정책으로 춤을 배울 때는 유죄요, 배우고 나면 무죄냐는 논리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위원장 천정태]
이러한 끈질긴 간청을 통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과 면담이 어렵게 관철되어 여러 국외자료와 국내현황 등을 제시한 후, 마침내 탄원서가 재가되어 당시 체육시설과로 이첩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989년 12월 체육부장관으로부터 총리실에 제출한 탄원서를 이첩 받아 ‘체육시설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삽입시키는 데 검토 중이라는 통보를 받은 후, 다시 치안관계 장관회의에서 풍속법을 제정하는 과정 중 법률 제2조 5호에 삽입되어 국무회의를 거쳐 1991년 2월 5일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1991년 3월 28일자 시행령 제정, 1991년 7월 27일자로 시행규칙이 발표되면서 우리나라 무도 사상 드디어 양성화 결정이라는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9년 7월 1일 무도 분야가 풍속법령을 벗어나 체육 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령으로 이관되면서 지난 30여 년간의 온갖 풍상을 마감하고 바야흐로 댄스문화가 건전한 국민생활체육으로써 그 위상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천정태, 국제 표준 댄스스포츠 교재, 서울 한국무도학원연합회, 1997, pp. 1~5]
3. 초창기 국내 협회의 성립 KDSF(2000.4.21), 유우봉 회장과의 인터뷰
우리 나라 무도사(史)는 해방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해방 이후 서울 출신의 밴드마스터였던 윤은석(윤바람)씨가 7~8년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당시 활동 중이던 이재영, 장사일, 김익수, 배영 등과 함께 1958년 한국무도교사협회를 결성하여 1950년대를 주도하였다면 1960년대는 경기 고등학교 교사였던 김익수씨, 1970년대는 김종기씨가 무도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종기씨는 서울 청담동에 최초로 상원무용학원을 세우고, 박인수 사건 등으로 인한 사회 전반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여기에 무도과를 살짝 집어넣게 된다.
1969년 대한무도예술협회가 문화공보부에 등록되고 1970년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가 교육부 체육국에 허가를 얻으면서 양 단체는 1980년대 후반까지 경쟁적인 구도를 띠게 된다. 전자는 경기단체로, 후자는 지도자교육단체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출발하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이러한 목적 사업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한편,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74년 ICAD, 1977년 ICBD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로 인한 양 단체의 갈등이 1979년 고소 사건으로 이어져 1980년에 한국무도교육협회는 국제기구의 등록을 취소 당하는 국면까지 맞게 되었다.
1957년 장충 체육관에서의 제1회 전국무도선수권대회 이후, 1960년대에는 선수권대회가 유명무실하다가 1977년 대한무도예술협회 주관으로 MBC 문화체육관에서 국제경기대회 파견 한국대표 선수선발전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사의 기자로 재직했던 유우봉(상임 고문)이 MBC 문화체육관에서의 대회를 주선하면서 이 대회를 통하여 그동안 냉담했던 언론의 주목을 받고 공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박효 선수가 챔피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대회에 파견되지 못했다.
당시 한국무도교육협회만이 ICAD와 ICBD에 가입되어 있었기에 박효 커플은 참가자격이 제한되어 있었고, 대신 김성수회장 부부가 한국대표로 참가신청서를 냈는데, 결국 이들도 비자 관계로 출국이 불허되었다. 이후 대한무도예술협회의 부산지부장 김용주가 한국무도평의회로 ICBD 영국본부에 준회원국으로 가입한 사건에 대해 서울지부와 형사적 책임을 묻는 고소 사건의 혼란 속에 또 다시 1977년 4월 한국무도교육협회가 ICBD에 가입하는 사실이 있었으나, 그 후 1982년 5월 ICBD 총회 2일째 일본인 회장 Kosaku Fujimura의 「1982년 10월 동경국제무도선수권대회 참가를 희망한 한국의 2단체에 대한 ICBD 가맹의 진위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무장 Marry Edward는 ‘한국이 과거 ICBD에 가맹이 승인된 사실은 있으나, 그 후 국제 회의에 참석한 사실도 없고, 회비 등도 전혀 이행하지 않았을 뿐 더러 실적관계 등으로 하여 잠시 동안 회원국의 자격을 잃었다’는 답변을 하여 사실상 이미 그 전에 가맹이 취소되었다는 인증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90년 2월 2일 과거 ICBD에 가입하였다가 말소된 한국무도교육협회와 부산? 한국 무도평의회(KCBD) 3단체간 분쟁을 해결하고 한국 실태를 파악하고자 ICBD 본부회장단 2명이 내한하였다. 그 다음 날인 3일 전국 무도인 3개 단체 회원 200여 명이 서울 조선호텔 연회장에서 2일간 토의와 설문을 걸쳐 1차 회의를 마쳤다. 같은 해 3월 4일 ICBD 부회장 Tetsuji Kojima가 단독 내한하여 입회 하에 지역대표 140명 무기명 투표로 한국을 대표하는 회장선출에 천정태씨가 선임되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구로써 한국무도평의회(KNCBD)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천정태, 한국 댄스스포츠 평의회 연혁 팜플렛, 서울: KDC, pp. 1~8]
1986년 일본세계무도권선수대회(ICBD 주최)에 김종기씨를 단장으로 하여 박효조 등 4커플을 출전시켰으며,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국제 댄스스포츠 대회 이후, 오늘날과 같은 많은 협회들이 결성, 활성화되어 바야흐로 국내협회의 춘추전국 시대로 도래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