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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金氏王族은
북방草原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定說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4~6세기 신라는 중국문화를 거부하고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
서방의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로마가 무너지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2대 일류문화를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匈奴族의 당당한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1장 : 우리 몸속에 흐르는 匈奴의 피
민족사의 주도세력인 신라 金氏 왕족의 뿌리
우리
민족사의 주체세력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金氏들이다.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상징되는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朴氏, 昔氏에 이어 金氏 왕조를 연 것은 3세기 초 味雛이사금이고 4세기 奈勿麻立干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金氏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 신라
金氏들이야말로 화랑도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도세력이고 따라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이란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 집단은 민족문화의
原型을 굳히게 한 主役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성과 민족사의 뼈대가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 신라 金氏 왕족들은 그래서
민족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불릴 만하다.
요사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신라 金氏 왕족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계이며 이 집단이 북방에서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신라 金氏 왕족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던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왕들은 奈勿 麻立干, 智證 麻立干식으로 불렸다. 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語源이다. 이 金氏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積石木槨墳이라
불린다. 시신을 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木槨이 썩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積石木廓墳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장례식과 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墓制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4~6세기의 6대에 걸친 麻立干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騎士가 떠오른다. 金氏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서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고고학자들이 과감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崔秉鉉 교수 -「東아시아 기마민족의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崔秉鉉 교수는 「新羅古墳硏究」(一志社)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3~4세기 중국 북부 유목민족
大南進 때(5胡16國시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金氏 왕족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흉노계라는 신라 지배층이
성씨를 金이라고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과 칼, 馬具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한국인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異國的이다.
적석목곽분이란 墓制, 북방系 출토 유물들, 풍부한 馬具와 금제품, 金씨, 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인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著書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積石木槨墳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繩蓆文(승석문)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고조선-신라의 연결고리
경기도 박물관 李鍾宣
관장(56)은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계이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를 만났다.
그는 「古新羅王陵硏究」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내물왕과 왕비라고 추정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박물관장 출신인
李관장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先史原史學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했었다.
李관장은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부여계통은 퉁구스族이고 신라 金氏 왕족은 좀더 유목적이고 서방적인 흉노-알타이계통이라고 했다. 물론 金氏族이 경주에 들어왔을 때는 유목민의
성격은 버린 상태였지만(유목은 넓은 草原이 있어야 한다) 騎馬전법은 갖고 왔을 것이다.
李관장은 고조선의 지배층도
흉노계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기 전 2세기 漢武帝한테 망한 고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흉노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漢武帝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漢族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였을 것이라고
했다.
李관장은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을,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고구려-백제의 남북형과 알타이-몽골초원을 고향으로 하는
고조선-신라-가야의 서북-동남방형으로 가른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로 집결했던 유목기마민족 출신들이 우수한 馬具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대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때와 비슷한 전개였을
것이다. 영국계, 프랑스계, 스페인계가 아메리카로 들어갔던 것처럼, 고구려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일본열도라는 신천지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정복왕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天皇家도 가야 출신, 백제 출신 등으로 명멸하다가 어느 단계 이후에는 백제 출신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李관장은 신라 김씨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 부근에 뿌리를 둔 유목민이 東進하는 과정에서, 북방 초원 지대를
통일하여 거대 제국을 만든 흉노계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지만 알타이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신라지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알타이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가깝고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로마문화권과 끊임 없이 교류해 왔기 때문에 알타이계 신라 金氏 왕족 무덤에서 로마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金氏 왕족이 바로 북방草原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麻立干, 삼국사기에서는 尼斯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金氏王族의 실질적인 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를 거부했나
李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평양도
넓은 들이란 뜻이고 경주의 옛 이름도 서라벌인데 넓은 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라벌이 나중에는 서울로 바뀌지요. 이는 흉노족이 평양에서 경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李鍾宣 관장은 신라는 馬具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族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李鍾宣 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銅(동복: 유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무기로 보면 신라는 보병 의존, 가야는
기병 의존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기마전투는 거의 활로 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칼 싸움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李鍾宣 관장은 『신라가 중국문화와 차별되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金氏 왕족들의 자존심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흉노계의 金氏 왕족들은 신라의 지배층이
되자 백제, 고구려의 親중국 정책과는 반대로 갔다. 그들은 4~6세기 중국과는 교류를 하지 않는 대신에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로마지역과 교류했다. 그 증거물들이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로만 글라스와 寶劍 등이다.
『아마도 몽골고원의 서쪽인 알타이
출신들인 金氏 왕족들은 중국과는 문화와 습속이 맞지 않아 불편했을 것입니다. 중국인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신라 김씨의 이런 주체성과 오기는 흉노-알타이계라는 종족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기사의 주요
話頭이다.
동서양의 대격변을 일으킨 흉노-훈족
崔秉鉉·李鍾宣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 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崔교수는 흉노 기마군단의 급작스러운 경주 진출을, 李원장은 흉노계 민족의 단계적인 이동을 想定하고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중국의 晉이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하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 등 다섯 유목민들은 南侵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胡16國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유목민족 대이동의 흐름을 타고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장악한다.
이 흉노계 신라 지배층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오늘날 한민족으로 불리는 정치·문화·역사 공동체를
건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라가 唐과 결전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할 수 있었던 정신적 힘-정체성, 자존심 같은 것도 출신성분이
漢族과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정직하며 당당하다. 개인적이고 오기가 세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은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 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훈·흉노·신라는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주는 기마민족의 띠이자 말의 길이다.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같은
시기(4~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같은 흉노(훈)족에 의한 일대 격변으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는가를
알기 힘들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민족사를 세계사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재정립이기도 할 것이다.
유목민족의 종착지 辰韓
중국의 晉나라 사람 陳壽가
3세기에 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馬韓·辰韓·弁韓의 三韓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여 남긴 기록으로서 한국인의
조상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史實이다. 이 기록과 삼국사기,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종합하면 신라의 지배세력은 동북아시아를 서북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즉 대각선으로 이동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東夷傳에 따르면 辰韓의 왕이 항상 馬韓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양대 인류학과 金秉模 교수는 『이는 신라의 前身인 辰韓 사람들이 토착민인 지석묘人들과는 경제방식이 다른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 辰韓의 외래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東夷傳의 기록을 본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에 따르면 옛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勞役을 피해 韓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떼어 이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성책)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고 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그 秦이다. 秦은 중국의 서부 감숙·섬서성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다수 주민들은 유목민들이었다. 戰國시대 7雄 중에서 秦만이
유목국이었고 나머지는 농경국이었다. 서기 전 221년에 秦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秦의
시황제는 蒙恬(몽염)의 지휘하에 만리장성을 쌓고, 함양에 궁궐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했다. 이때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秦人들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방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辰韓은 秦韓이라 쓰이기도 했다.
東夷傳은 이어서 이렇게 썼다.
<동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阿라고 부르는데 樂浪郡의 사람을 阿殘이라 부른다. 낙랑군 사람들은 자신들의 殘余이므로
「阿殘」이라 부른다>
문맥상 東夷傳의 著者인 陳壽는 「辰韓사람들이 도망쳐 온 중국의 秦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낙랑군
주민 출신이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 李鍾宣 관장이 단정했듯이 고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흉노족 流入
삼국사기에는
또 서라벌의 산과 계곡 속에는 기원 전 2세기 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條에는 또 辰韓 토착민들과 섞여 살던 秦人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서기 1세기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해 와서 6部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낙랑사람들도
漢族이 아니라 낙랑의 귀족인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의 「魏志」 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遺民들.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 온 5000명. 이들도 고조선이 망한 뒤 낙랑에 남아 漢族지배下에서 살던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東夷傳의 기사를 분석하면 중국 서북쪽(秦)에 살던 흉노족이 여러 차례의 흐름을 타고 고조선·낙랑지역인 평양 부근을 징검다리로 삼아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만 文武王이 스스로 자신의 碑文에서 『나는 金日(김일제)의 후손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金日가 바로 秦나라 땅에 살던 흉노왕의 아들이었다. 文武王의 발언과 東夷傳의 기록, 그리고 고분 발굴 결과는 같은 맥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120년간의 흉노계 麻立干 시대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6세기 신라왕이 麻立干으로 불리던 시절의 金氏 왕족들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북방 초원문화, 즉
로마-스키타이-알타이로 연결되는 서방문화를 溫存해가면서 독특한 묘제(積石목곽분)와 금관·금팔찌·금귀고리·금허리띠들을 남겨 고고학자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3세기에 쓰인 陳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침입·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띈다.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金閼智는 알타이 사람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金氏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金氏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金氏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系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金은 여진족의 完顔部(완안부) 부족이 세웠다.
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金函普(金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金函普는
경순왕이 고려 王建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金渭顯·「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金의 皇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淸제국의 皇族들은 性을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다.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金」이다. 이들은 淸이 망한 뒤 金으로 性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東아시아에서 金氏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출처: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2686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