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는 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19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의 '
연역한 자'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19의 '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7, 9, 10;9:22의 '아스데네스' 고전 8:11, 12의 '아스데네오'를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 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받되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 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롬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여수데네오'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함' '경멸함', '얕봄'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하는 표현보다 '판단'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
.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