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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god
에고의 해체
우아일체
신인합일
신에 내맡김
현대인의 의식지도 12. 가설로서의 신
들어가며
역사적으로
신성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사색은
신학과 종교의 영역이었다.
그 분야 저작이 심오한 박식함을 보여주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들은 궁극적 실재의 참다운 본질을 어리둥절하게 생각한다.
또한
오늘날 그 주제를 깊이있게 연구하거나
명상할 만한 개인적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일반적으로 신은 "저위에" 계신 존재로 묘사된다. 신은, 기도를 통해 접할 순 있겠지만, 세상의 현상을 지각하는 의식수준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실재를 인식하는 주된 토대는 감각적으로 확인하는 과정과 개념적/정서적으로 자세하고 정교하게 인지하는 과정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은 주로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일평생 개인이 정신적으로 여러 부침을 겪을때마다
영향을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런 탓에 그 주제는
수십년간 모른 척 지나가거나
주일 아침에만 한정되어 다루어질 수도 있다.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인생을 반추할 시기가 되면
진지하게 그 주제에 관심을 가져보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묘사
앞서 언급했듯이
신은 이곳에 아닌 다른 곳,
이를테면 지상이 아닌 천국에 계신 존재이므로
물리적으로 확실히 거리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묘사한다.
그림에서도 신은 규모가 크기면에서 확실히 차이가 나며 구름과 별을 배경을 앉아 있거나 서있고, 천사와 케루빔들이 주변에 떠 있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고전적으로 볼때, 그런 묘사는 시스타인 성당 천정벽화에 묘사된 형상과 비슷하다. 신은 긴 머리에 풍채도 있고, 나이도 조금 들어보이고, 공간에 떠 있으면서, 태초의 인간을 내려다보고 손을 뻗으려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신
신을
무시간적 현존이자
편재하며 영구한 근원으로 보지 않고,
창조주로 보기로 한다.
이러한 정의는
신을 시간과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규정한다는
개념적 한계가 있다.
이렇게 되면
신은 개념적으로는 선형적이고
관찰가능한 일상세계와 연결될 뿐이다.
시간자체는
인지와 지각의 환상이며,
앞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의식의 투사에 불과하다.
이런 깨달음은 양자물리학 이론이 확산되면서 확인되었다.
양자물리학 이론에 다르면,
의식없이는
그 어떤 독립적인 우주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주로 의인화된 인격적 특성을 덧입으면서
사물처럼 무엇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사람처럼 누구로 간주되기도 하며,
하물며 시간처럼 언제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점은 특히 구약성경에서 신을 묘사할때 두드러진다. 그래서 신은 분노, 복수, 원시적 태도, 보복, 시기, 판단같은 인간적 자아의 온갖 결함을 다 갖고 있으며, 혹시 여지가 있으면 더불어 자애심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인간은 애초에 신에 비해 표면적으로 상당히 불평등하게 부족(무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에도 신과 달리 자신들의 결점을 책임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인격화된 신은 다소 변덕스러운 존재로 보인다. 그렇기에 인류는 신의 자비와 구원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런 신인동형론적 투사에서
인간이 이해하는
양가적인 신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자유롭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하느님이다.
그 결과
신은
애정 어리지만
동시에 한계가 있는 존재로 지각되고,
인간 세상의 부모에 비유된다.
이 점을 연구조사한 사람은 당연히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신이 유아의 무의식에서 의인화된 투사로 나왔다고 여기는 관점을 버렸다. 신에 대한 잘못된 묘사로 폐기된 것은 프로이트의 공로였지만, 결국 그는 가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무리함으로써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결론은 오류다.
즉,
신을 신인동형론적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성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상 불공평해 보이는 인간의 운명은
카르마 법칙을 가르치는 불교와 힌두교 등
보다 정교한 종교가 잘 설명해준다.
신에 대한 두려움
신인동형론적으로 묘사된 신은
심판자로서 그의 분노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낳는다.
하지만
두려움을 야기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세상과 인간의 모든 재앙을 관장하는
근원이자 원인으로
신을 개념화하면서 발생한다.
그 결과,
신은 폭풍, 가뭄, 홍수, 지진,
화산폭발 등을 만들어 낸 존재로 간주된다.
원시사회에서는 이런 믿음때문에 인간이나 동물희생으로써 신을 달래보려고 했다. 잉카, 마야 그 외 대부분의 고대 종교의식에서 희생제물을 바쳤으며, 그 희생제의가 잔인함의 극치를 보이기도 했다. 동물희생 제의는 고대 히브리 사회와 다른 문화권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각 문화권마다 토착적인 면을 보였다.
오늘날 똑같은 원시주의는 신을 기쁘게 하여 신의 호의와 천상의 선물과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 자살테러를 하거나 무고한 사람들, 혹은 신앙심이 없는 이단자를 살해하는 이슬람 문화에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을 기쁘게 하려고 자선구호품이나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은 결
국 이슬람 원시주의와 똑같은 유형의 사고방식이다.
이 숭배를 통해
신이 기쁨을 느끼고 분노를 일으키다가
달램을 받고, 매수되고, 혹은 아첨을 받을 수있다는 개념은
신인동형론을 정교화한 것이다.
여타 종교 관습에도 나오듯이
특정한 신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질은
여기에 따라가는 인간의 의도와 믿음의 산물이다.
창조주로서의 신
고전적으로
신은
전지, 전능하고
편재해 있는 존재라고 규정되어 있다.
신은
가장 으뜸가는 기원이자
근원이며, 창조주다.
인간의 정신은
시간이라는 측면과
인과론적 순서에 따라 사고한다.
즉
시간, 순서, 인과관계가 인지된
선형론적 세상,
"저 어딘가에" 있으며,
시간과 인과관계가 실재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 내부사유 실체(생각)와 외부연장 실체(사물)의 혼동).
정신-이미지 처리과정의
순서를 따지는 본질이
이런 개념화를
더욱 확증한다.
그 결과
정신은
시작과 끝이 있는
타임라인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시작/기원과
기획자/저자/창조자라는
주된 원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은
"가장 으뜸의 원인"으로
간주된다.
창조는
창세기에 묘사된 대로
시간의 순서에 따른
선형적 과정으로 묘사된다.
이로써 우주는
인과관계의 산물이 되고
시간이 정해진다.
1781년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 논리적 진행과정 속에 내재된 개념적 한계를 지적했으며, 훗날 스티븐 호킹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좀더 자세한 설명이 이루어졌다. 호킹은 1993년 양자 중력이론 안에 "허시간"이 지닌 실용적 가치와 효용성을 포함시켰다.
구약성경은 주어, 목적어, 타동사의 이중적 언어 작용을 통해 창조와 창조주를 인지적으로 분리시킨다. 이에 따라 그 흔한 결과를 알수 없으니 일단 운에 맡기고 한번 해본다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 개념은 에고/정신의 처리작용과 일치한다.
개념화라는 한계를 넘어서면
창조는
사실상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때와 지금은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계속되는 영원을 인식함으로써
건너뛰게 된다.
시간의 진행이란 없다.
실제로 진행되는 시간은
그저 인간의 목격뿐이기 때문이다.
그 목격은 순차적이며,
시간의 전개와 잠재성안에
위치한 것으로 경험된다.
존재 자체는 선별된 해석이다.
실제로 우주와 신성은 통합된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은
우주의 원인이 아니라
근원이자 영원히 존재하는 기층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는
전능함이라는
무한한 잠재성이
존재의 현실성으로 전개되는 결과다.
신에게
감싸는 우주는
존재함으로 나타나고
생명과 존재는
목격이라는 확인이 필요하지 않다.
우주는 내용이다.
그것의 맥락과 근원은
바로 신성이다.
따라서
본질은 원인이 아니라
불멸의 지속되는, 영원히 존재하는,
본원적 참나가 실존하는 실재라고 볼 수 있다.
높은 추상적 수준에 이르면
신의 법령으로 만물이 존재하며
만물이 존재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 비추어진 양상이다.
그 은총으로 감싸여 있던 잠재성이
관찰가능한 선형적 우주로
펼쳐진 것이다.
그 결과
무한한 잠재성의 신격이
존재로써 현실화되며,
이리하여 비선형적 요소로부터
선형적 요소가 표출되는 것이다.
고전적으로 볼때, 이러한 내용은 인식론의 주제다. 성경의 해석은 요한 복음 1장에 표현되어 있다.
1절부터 4절까지 인용하면
"하느님은 처음에 말씀하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고 나온다.
이렇듯
생명의 빛과
인간의 의식(1000)을 비롯한 존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등장했다.
따라서
신은 근원이자
창조주다.
현대과학에서 본 신과 창조
양자역학에서
물리적 세상은
"파동함수붕괴"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잠재성(파동)이
하이젠베르크 불확실성의 원리를 통해
입자들로 물리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과 의도'는
촉매재가 된다.
인간의 의도가 들어간
의식수준의 무한하고
시간이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창조와 창조의 진화적 외관(출현)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 결과
"신의 의지(전능)"에 의해
무한한 가능성의 신격으로부터
무한한 의식의 현현(편재)과 전지함이 발생한다.
이로써 만물은 영원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경험적 실재로서의 신
신성에 대한 지적 묘사는
선형적 논리와 이미지를
심상과 생각의 구성물로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신에 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는
의식수준 400대 범위인 지적처리 과정에서 나온다.
그와같은 지적처리 과정과 전혀 무관하게
시간에 따른 인간의 경험에는
신의 존재를 맥락의 힘으로서 인식하는 것도 포함된다.
맥락의 힘이란
정신자체를 넘어서 압도적으로 드러나고,
정신의 심대한 영향속에서 탈바꿈하는 신성의 본질이다.
영적 진화가
개인 안에서 진행될때
영적으로 탈바꿈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의식수준 540에서 570이 되면
그런 사건들이 빈번해지고,
삶의 실재에 대한 경험적 감각과 이해가
새로운 맥락으로 진입한다.
의식수준 540에서 570이 되면
영적 개념은 더 이상 형태없음에 머물지 않고
삶 자체의 경험적 구조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비슷한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들과
그런 경험을 공유하면서
확증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이 경험적으로 입증된다는
공통된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영적 공동체안에서
신의 의지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현존하며,
내재적이고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편재하는 것(예,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신의 의지는
주관적 현상세계의 일부분이자 입자다.
신성의 현존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되며,
믿음에 기반한 집단에서는 "더 높은 힘"이라고 부른다.
믿음에 기반한 집단은
기도, 명상, 이타적 봉사를 통해
신과의 접촉을 늘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타고난 한계 때문에
인간이 겸손함에서 출발하여
그 노력에 책임을 다하는 것일뿐
사실 결과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이는 더욱 확실해졌다.
결과는
바로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점차
에고에 대한 보상은
거부되고
항복수순을 밟으면서
에고가 정신에 가하는 압력은 줄어든다.
에고가
의심의 잔류물을 점차 내버리면서
영적 경험은 착착 진행된다.
그 결과
믿음이
경험적 지식을 대체한다.
헌신의 깊이와 심도는 증가하고
결국 믿음이
다른 모든 세속적 활동과 관심을 차단하고
대체할 것이다.
가장 으뜸의 실재로서 신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기
영적 진화는
그 자체가 주된 초점이 되면서
점차 가속화된다.
그 진보적 무대는 "나의 눈", "호모스피리투스", "의식수준을 넘어서"를 비롯해 본 저자가 앞서 출간한 일련의 책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신의 현존을 깨달은 사람들이 묘사하고 증언한 주관적 상태는 인간의 역사에 줄곧 기록되었고,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와 '진실대 거짓"의 17장에도 기술해 두었다. 앞서 인용된 모든 책에서 신성한 실재의 증거와 경험은 의식측정으로 확증되었으며, "의식혁명"이 이 수치를 최초로 기술하였다.
이렇게 확인된 증거들이
차곡차곡 쌓였으며,
최근 수십년간 전세계 수행자들과 연구단체들이
더 많은 증거를 추가했다.
또한
그 증거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집단과 높아진 의식을 반영한
개인의 경험을 기록하고 알렸다.
그 모든 자발적 기록과
알림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개인적 에고를 쏟아 붓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많은 보고서들이 보통 '뉴질랜드에서 조지 P" 또는 "독일에서 마리 S"등 사실상 익명의 형태로 들어왔다. 어느 시대나 인류는 보편적으로 영적 실재의 주관적 경험을 보고했고, 문서로 기록했으며, 이제 의식측정으로 확증했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의식측정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걸림돌
신성의 실재는
개인, 집단, 또는 전체문화가
어떤 의식수준에 있건 거부될 수 있다.
바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때문이다.
그 기저에 깔린 동기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심리학적인 것으로
사실상 (개인과 집단) 의식의 진화적 본질을 나타낸다.
반대로
개인과 집단의 카르마적 성향은
이러한 저변의 동기에 영향을 끼친다.
개인의 영적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전통, 지성, 교육 그리고 정서와 가족을 포함한 개인적 경험이다.
또
진실한 영적 저작과
합당한 스승을 접할 수 있었는지도 한몫한다.
개인적 동기가 달라지는 데에는
나이, 인성, 심리학적 유형, 태도, 재능
카를 융의 내향성대 외향성 등
기타 요인들도 영향을 미친다.
나르시시즘, 회의론, 의심, 불신, 부정주의, 반대, 저항
그리고 13장에 논의될 편집증적 성향을 비롯해 특정한 태도들은
영적 인식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적 발달처럼
영적 진화도 미성숙하거나 지연될 수도 있다.
종교적 인물로 인한 불행한 경험이나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추문 등은 종교적 통합성이 공공연하게 실패한 사례다. 당연히 이런 모습에서 인간은 혼란을 느끼거나 영적/종교적으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영적 진화의 속도와 깊이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개인적 요인 외에
미디어가 끼치는 문화적 영향도 있다.
미디어는
신이라는 단어의 언급조차 금지하려고 무진 애쓸 정도로
돈과 조직을 내세워 종교와 영성을 공격한다.
이러한
반종교 혹은 반영성 운동의 토대는
유행하고 있는 정치적 세속주의라는 입장에
나르시시즘적으로 호소하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정치적 세속주의는 새로이 강압적으로 나타난 종교적 열정이 된다. 세속주의자들은 공히 200이하로 측정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상대주의라는 철학체계로부터 그 지지와 동력을 얻는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삶의 여러 단계를 만날때마다
인간은 종교와 독실함에 매우 끌리거나
아주 혐오하는 시기를 교대로 맞이한다.
아동기에는 반발하고,
청소년기에는 반항하고
어른이 되면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책임에 몰두하게 된다.
즉
생애 주기별 주된 활동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문제와 관심사,
그리고 인간 삶의 한계와 유한성과 마주치는 순간 등의
영적사안은 그 다음 자리에 놓인다.
영적인 사안은 인생의 후반기에 가서야 우선순위가 된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상황,
다시말해 죽음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면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를 순수히 받아들이면서
다시 어떤 믿음과 희망이 등장한다.
그때 인간은
신의 실재를 기다리게 되며,
그 동안의 두려움과 의심 대신에
신의 의지와 인간의 운명에 항복하는 평화가 찾아온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또 다른 묘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표방하는 일신론은
궁극적 실재를
하나의 규정할 수 있는
독립 실체로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그 실체는
마치 초인간이라 부를만한
구체적 특성을 겸비한
단일 초인격체로 기술된다.
구체적인 독립실체로서
신은
공간, 시간 심지어 위치 안에
존재한다고 묘사된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했듯이
동기, 의지, 의도, 취향,
편애같은 의인화된 속성을 가진
존재로까지 규정된다.
그 결과
이런 속성들 중에
무엇이라도 언제든 반박될 수 있는 소지가 생겼고,
신의 본질은
신학적 논쟁과
지적 담보계약에 종속되고 말았다.
고대 인도나
극동문화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를
고색창연하게 묘사한 내용은
일신론적 문화와 종교에서는 낯선 일이다.
이런 동양적 묘사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유한한 인간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라, 바로 의식의 본질이 지닌 계시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크리슈나와 붓다의 계시, 고대 베다의 계시를 받은 현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깨달음으로 발생하는 궁극적 계시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다.
이렇듯
내면에서 발생하는 앎은
선천적이며 접근가능하고,
경험적이며 확증가능하고
가장 으뜸인 보편적 기층이자 에너지로서
언어적 정의나 묘사를 넘어선다.
그런 힘과 에너지로부터
존재의 잠재성과 현실화가 발생한다.
궁극의 실재는
의식의 기층과 근원을 탐색하면서 드러난다.
그것은
모든 정의를 넘어선
궁극의 비선형적 맥락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경로를 통하면
인간-나에 비교하여
당신-신이라는 분리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아에 비교하여
참나를 정의하는
힌두교 아드바이타(비이원성)의 뜻과 같다.
이것은 신비주의자들이 터득하는 핵심이다.
이렇게
선형적 에고의 걸림돌이
다 없어졌을때,
궁극적 비선형적 실재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신비주의적 계시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은 물론,
이슬람 수피들이 명상과 함께하는
내면의 여정에도 속한다.
기독교에서는 '신비적 합일'이라 불렀다. 또한 선 불교의 "길없는 길"이자 불교의 핵심이며, 고전 요가를 겸비한 힌두교 전통의 핵심이기도 하다.
계시되어 깨닫게 되는 현존은
묘사, 기술 혹은
명사화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논쟁, 합의 또는
신학적 담론도 넘어선다.
규정할 수 없는
자질이 전혀 없는
궁극적 실재는
명사화나 성격묘사 너머에 있으며,
인과관계, 공간, 시간 또는
위치같은 선형적 개념 너머에 존재한다.
근본적인 주관성의 경로는
의식자체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낸다.
의식은 경험적 인식에 필요한 주된 기층이자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에 가설 너머에 있다.
그 결과 가설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응답받는다.
긍극적 실재의 핵심이 갖고 있는
규정할 수 없는 본질은
앞서 언급한대로 언어적 규정이나 명사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성같은 참고기준이 등장한다.
불성은 개인과 무관할 것같지만,
실은 역설적으로 경험론적 인식의 기층이다.
이런 규정할수 없는 자질은
항상 존재하며,
꼭 필요하고 매우 지배적이면서 선험적인 조건이다.
기독교에서 이것과 가장 가까운 필연적 결과를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우주의 존재에 적용할 때 '창조주"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묘사할 수 있는
선형적 영역은
전혀 묘사할 수 없는 비선형적 근원에서 나온다.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조건이 되었을때
비로서
만물의 실재가 아닌
궁극적 기층의 핵심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내면의 상태를
형언할 수 없는 신비주의의 영역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확인될 수 있으며 의식측정 연구로 입증될 수 있다(최고치는 1000으로 측정된다). 어떠한 지적 이해나 규정도 넘어선다. 따라서 가설적 명제나 논쟁이라는 지적 작용너머에 있다.
모든 지적 의심은
결국 경험을 통해서 해결가능하며,
그 수단은 "내안에 참나를 만나다"에서 이미 기술하였다.
해결
존재와 신의 본질에 대한 가설은
수세기 동안 서구의
가장 위대한 지성인들이 벌인
담론과 논쟁의 주제였다.
그 담론은 철저한 노력과 헌신으로 얻은 포괄적 지혜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엄청난 박식함과 눈부신 지적 판단력을 선보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통합성은 선명하며 영감을 준다.
서구문명에서 보여준
이렇게 대단한 노력외에도,
현대인은
중동과 극동의 축적된 지혜에도
접근할 수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지금도 유교사상이
급변하는 거대한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을 형성한다.
중국 다음으로 떠오르고 있는 거대 문화인
인도에는 수세기 동안 쌓인 포괄적 지혜를 증류시킨,
뿌리깊은 힌두의 문화적/종교적 조직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 땅에 가장 먼저 살았던
토착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주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미의
개별 원주민 문화에서도
신을 숭배했다.
고대 게르만족과
기원전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여러 신을 모셨다.
그러므로
묘사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인류는 보편적으로
신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라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결과
무신론자들은
인류 역사상의 전 인류를 반박하고 있다는
의심스러운 지적과업에 직면한 셈이다.
그들은 그 과업에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지적인 겉치레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정작 아무도 그 과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실패는 입증할 수없고 원래 반박될 수도 없다는 필연적인 사실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신중한 사상가라면
신성의 실재가
잠정적인 가능태이며,
따라서
그 해법은
의식자체가 진화함으로써
좀더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궁극적 해결은
지성인의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와 더 큰 차원에서 나타난다.
지성집단은
대개 의식수준 400대에 갇혀 있다.
400대 정신작욕의 본질이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교만이라는 사실은 이미 자명하게 밝혀졌다.
모든 사상가는 내심 그들의 정신이 다른 모든 이들의 정신보다 실제로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는 "스스로를 인정하라"는 심리학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2006년 12월 타임은 커버에서 이를 멋진 "당신" 세대라고 칭한 바 있다.
실재를 알 수 있다는
사상가의 착각 또는 환상은
그저 평범한 교만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함은 바로 인간정신의 진화적 발달상 생겨난 것이다.
유기체가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려면
확실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기체는
(에고의 여러기능 중에 경험자 측면을 발휘하여)
주변 환경에 접근하여
생존에 필요한 표본조사를 해야했다.
그 결과
생존하기 위해
선형적 영역(주변환경)을 조사하고
그 일의 정확도에 기대는 믿음(비선형적 영역)이 진화했다.
하지만
에고의 선형적 처리기능은
비선형적 차원의 실상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습득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아주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식의 맥락과 내용을 분별할 수 있게 진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전세계 인구의 85%에게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 한계는
인류의 대다수가
비선형적 실재,
즉 존재의 맥락이자 근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장 진화된 구성원들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식측정의 가치는
이것이 아니었다면 접근하지 못했을
더 높은 차원의 지식(본질을 분별할 수 있음)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다.
망원경이
눈에 보이지 않고 탐지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을
인간의 가시영역을 확장했듯이
의식연구는
평범한 지각너머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며,
아직 발견되지 못한
실로 엄청난 혜택까지 잔뜩 품고 있다.
타고난 한계 극복
영적 수행과
헌신의 기본적인 목적은
에고의 진화적 한계를 초월하여
의식자체의 근원에 접근하여
의식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의식자체는
에고/자아의 모든 한계를 건너뛴다.
그런 다음 진실은
신의 은총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
신성은
신의 시간속에서
신성을 청하는 사람들(진실로 측정된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영적 진화는
겉보기에 느리게 진행되지만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
영적 진화는
차원과 영향(충격)면에서
매우 갑작스럽고 극히 중대한 것이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종교적 교리
인간정신이
오류를 범하고
타자의 영향을 받는 성질(암시 감응성)때문에,
주요 종교들은
진실한 종교의 이름을 이용해 신뢰를 얻어보려는
분리주의 종파들에게
지속적인 침해를 당해왔다.
그런 분리주의 종파들은 그들이 침해한 종교의 극점에 서 있거나 정반대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끊임없는 종교전쟁과 역사상의 종교재판은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교는 비교적 정치적 논란으로 파급되기 쉽다. 그런 탓에 신의 이름으로 온갖 방식의 끔찍한 유린이 벌어지면서 수 세기동안 수백만명이 학살되었다. 이는 수세기 전의 십자군 전쟁이나 오스만 제국부터 오늘날 지하드까지 흔히 성전의 형태로 나타난다. 지하드는 와하비즘(70)에 기초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승리주의(90)종파다. 의미심장하게도 쿠란 등의 이슬람 경전은 종교와 국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종교가 곧 국가(이슬람 성전)다.
흥미롭게도
모든 묵시론적 비전은
의식수준 60에서 70사이로 측정되며,
대개 카를 융이 말한
무의식적 원형인 그림자나 프로이트의 이드에서 발생한다.
때마다 낮은 영적세계의 비전을 개인적으로 보고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이런 비전은 변형된 의식상태(가수상태, 악령에 붙들림, 환각제, 일시적 뇌엽기능장애, 정신병, 경련후, 환각상태 등)에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이런 현상은 수세기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종종 생존주의자 공동체와 구세주를 자처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와 더불어 극단주의적 광신집단을 형성하기도 한다.
종교적 일탈
앞서 '진실대 거짓'에서 언급했듯이
종교 경전에는 오류로 간주되는 부분이 많다.
의식측정이 발견되기 전에는
이런 오류를 진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재적 오류는 제대로 감지되지 않은 상태로
넘어갔다.
신약성경은
의식수준 800대로 측정되지만
계시록은 겨우 70으로 낮게 측정된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의 의식측정 지수도 마찬가지다.
쿠란은
일신론적이고 독실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꽤 높게 측정되지만
그 구절의 30%는 진실수준 200이하,
14%는 100이하로 나온다.
또한 유대교의 구약성경에도 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신성에 대한 묘사는 잉카, 마야, 이스터 섬 등의 원시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위에 언급한 역설은
고전적으로 사악한 에너지/실체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벌이는 행위의 산물로 설명된다.
붓다는
대오각성에 가까워지면서 악마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붓다와 똑같은 압박을 받으며 피를 흘렸다.
또한 초창기에는 높은 의식수준을 보이던 영적스승들이 나중에(위력, 통제, 섹스, 돈, 허영 등으로) 무너지면서 낮은 의식수준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른 교파 성인들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에서도 유혹에 대한 보고가 자주 등장한다.
앞에 언급했듯
영적수행 과정에 놓인
여러가지 함정때문에
고전 경전들 안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심각한 오류가 끼어들 수 있다.
이런 오류를 인용해
파괴적 행동을 정당화하면
순진한 종교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한편
그와같은 오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적어도 의식수준 600이 되어야만
"영적 분별"에 필요한 능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고전적으로
'의식수준 600은
불신의 30가지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부른다.
세계 갈등의 기본으로 작용하는 종교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 성향은
자기 강화와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벌이며
탐욕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그 결과
종교는
수세기 동안
논쟁과 끊임없는 폭력을 야기하는
주된 소재가 되었다.
평화는
주요 종교의 주된 기본원리지만,
고대 유대지방의 광신자부터
이란 시아파의 아사신파,
유럽의 개신교 대 카톨릭의 폭력,
그리고 현재 이슬람의 충돌과 폭력까지 살펴볼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평화의 이름으로 치르는 전쟁이
종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가 되었다.
가장 끔찍한 극단주의의 폭력을 저지르고도 늘 반복해서 부르짖는 변명거리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케케묵은 구호다. 이 구호에 기댄다면 교묘한 수사로 어떠한 행동도 합리화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영웅적인 해방자 역할을 하려고 기를 쓴다. 그 결과 비유하자면 로빈후드 놀이에서 피해자와 압제자의 위치가 뒤바뀐다.
테러리즘은 수세기 동안 개인과 종교집단이 활용한 하나의 전술이다. 유니바머, 웨더 언더그라운드, 검은 9월단, 동물권리와 환경관련 운동가들, 아라파트, 카스트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전세계 무대의 중앙에서는 테러리스트 빈라덴이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선동한다.
역사상 늘 그래왔듯이
여기서 또 다시 에고는
당연한 듯
신의 이름을 빙자하고
신격화를 통하여
증오를 종교적 신성함으로 가장하려고 애쓴다.
2차 대전 말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탄 투하를 요구했던 쪽은
다른 아닌 일본의 열성적인 신도주의였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묵시론적 승리주의의 위험성은 최소한 광신적 분파에만 해당될 수 있다. 하지만 핵무기 시대를 사는 세계 지도자들의 경우, 특히 구세주를 자처하는 자기도취적 과대망상형 지도자가 신의 이름으로 인류의 생명을 대량 학살함으로써 그와 같은 메시아 비전을 구원하려고 시도할 위험은 만연해 있다. 이란 대통령(80)은 "이단자를 모두 처단하고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가 드러내는 이슬람의 부정적 측면이
오늘날 전세계 곳곳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의식수준
190으로 측정되는
'샤리아"가 드러내는
이슬람의 부정적 측면이
오늘날 전세계 곳곳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의식수준 190으로 측정되는 샤리아는 여성을 돌로 쳐서 죽이는 행위, 이단자의 참수, 대량 살상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모든 양상은 그들이 지금까지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선포하면서 묘사해온 것과는 상당히 모순되는 것이다.
샤리아(아랍어: شَرِيعَة)는 이슬람교의 율법이며 규범 체계(規範體系)이다. 샤리아는 꾸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규칙들과 원리들이며 그 후 판례들과 율법으로 편찬되어 샤리아가 되었다.
이슬람 승리주의
기원후 623년 이래,
유라시아 전 대륙을 장악한 오스만 제국부터
수많은 내전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이슬람은 군국주의적 확장과 패권다툼을 통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영토를 침략했다.
그 결과
유럽내에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슬람의 대규모 폭력사태와 시민 불복종이라는 위협에 직면한 상태에서
사실상 이슬람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를
인질로 붙잡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일이 터지면 고질적으로 사과하는 세속주의도
이슬람의 자유로운 침투에 한몫했고,
이렇게 되면서 대다수 유대-그리스도교는
저항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할 지경에 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화의 종교라는 이슬람은
현재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9.11 사태로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때보다
더 많은 민간인 희생을 겪은 후로
미국은 이슬람에 내재한 위협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이 군사적 수단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거실안의 코끼리"가 엄연한 현실임을 점차 인식하게 되는 듯하다. 풀어보면 서구문명에 대한 진짜 위협은 이데올로기적이며, 현재 그것은 문화적 지하드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호전적 이슬람은 히틀러 치하의 제 3제국이 발흥한 시기에 활용했던 것과 똑같은 세부 전략을 채택했다. 프로파간다, 청년세뇌(시온 의정서), 군국주의의 표면적 화려함, 암살, 협박, 핵무기를 포함한 군수산업 확장등이 그 전략이다.
서구의 여러나라처럼
미국에도 양의 탈에만 집중한 나머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적의 편을 들게된다.
이슬람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하면서
서구에서 자신들을 옹호하는 부류가 내세우는 수사를
가증스러운 약점(레닌의 유용한 바보)으로 생각한다.
특히
할리우드 엘리트들은
위대한 사탄이 야비하게 타락한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하마스 TV는 미키마우스가 AK-7소총으로 유대인과 이스라엘과 미국인을 죽이자고 노래하는 아동용 만화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에 아이들은 증오의 슬로건과 괴벨스의 나치 스타일 프로파간다(선전)를 소리치로 노래한다.
무함마드의 생애와 교리 그리고 쿠란에 나온 그의 글이 보여주는 문제적 역설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비평가들의 심화연구와 비평의 주제가 되어왔다.
무함마드의 측두엽 간질, 성적 기회주의,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목적은
쿠란에서 발견되는 여러 모순된 차이를 만들어냈다.
정치적 의도때문에
무함마드와 후대 다른 저자들은
쿠란을 자주 변경하고
여러 번 개정했다.
다시 말하지만
쿠란의 구절 30%는 의식수준 200이하,
25%는 150이하,
14%는 100이하로 측정된다).
이슬람에 대한 주요 비평은 힌두 철학자들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그들의 비평에 따르면 이슬람 극단주의는 이맘들이 무아지경의 최면상태인 와히를 조장하기 위해서 고전적 유도기술을 반복해서 이용한 결과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무함마드가 개인적, 정치적, 군사적 목표와 기회에 부응하기 위해서 쿠란의 구절을 기회주의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쿠란의 많은 구절이 완전히 모순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변경은 폐기라는 금언을 낳았다. 즉 쿠란의 후기 구절을 이전 구절보다 우선한다는 뜻이다. 쿠란이 정치적 개념과 종교적 개념을 차별화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 결과 정치와 세속적 지배는 이슬람 종교의 타고난 본성이다. 쿠란은 세상을 이슬람대 전쟁권(비이슬람)으로 구분한다. 이에 따라 이슬람은 종교적 교리에 의거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또한
쿠란은 합리성을 기피하고,
특히나 이성과 합리성을
믿음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무함마드가 망상적 최면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은 수세기 동안 널리 알려진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내용이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와 여러학자들은 병리학적으로 변형된 의식상태와 종교적 내용을 구별하여 인식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2003년 와라크가 검토한 내용이다.
참다운 영적상태와
정신적 일탈간의 진단상 차이는
"진실대 거짓"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임상치료에서 그런 상태는 보통 과대망상증을 겸한 측두엽 간질로 자주 나타난다. 이때 신이나 천사들의 메시지를 듣는 등 여러 증상이 함께 찾아온다. (본 저자는 50년간 임상치료중에 여러 종교기관과 영적단체에서 정신 병리학 컨설턴트로 일했다).
참다운 영적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정보의 근원으로서 다른 독립실체가 없다.
완전히 스며든 참나가
그 자체의 완전성에 의해
스스로 교사(푸르샤)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 나온 학자들, 영적 스승들, 고등 신비주의자들이 내린 일반적 함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신에 가까운 종교적 극단주의는 의식의 유도된 변형상태(90)와 최면의 자동화 상태로 벌어진 것이다. 이런 자동화 상태는 남녀를 막론하고 이슬람 대변인(100, 세뇌 증후군)들이 보이는 그 병증 특유의 단조로운 목소리와 말하기 패턴으로 잘 드러난다. 그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완곡하게 붙인 여러 이슬람계 미국인 단체의 대변인으로 등장하여, 매일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와 모순되는, 말하자면 순전히 세뇌 당해암기하고 프로그램화된 프로파간다를 읊어 댄다.
이런 임상적 관찰과 결론은
빈번하게 벌어지는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의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행동도 설명해준다.
그들은 나치 수용소와 유대인 학살처럼 수백만명이 지켜본 사건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이성적 판단도 사회적 현실 검증도 없는 행동방식을 보인다. 본래 이런 터무니없는 모순은 주로 정신장애가 있거나 최면 후 암시상태에 든 사람들에게서 보인다.
이슬람 샤리아에 따르면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전부 사형에 처해야 할 이단자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은
쿠란에서 명시한 전쟁권에 속하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비판은 1989년 "악마의 시" 저자 살만 루시디에게 파트와를 선언한 이후에 급증했다. 루시디는 수십년간 은신처에 숨어지냈지만, 그후 역설적이게도 2007년 영국왕실에서 수여하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무슬림들에게 반복해서 비이슬람 신자를 '죽이거나 참수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저 극단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쿠란 자체다. 기본적 진실과 위장된 실재는 입증 가능한 사실로써 드러난다. 그 사실이란, 현재 미국내 이슬람 사회적 영향은 기껏해야 의식수준 190정도로 측정된다는 점이다(공적 기금을받으면서 표면상 단순한 이슬람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세속적인 학교들의 수준도 이와같다). 하지만 그 측정수준은 은밀한 동기를 드러낸다.
서구세계는
연일 폭력, 위협,
그리고 언어적/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도발하려는
일련의 사태에
관용과 용서와 연민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슬람 군중들은 미국을 죽음으로라고 소리치고, 테러리스트들은 비행기를 날려 수천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9/11사태), 그외에도 여러 곳에서 전세계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지적했듯이,
이슬람은 현재 여러 국가에서 전쟁중이고
때로는 (영국내 비행기와 지하철 사건 등에서) 좌절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
샤리아 율법은 (여성, 아동, 심지어 반려견까지) 약자와 무고한 사람들에게 극도로 잔인하다고 해서 악명이 높다. 심지어 가장 비굴하고 자기비하적인 서구의 옹호자들조차 하던대로 가짜 사회학과 심리학적 합리화기제로 아동학대 등의 문제를 허울좋게 계속 변명하기 곤란할 정도다( 한편, 빈라덴은 수백만 달러의 재산가였다).
기사도는
의식수준 465로 측정되지만
이슬람의 명예살인은
잔혹행위와 같은 의식수준 90이다.
옹호자들은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주입식 세뇌가 알라의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광신적 죽음숭배에 미치는 대단히 파괴적인 영향과 결과를 아예 무시하다. 그와같은 주입식 세뇌는 미국내 25%의 이슬람 사원에서 이루어진다. 이슬람 사원은 전체적으로 의식수준 190으로 측정된다.
이슬람이 수세기 동안 노예제도를 실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슬람 노예무역은 카리브해 제도에서 매매되어 미국 남부로 이동했던 아프리카계 흑인의 기원이 되었다. 18세기 말,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이 당시 트리폴리 대사에게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자, 쿠란은 무슬림에게 비이슬람 신자를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심지어 그것을 의무로 삼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날 이슬람의 저자이자 PBS다큐멘터리 '두려움없는 신앙'의 작가 이르샤드 만지 등은 이슬람 폭력에 대항하는 이슬람 반체제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평화를 부르짖는 그녀조차 이단으로 간주되어 방탄 유리뒤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슬람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한다는 풍자가 나올 지경이다.
서구 사회의 상징인 미국과 더불어
전체 서구는 이슬람의 편집증적 투사에 의해
위대한 사탄이 되어버린다.
무슬림 아이들은
쿠란을 암송하고 시온의정서를 읽는 것 외에
다른 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시온 의정서는
허위의 증오 매뉴얼에 불과하다.
서구의 기준으로 볼때
전반적으로 아랍 자체는
여전히 원시적이고 산업화되지 않았으며
본질상 종족중심적 사회다.
물론 호전적 투쟁을 내세워 종교를 참칭하는 일은 중세 개신교와 카톨릭 체제간의 유럽전쟁과 최근 북아일랜드 IRA 무장충돌과 테러, 중도의 수니파와 시아파 충돌, 팔레스타인 내 PLF 등 기독교 내부에서도 드러난다. 테러리스트 집단과 운영방식은 마이크 저먼의 "테러리스트의 사고"에서 학술적으로 상세하게 검토하였다.
서구 세계가 이슬람 문화를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한 주된 요인은 그들이 내세운 성명과 선언과 진실여부를 유추하는 과정에 큰 문화적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리아 율법에서는
이슬람에 혜택이 되는 경우라면 거짓말도 용인되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다.
그러나
의사전달의 진실성이 증명되지 않은
모든 명제를 추정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서구문화에서는
이슬람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
서구가
이슬람 국가와 협상을 할때에
형편없이 실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구는
정당함과 생명의 보존을 신념으로 내세우는 반면,
이슬람은 쿠란의 경고에 따라
폭력과 죽음에 의존한다
( 성스러운 아랍의 땅이 이단자들에 의해 신성 모독을 받는다. 그들을 발견하면 어디서든 목을 베라). 이 원리는 무함마드가 사망한 623년 이후 무력으로 실행되었으며, 오스만 제국 통치기간중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미국과 미국시민은
특유의 순진함때문에
빈라덴이 2007년 9월, 미국에 보낸
비디오 영상이 담긴 진짜 의미와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 영상에서 빈라덴은
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초대했다고 한다.
사실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개종요구를 받고 따르지 않는 비이슬람 신자들을 살해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에
그 말은 상당히 위험한 신호였다.
그 초대는
미국에 대항해 벌일 중대한 공격에 길을 터주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공식화 단계였다.
비 이슬람 신자가
개종에 동의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지만 헌금을 내야 한다.
위에서 나온 내용을 종합해보면
개념적 실제와 경험적 실재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955)의 도덕성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서구의 정신은 그렇게 큰 차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주의적 수사와 유아적 이상화로 위장하기 때문에 그 위험한 격차는 더욱 더 애매모호해진다.
헌신적 믿음과
주체하기 힘든 광신이 거드는 신념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이 단지 무슬림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명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이슬람 이론에 맞서는 것이다. 사실 무슬림은 숫자상으로 보면 전세계 인구 중에 소수다. 그 결과 이슬람 율법에 따른다면 무슬림 세계는 인류의 대다수를 살상할 의무를 지게 된 셈이다. 이런 세계관은 의식수준 20(모순)으로 측정된다. 경전과 현실의 그와같은 모순은 무함마드의 측두엽 간질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그 질환으로 무함마드의 의식수준은 초창기 700에서 이후 130까지 하락했다.
위에 나온
이슬람과 서구간의 모든 격차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어둠이 빛의 반대가 아니라
빛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처럼
거짓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진실의 부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꽤 도움이될 것이다.
패러다임 격차
실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감각은
지배적인 의식수준에 맞게 정렬된다.
비전의 비유에 의하면
서구세계와 유대-그리스도 문화는
심장 차크라(사랑, 용서, 관용, 친절, 약자보호, 순수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와
일치한다.
이와 반대로 샤리아 율법은 태양신경총 차크라(지배적 공격성), 천골 차크라(폭력, 증오, 살인), 그리고 뿌리 차크라(천국의 성애화)에 중점을 둔다. 이 정도의 차이를 가진 둘은 호환가능한 세계관이 아니다. 이슬람 교리는 산상수훈과 정반대다. 이에 대해서는 T린드버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적 교리"를 참고하라. 신(알라)는 오직 아랍어로 올리는 기도만을 듣는다는 이슬람 교리도 눈에 띈다.
쿠란은
위대한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완전히 무시하고 거부한다.
그대신 노예제의 공정함, 무고한 인명살상, 용서없는 불관용을 가르친다. 따라서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는 실재에 대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이나 공유된 감각이 없다. 이슬람은 유화정책을 비열한 약점으로 간주하며, 무기력함과 경멸이 공공연해져 결국 더 심한 공격성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쿠란에서 선별한 구절은 온갖 형태의 폭력과 극단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서구 사회의 한계로 간주되는 이성
서구사회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논리적, 이성적 동기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 동의나 반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을 내장한
서구사회가
극단주의자의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오히려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몇몇 의도는 그들의 극단적 행동을 설명해주는 담보(목적론적 유추)로 저당잡힌다. 사실 극단주의에는 선한 것도 없고, 의도도 없다. 폭력은 그 자체가 보상일 뿐이다. 다시말해 증오에 찬 태도가 언제든 변명거리만 찾듯이 폭력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살인의 향연은 태생적으로 그 자체에 몰두하면서 만족을 느낀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 본성이 요구하는대로 따를 뿐이다.
살인자의 목적은
그저 살인하는 것이다.
그 어떤 동기나 합리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점은 2001년 이슬람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위대한 바미안 석불을 완전히 파쇠시킨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52.5미터 높이의 바미안 석불은 1만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이었다. 이 사건직후 유엔 사무총장은 그와같은 자기 도취적 파괴에 대해 유감과 반감을 표명하면서 석불의 파괴로 인류가 겪게된 상실을 전했다.
이로써 이슬람은
스스로 불명예의 무덤을
파게 되었다.
이 와중에도
서구의 옹호자들은
그 폭력적 문화속에서
죄악을 만회할만한 여지를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