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신성학교 교사로 3년 재직
장준하 평전/[3장] 가정 어려워 진학 포기하고 교직생활 2008/10/18 08:00 김삼웅'청년' 장준하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신성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도 계속 요시찰 인물로 형사들이
뒤를 따르던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 장준하, 아버지를 회상하여.
장준하는 1938년 3월 25일 신성중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면 숭실전문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바로 그 무렵에 숭실전문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매큔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폐교원을 낸 것이 결국 폐교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과 같이 장준하가 신성을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나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장준하의 생각도 이에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진학할 학교가 폐교가 되어 없어진 것이다. 장준하의 분노와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에 갈 형편도 못되었다. 두 동생 명하(明河)와 익하(益河)의 교육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독학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정주교회 소속인 미션계열의 신안소학교 교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함께 졸업한 친구 김용묵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가 추천하여 그와 같이 교사로 가게 되었다.
장준하가 부임한 신안소학교는 말이 학교이지 교사(校舍)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는 명목상의 학교이었다. 교회당 안에 허물어져 가는 창고와 같은 건물에 교사들도 대부분이 만주로 떠나가고 없는 학교에 부임한 것이다.
덩그런 교회당은 노쇄한 듯하고 그 뜰에 웅크린 신안학교는 마치 창고나 다름 없었다. 변두리에서 모여든 500여 명의 서민 자제들을 가르치기가 힘에 겨워 모두가 만주로 일시에 떠나서 우리 두 소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범교육도 못 받은 우리는 선도자 없는 목장으로, 채찍없는 카우보이인양 현장에 뛰어들고 보았다. 비록 교육지도 경험은 유년주일학교 반사로 활약해 본 것이 고작이었으나 그것이 큰 자본이 되었다. 교사라야 6명, 그중 연장자라고 해서 필자(김용묵 씨- 저자)는 6학년 담임에, 교장 대리까지 맡아 동분서주하는 동안, 어느새 그(장준하-저자)는 장도사(張道師)라는 별명을 얻고 이곳저곳에서 정열을 불태우며 서둘러 단독결행하는 등 파란을 일으켰다.
계속 터지는 사건들로 학부모와 유지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무마책에 나설 수 밖에 없는 필자(김용묵씨-저자)는 고충을 넘어 황당한 나날이 이어졌다. 가위를 들고 여학생들을 쫓아다니며 모조리 댕기꽁지 긴 머리 짜르기, 재단사를 불러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상급반 100여 명에게 재단해주고 공납금 받아서 대납하고 나서 교내외를 막론하고 경탄과 비난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학생들 모습은 새로웠으며 또한 사기가 올랐다. (주석 1)
장준하의 젊은 교사 시절의 기록이 어릴적부터의 친구에 의해 소상하게 전해진 것은 다행이다. 김용묵은 장준하와 함께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에 장준하의 행동이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는 의자가 없는 마루방이라 체육관으로도 대용하는가 하면, 멋진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여 주일예배를 보기도 했고, 교회 재직회에 참석하여서는 노쇠한 당회조직의 고식적 학교운영을 통박하여 장로들로부터 분격을 사는 등 그가 일으킨 파동은 적지 않았었다. 자라는 새싹들을 육영이라는 미명하에 간판만 걸고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우유부단성을 보고 참지 못한 그는 그때부터 혁신의 가치를 높이 들었다. (주석 2)
고루한 인습을 타파하고 낡은 체제를 바꾸려 하는 ‘혁신의 가치’는 청년기부터 장준하의 가슴 속에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준하 교사는 학교 교사의 신축이라는, 교회와 지역주민들도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일을 해냈다. 장준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중학을 마친 나는 곧 정주에 있는 한 교회의 부설학교에 교원으로 갔다. 학생들이 거의 모두 다 빈민 아이들이었고 학교 건물이라는 것도 명색만 유지하고 있는 아주 형편없는 건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부임 벽두에 학교 교사부터 새로 지어 볼 결심을 하고 곧 그에 착수하였다. 마침 그때로는 최고학년인 5학년 학생들을 내가 담임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밤을 이용하여 학교 뒷산을 무너내고 거기에 학교 터 닦기를 시작했다.
마침내는 교회의 청년들까지 함께 합류하여 불과 몇 개월 내에 교사를 지을 만큼 훌륭한 터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그 자리를 학교운동장 삼아 학교 개교 이래 처음인 운동회부터 한번 열었다. 그 운동회를 계기로 학교 신축에 대한 학부형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 그 후 학교 신축은 더욱 급속도로 진전이 되었다. 큰 학생들과 교회 청년들은 뒷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오고 꼬마들은 돌과 모래를 운반해 나르고 하여 결국 터가 되고 자제가 된 다음 학부형들의 후원으로 목수만을 초빙하여 건축을 하였다. (주석 3)
한 소년교사가 교회의 장로들과 학부모들을 움직여 교사를 신축하고 지역사회를 바꾼 것이다. 장준하는 소년시절부터 이렇게 남달랐던 대목이 적지 않았다.
팔짱끼고 관망하던 교회와 학교 이사진의 심경은 착잡하였다. 그는 낙엽송을 벌채하여 학생들과 목도로 함께 날랐다. 이처럼 무모에 가까운 그의 활동은 결국 교장의 심경을 변화시켜서 그 다음해 새 교사가 덩그렇게 정주의 명물로 산등성에 세워졌고, 그해 여름에 멋진 학예회를 열어 주민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이로써 학교 발전의 기초를 본 소년교사 장준하는 안도의 숨을 쉰 뒤, 훌쩍 왜도 동경으로 날아간 것이다. (주석 4)
주석
1) 김용묵, 앞의 글, 138쪽.
2) 앞의 글, 138쪽.
3) 장준하, 앞의 글, 148쪽.
4) 김용묵, 앞의 글, 139~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