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자신을 방어하도록 강요했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악한으로 변모하고 만다. 그는 이 변모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훌륭한 측면을 상실한다. 우리 모두가 깊숙이 자신의 내면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방어는 공격이 있어야 방어일 것이다. 삶이 불안하다면 그 삶을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동물의 왕국'에서나 지배적일 약육강식의 원리가 이미 사람 세상을 점령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힘없는 사람들’의 삶은 늘상 불안과 초조의 연속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래서 배경 없고 가진 것 없고 갖춘 것 없는 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생존에의 불안보다 더 큰 불안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체 삶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죽음조차도 누군가와 함께 하려 했을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방안에서 혹은 차안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동반 자살하는 사건들이 심상치 않게 번지고 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일까.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지긴 했으나 한때는 누구나 귀여운 아기였고 근심 없는 영혼이었으리라. 그러나 말랑말랑한 어린 영혼은 너무나 취약해서 일찌감치 환경이라는 도공에 의해 제멋대로 빚어진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듯 어른들이 제공한 개념과 관념을 받아먹고 자란다. 성공과 실패. 승자와 패자. 세상은 이처럼 에누리 없는 이분법임을 아이들은 커가면서 저절로 체득한다. 강력한 자본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찌감치 수집한 아이들은 경쟁이 왜 패덕(悖德)인지를, 왜 결국 함께 망가지는 길인지를 알지 못한다. 대학은 시장에 내놓을 인간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임을 자처한지 오래고, 규격화된 상품화가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컨베이어 벨트에 오르는 아이들. 다른 길은 없다. 아무도 다른 길이 있다는 것조차 가르쳐주지 않는다. 경쟁 이데올로기에는 두말없이 순응하면서도 삶의 자유와 존재의 의미는 질문할 줄 모른다.
어른이 된 아이들. 그러나 자신의 날개를 달지 못한 가련한 미숙아들. 잠시만 긴장을 늦춰도 낙오자라는 딱지가 주어지는 사회에서 날개를 달 시간도 여력도 없는 가냘픈 영혼들.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천신만고 끝에 직장인이 되어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허공에 발을 디딘 불안한 하루살이들. 어떤 상황에서든 이겨야 하고 싸워야 되는,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강박이 생의 본능처럼 작동하는, 야수가 되어야만 살아남는 가혹한 문명의 불행한 미아들.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만 남아버린 시대의 슬픈 후예들.
사회는 마치 불량품인 양 수많은 젊은이들을 거리로 내팽개치고, 열등감을 밥보다 먼저 삼키고 상처를 외투보다 먼저 걸쳐야 하는 청년들. 자본에 점령당한 온갖 미디어는 밤낮을 쉬지 않고 오염된 '화학물질'을 뿜어대고,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눈을 뜰 수도 숨쉴 수도 없는 독성 물질의 세상. 피할 곳이 없다... 이윽고, 맥없이 고개 숙이는 꽃들. 시들어 가는 영혼들. 누구 없을까, 악몽 같은 이 곳을 함께 빠져나갈 동지는? 그들은 은밀히 서로를 찾는다. 마침내, 검은 연탄구멍 같은 세상 가스처럼 조용히 빠져나가는 사람들. 게임 오버.
어떤 이에게는 리셋 버튼도 없는 악몽 같은 게임인 삶. 하지만 게임은 끝나지 않고 삶은 계속된다. 그러니 물지 않으면 물리게 되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세상에서 누군들 온전할 수 있으랴. 방어하느라 지쳐 점점 생명기운이 시들어 가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런 반작용으로 자신도 모르게 공격성이 강화되어 점점 야수가 되어 가는 중이거나, 아니면 오염된 화학물질에 너무 많이 중독되어 자신이 중독된 줄을 모르거나. 아무튼 이 '집단 중독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공격과 방어로는 결코 해결이 안 된다. 정말이지 강력한 ‘해독제’와 ‘청정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건 간단명료한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회문제 혹은 인간문제가 그러하듯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독은 이미 세상 구석구석까지 퍼져 버렸으니까. 절망과 슬픔은 이미 포화상태니까. 더 이상 고통이 물러서서 울고 있을 자리가 없으니까.
근래 나도 놀라운 일을 겪었다. 난데없는 일에 휘말려들어 고통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거야?"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실체는 이미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어디든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나 개인만의 고통이 아니라 비록 형태는 달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의 성분과 너무나 닮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통. 이 말이 단지 추상명사가 아니라는 것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아무튼 근래 내가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하기 전에, 얼마 전 신문기사를 읽다가 내 조그만 고통이 수십, 수백 배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겠다. 지율스님의 '도롱뇽재판'이 대법원에서 유죄로 확정되었다는 기사였다.
'도롱뇽시위'의 주인공인 지율스님에 대해 대법원이 원심대로 유죄를 확정했다. 24차례에 걸쳐 굴착기 앞을 가로막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방해한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환경보전도 중요하지만 막무가내로 많은 예산을 투자한 국책사업의 발목을 잡는 건 곤란하다...수년간 진위가 분명치 않은 도롱뇽 생존권 위협 공방을 벌이다 발생한 손실이 무려 2조원에 달한다는 추산이다. - 4월 24 일 J일보 사설에서-
...환경문제도 중요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혜택을 보게 될 국책사업 등이 '환경독선주의자'에게 발목이 잡히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잘못된 독선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천성산 터널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 -4월 25일 D일보 '기자의 눈'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구나.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를 끌고 가고 있는 가장 힘센 물결이구나. 이제는 다들 자신이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이 ‘땅’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숨쉬고 있는 것이 ‘공기’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의 몸이 온 우주가 작용하여 만들어낸 ‘음식’을 먹고 지탱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구나. '경제 독선주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이 보면 세상과 생명을 위한 일도 독선으로 보이는구나.
천성산의 뭇 생명들, 아니 이 세상 모든 생명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지율스님은 350여 일이나 곡기를 끊었다. 다른 생명을 구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그토록 간절히 내려놓은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기륭전자가 생각나고 용산참사가 떠올랐다. 나락을 태우던 농민들의 울분이, 거리를 헤매는 젊은 청년들의 한숨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과 아우성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렇구나. 삶의 양태와 삶의 거처는 달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그 성분이 같구나. 나는 이 기막힌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진짜 위기는 바로 우리 인간의 위기임을 다시 한번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이쯤에서 내가 겪은 일을 얘기해야겠다. 지난 4월 6일 정오 무렵. 나는 번화한 시내 중심 가에 위치한 D생명보험사를 찾아갔다. 건물 안팎은 온통 검은 대리석으로 번쩍거렸다.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서던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쩐지 나를 거부하는 듯한, 위화감 비슷한 어떤 느낌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접수창구의 아가씨는 친절했고 나는 서류를 접수하고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집에 와서 문득 생각해 보았다. 왜 거기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걸까? 어쩌면 보험에 대한 내 평소의 부정적인 인식이 그 원인이 아니었을까? 나는 예전부터 보험이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현실에 대한 감각도 무디고 무지한 편인 나는 가족이나 나의 미래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온갖 매체와 미디어를 통해 무차별 쏟아지는 보험광고들을 보면 하나같이 교묘하게 '두려움'을 파는 것 같아서 싫었다. 두려움을 퍼뜨려 이익을 보는 보험사들이 금융재벌로 승승장구하는 것도 마땅찮아 보였다. 하지만 정말 문제인 것은 그런 광고들을 보고 있으면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도, 내가 혹시 암게 걸린다면? 갑자기 사고를 당한다면? 나도 혹시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라는 따위의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일 게다. 근심과 두려움은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비하고 싶어진다. 머뭇거리는 사람들 앞에 광고는 이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어쩌면 그날 보험사 건물 안에서의 그 낯선 느낌은 광고의 그런 천박한 기호가 내 무의식 속에서 잠시 반짝, 하고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한국인의 90%가 각종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니 미래가 불안한 사람들이 많긴 한 모양이다. 하긴 위태하고 불안정한 서민들의 삶에 달리 뾰족한 '안정망'이 없는 것도 그 이유가 될 터이다. 우리나라 보험회사의 '연간 보험료 수입 세계 7위'라는 수치는 인구 대비 보험시장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그래선지 단 하루도 미디어를 통해 보험광고를 접하지 않은 때가 없다. 더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일상에서 TV는 남편에게 친구 아닌 친구가 된지 오래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남편도 보험광고가 드리운 미끼, '두려움'에 걸려들고 말았다. 몇 달 후 내가 그 사실을 알고는 "우리 형편에 웬 보험이냐"고 볼멘 소리를 하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덜컥 큰 병에 걸리면 애들과 당신은 어떡할래?" 두려움을 파는 보험 광고는 남편에게도 어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거대한 자본 시장을 형성한 영리보험이 서민들의 삶을 정말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만약 예기치 못한 큰일이 터졌을 때 보험사가 보장한 보험금이 전부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되는 금융관련 민원 중 1위는 보험 민원이라고 한다. 보험사 측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보험금을 못 주겠다고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얘기다. 우리가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15년 전부터 작은 철물점을 꾸려오던 남편은 작년부터 유례 없는 불황과 경제적인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려왔고, 2월 7일 극심한 두통으로 동네 병원을 찾았다. '긴장성두통'이라고 했다. 약을 먹지 못할 정도로 구토를 하기도 했다. 남편은 가게를 연 이래 처음으로 사흘이나 누워서 지냈다. 그 후 두통은 좀 가셨으나 뒷목이 당기듯 아파서 다시 동네 병원에 다녔다.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며칠에 한번씩 약을 번갈아 처방해 주었고,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급기야 어느 날부터 왼쪽 팔다리에 힘이 없어졌고 균형을 잡지 못했다. K대학병원 신경외과를 찾았다. 뇌출혈이라 했다. 남편은 곧바로 수술을 받았고, 8일 후인 3월 31일 큰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퇴원했다.
며칠 후 보험사에 서류를 제출했고, 사흘 후 보험조사원이 나와서 인감과 위임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흔쾌히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오후부터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진단서가 잘못 되었다. 진료기록부에는 '외상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함께 의사를 만나 진단서를 바꾸자." 너무나 황당하여 남편은 "대학병원의 공인된 의사가 작성한 진단서를 어떻게 당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냐"며 항의했다. 우리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여 병원에 가서 진료기록부를 복사해왔고 그것을 아는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외상성'이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다시 연락을 해온 조사원은 “진단서를 새로 작성해야 한다‘는 말만 또 되풀이했다. 내가 "진료기록부 어디에도 외상성이라는 말은 없더라"고 말하자 그는 금세 말을 바꾸어 "의사가 외상성이라고 한다"고 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진단서를 바꾼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나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조사원은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연락을 하겠다던 그는 9일 만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바뀐 진단서가 들려져 있었다. 새 진단서에는 보험금을 청구할 수 없는 병명과 병명코드가 적혀 있었다. 조사원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할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지말고 이제 병원에 가서 말씀하시라"고 느긋하게 말했다.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에 홀린 것 같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다. 나는 원본 진단서와 바뀐 진단서를 의사 앞에 보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기록부에서 실수한 모양이다. 이번에 심사해서 다시 원래의 병명으로 되돌려놓은 것뿐이다."
"어떻게 환자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럴 수 있느냐?"
"그걸 환자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다."
"당신은 병실에서 분명히 처음의 진단서에 적힌 병명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새 진단서에는 병명이 바뀌었다. 해명해 달라."
"......"
"좋다, 외상성이라면 외상의 흔적이나 증거가 있느냐?"
"경막하출혈은 99.9%가 외상성이다."
"그럼, 0.1%의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당신 보험금 때문에 그러지?"
"그렇다."
"됐으니, 돌아가라!"
의사는 마치 보험금에 눈이 어두워 안달하는 사람을 보듯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밀어냈다. 나는 '99.9% 외상성'이라는 의사가 내민 임상수치에 할 말이 없었다. 전문가의 말이었으므로 의학지식에 무지한 나는 순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남편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외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판사의 판결문과 다름없는 의사의 진단서가 실수로 잘못 작성되었다는 것도 선뜻 이해할 수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해도 병명이 바뀐 사유 정도는 제대로 설명해줘야만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여기엔 불명료하고 불합리한 무언가가 내재해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이 병이 자신도 모르는 '외상'에서 비롯된다 해도 만약 그동안 축적된 '비외상'적 요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면 그걸 어떻게 외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가을날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도 전 우주적 요인이 있다고 한다. 설사 본인도 모르게 외상이라는 '바람'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해도 사람 머릿속 실핏줄 하나가 터지는 데에도 어찌 하나의 요인만 있겠는가. 비록 의학적 용례로 그런 것을 통틀어 '외상성'이라고 표현한다 해도 그 용어의 단순함을 악용하는 보험사의 횡포가 있다면 어찌 그것을 함부로 명명할 수 있을까.
막막하고 허탈했다. 이제 할 말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하라던 보험조사원의 얼굴과 보험금 때문에 그러냐고 경멸하듯 나를 밀쳐내던 의사의 얼굴이 어른거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올렸다. 이 문제는 이제 환자와 병원과의 문제이지 보험사와의 문제는 아니게 되었으므로 그곳도 소용없을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튼 이제 싸워야 할 상대는 의사였고, 의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였다. 나는 전문가가 내민 99.9%라는 알리바이에 슬펐다. 절망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0.1%의 가능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닌가. 수술 전 고혈압, 긴장성두통, 혈전용해제 복용 등을 제시하며 남편에게서 비외상적 요인이 얼마나 많았나를 설명하려 했으나 의사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전문가’ 혹은 '전문가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친절하고 어떻게 권력화 되어 있으며 어떤 식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지 나는 그날 똑똑히 보았다. 마치 천성산 반대운동이 2조원이라는 손실액을 남겼다며 그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제시하던 전문가처럼. 그것을 아무런 검증 없이 사실인 듯 당당하게 복창하던 언론처럼.
3.
...이번에 대한상의가 제시한 손실 추정액은 사실 사업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단순 합산한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천성산 관통구간 공사 지연 비용이 연간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주장은 어떤 검증도 없이 언론에 유포되었음에도 진실인 양 전재했다...'공사 지연으로 연간 2조원의 손실을 본다'는 말이 사실은 '혼잡개선 및 여행시간 단축 기회상실'이라는 가공의 성격인 '비경제적 가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녹색평론> 82호. 김해창. '언론이 바뀌어야 땅이 산다' 중에서-
이처럼 ‘전문가의 말은 때로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엉뚱한 곳으로 여론을 몰아가기도 한다. 천성산 터널문제도 그러했다. 애초에 노선변경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지역의 이해관계 때문이며, 최초 설계노선대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낭비와 공사지연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공동 환경영향조사를 합의하고도 제멋대로 합의를 무시한 당국 때문이 일이 그렇게 커졌다는 것 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익에 눈먼 권력이나 자본은 이처럼 중요한 과정은 무시하거나 숨기고 그들의 의도대로 국민의 동의와 신뢰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문가의 입을 빌린다. 언론은 즉시 그것을 맛깔스럽게 손질하여 대중들 앞에 내놓고,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먹는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것이 세상을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지는 그 누구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지율스님이 거대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것도 그들이 제시한 엉터리 공사손실금액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 이 사회가 가고 있는 이런 '흐름' 때문이라고 했다. 권력과 자본이 유도하고 전문가와 언론 매체가 가리키는 데로 너무나 쉽게 따라가 버리는 대중들의 습관화된 수동성과 ‘생각 없음’에 아마 지율스님도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겪었던 보험사와 병원과의 일은 그 중 아주 작은 부분일 따름이었다. 지율스님이 말한 것처럼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흐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흐름을 바꾸기 위한 기운은 오래 전부터 감지해오고 있다. 특히 <녹색평론>의 많은 글들 속에서 나는 그 흐름을 읽었다. 그 글들은 이 흐름을 바꾸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독단적이고 탐욕적인 자본 이데올로기가 유포한 독성 구름이 세상의 땅과 하늘을 뒤덮고 있다고, 사람들이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중독되어 가고 있다고 그 글들은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경제성장이란 자연 자원의 수탈과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교묘한 착취일 뿐이라고, 개발과 성장으로 빈곤이 해결될 것이라는 허황한 말에 더 이상 속아선 안 된다고도 했다. 또한 붕괴직전에 놓인 농업과 농촌을 시급히 돌보지 않으면 생태적 파국과 인류사회의 공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며 간절히 호소하기도 했다. 그 뿐인가. 악랄한 노름시장이나 다름없는 거대 금융시장이 성실한 사람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돈으로 '괴물'을 키워서 세상을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경고 또한 쉼 없이 들려주었다. 하지만 외치는 이는 적었고 들을 수 있는 귀도 많지 않았던지 세상은 관성에다 속도까지 보태 더욱 무섭게 굴러갔다. 독성 구름의 위력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것은 급기야 쓰나미가 되어 전 세계를 덮쳤다. 대량실업과 유례 없는 불황의 파고가 서민들의 목을 죄어왔다. 정부는 복지예산을 증액하고 생계보조비를 올린다며 '약자 구제 대책'을 요란하게 발표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강을 생명을 키우는 터전이 아니라 배를 띄우는 물류도구쯤으로 생각하던 정부는 이제 '강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로 경제가 살아날까? 그 경제가 어떤 종류의 경제인지, 누구를 위한 경제인지, 성장이 어떤 성장인지, 대기업과 건설사와 금융자본의 성장인지, 생태와 순환에 기반한 자립성장인지 그들은 그야말로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더구나 사회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엘리트들 지식인들 전문가들의 게으른 특권의식과 낡아빠진 성장제일주의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의 제한된 상상력과 기계적인 사고는 약자에 대한 억압과 생명에 대한 수탈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전문적이고 남다른 지식이 자신들의 생계와 이익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과 생명의 가치를 몰각한 지식, 물신주의에 연료를 제공하는 지식은 결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4.
"청정한 산을 함부로 해치는 지금의 일처럼, 지금 이 사회에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도 다 세상과 인간사를 어리석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지혜로 밝아지면, 이런 문제가 안 생기고, 생기더라도 보다 부드럽게 해결되겠죠.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런 지혜가 생기죠? 세상을 밝게 알려면 어째야 하죠?"
<녹색평론> 86호 115쪽. 김곰치의 '높이 나는 새처럼, 빛나는' 에서
지혜란 무엇일까? 자신은 물론 이 세상까지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게 지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거기에 이를 수 있을까? 정말이지 서로 '부드럽게' 어울려 ‘평화롭게’ 공생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빈약한 이분법이 확고한 삶의 원리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어쩌면 이런 말조차 ‘그림의 떡’ 만큼이나 허전하고 허황하게 들리진 않을까?
이미 공동체를 위한 배려는 껍데기만 남아버렸고 고통은 평등한 분담이 아니라 약자의 전담 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땅과 물과 공기는 더럽혀지고 그 터전만큼이나 인간 심성도 오염되고 피폐해졌다. 소와 돼지와 닭도 몹쓸 병에 걸려 쓰러지고 수많은 생물종들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으며 가장 낮은 곳에 사는 미물들마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속세를 떠나 생사해탈을 참구하고 있던 한 수행자가 가녀린 몸으로 기어이 포크레인 앞을 막아선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산이 게으른 수행자였던 저를 불러 세운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바위를 깎는 포크레인 소리에 묻혀 그 소리는 아주 가느다랗게 들렸습니다. '누구 없나요? 살려주세요...'라고 어린 아이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늙은 어머님의 신음 같기도 한 이 소리는 지금 전국의 산하에 울리고 있습니다...왜 나같이 배우지도 못하고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 사람을 천성산은 불렀을까, 저 위에 꽂혀 있는 책이 화엄경인데 저게 발단이에요. 제가 화엄경을 사경한 적이 있어요. 천성산 화엄벌에 올라가면 화엄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원효스님이 천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그때는 그곳이 습지인지도 모르고 지뢰밭이라서 아무도 안 갔는데 제가 붓글씨로 써서 80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가서 읽은 겁니다. 큰 소리로, 거기 새나 나비가 날아다녀요. 꽃밭이니까. 생명이 많이 사는 곳이에요. 저는 그것들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읽었어요..." -2008년 10월 23일 경향신문 김택근 논설위원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천성산 화엄벌에서 천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했다던 원효스님. 화엄바위에서 새와 나비, 풀과 꽃을 대중삼아 화엄경을 봉독하던 지율스님. 상상만으로도 장엄하고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화엄경 법성게 첫구절에 나오는 이 말처럼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인간이나 미물이나 근원은 본래 둘이 아닌 하나라고 한다. 부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참된 지혜의 눈을 뜨기를,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이 시대를 그런 지혜로 살아내기를, 마치 진리의 '달'을 가리키듯 지율스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 달을 보지는 못하고 손가락만 본 사람들은 그 손가락을 그야말로 ‘손가락질’하고 폄훼 하였지만, 그리하여 세속의 법 인간의 법은 그를 유죄로 확정지었지만, 그러나, 자연의 법 우주의 법은 더욱 더 장엄하게 그를 수호하고 있을 것임을 믿는다.
원효대사는 종파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던 당시의 신라인들에게 존재론적 통일사상인 일심의 덕과 화합을 실천하신 분이다. 성속을 넘나들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중생들과 함께 하던 성자였으며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벗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경전을 지은 뛰어난 학승이기도 했다. 만물은 근원인 '하나'에서 비롯되어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는 일심(一心)사상, 진리의 독점을 경계하며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다양성에서 조화와 균형의 보편성을 이끌어낸 화쟁(和諍)사상,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마음을 대자유의 전제로 설한 무애(無碍)사상은 원효대사가 설파하신 주요 사상이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적실한 것이 바로 그러한 말씀들이 아닐까? 우선 우리 모두가 하나(一心)임을 아는 것, 즉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에도 인류 전체의 정보가 내장되어 있다고 하듯, ‘나’라는 존재는 따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라 전우주가 그 안에서 만나는 ‘인연의 총합’이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큰 하나’ 안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지혜'가 아닐까? 그리하여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다름을 이해하며 함께 공존의 평화와 공생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쟁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는 이 시대에 참으로 절실한 '해독제'이며 독성으로 오염된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청정제’가 아닐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 혹은 이익만 쫓아가고 있는 이 거칠고 천편일률적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렇듯 일심(一心)이라는 무한으로 열린 마음의 바탕 위에서 화쟁(和諍)이라는 조화와 균형의 원리, 즉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적 실천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지구 위에는 지금 60억 개가 넘는 사람의 몸뚱이가 생체활동을 하고 있다. 어디 사람뿐이랴. 땅에서 새싹이 나오듯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은 우주가 제공한 음식 기운으로 덩치를 키우고 세상과의 부대낌으로 정신을 키운다. 결국 나는 너가 있어 나이고 너는 나가 있어 너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고 또 필요가 되어주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르게' 살고 있지만 결국 '하나'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의 '다름'만 보고 이 '같음'을 모르는 데서 생겨난 게 아닐까? '하나(一心)' 혹은 ‘같음’이라는 이 유기적이고 근원적인 느낌, 전체성의 자각을 잃어버린 것이 세상 모든 재앙의 원인이 아닐까? 예컨대 이 크나큰 하나(一心)를 알지 못하고 다들 부분적이고 개체적인 작은 '나'에만 심취하여 매달리게 된 것이 모든 불행과 다툼의 시작이 아닐까? 자신을 왜소하게 축소시켜 작은 몸과 마음 안에 구겨 넣으니 그처럼 많은 것이 필요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한정하고 좁은 곳에 가둔 사람은 비록 세상 전부를 차지한다 해도 결코 만족을 모를 테니까. '내 것'을 소유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물질에 대한 이 시대의 맹목적인 욕망도 이렇듯 결핍된, 자폐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저마다의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자기 자신과 이 세계가 별개라는 그 생각이 이기심을 키우고, 그 이기심이 개인과 개인에서 체질화되고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버린 게 아닐까. 결국 그것이 이토록 팍팍하고 불안한 삶의 현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무튼 행복도 불행도 이 작은 '나'에서 비롯된다면 모든 문제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풀어야 하리라. 외부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자신의 내적 공간을 넉넉히 확보하는 것이 먼저이리라. 마음과 생명의 성품을 이해하고 의식을 확장하여 보다 큰 '나'를 만나는 것이 이 물신주의적 아귀다툼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리라. 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를 만날 수 있으며 우리를 만날 수 있을까. 생명 그 자체인 나를 모르면서 어떻게 생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몸만이 몸이 아니고 인간의 삶만이 삶이 아님을,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리는 다함께 이 땅에서 생명의 그물망을 짜는 공동 참여자임을 이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율스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가리키던 '달' 또한 그것이었으며, 원효대사가 이 땅에서 그토록 원력하며 구현하려 했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화엄세상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천성산은 무자비한 시대가 남긴 이 땅의 아픈 상징이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태동하는 아름다운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머잖아 우리는 다시 천성산 화엄벌에서 만나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 글은 <녹색평론> 7-8월 호 (107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처럼, 몇 달 전 제가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함께 걱정해 주시고 또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많은 회원님들께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예상대로 금감원에서 이런 통보가 왔습니다. '보험조사원 혐의 없음, 병원과 해결하기 바람' 이라고 말입니다. 기가 막히고 억울했지만, 무슨 힘이 있어야지요.그래서 '그까짓 것' 하고 내버렸습니다. 우리 아저씬 요새 천성산, 소백산, 팔공산까지 신나게 다닙니다.^^ 저보다 더 건강해졌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아재께서 늘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아직도 진행 중 입니까 ? 끝이 났습니까 ? 금이정 님 마음 고생 많았습니다.아저씨 건강은 좀 어떤기요 ?
예상대로 금감원에서 이런 통보가 왔습니다. '보험조사원 혐의 없음, 병원과 해결하기 바람' 이라고 말입니다. 기가 막히고 억울했지만, 무슨 힘이 있어야지요.그래서 '그까짓 것' 하고 내버렸습니다. 우리 아저씬 요새 천성산, 소백산, 팔공산까지 신나게 다닙니다.^^ 저보다 더 건강해졌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아재께서 늘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다행이다. 아저씨 그래도 정기 점검은 해야 합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