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성취의 고갯길
* 2018.2.3(토), 청솔산악회 20인
* 맑은 햇살, 세찬 바람 & 살을 에는 날씨
* 10:20 가사령-성법령-사관령-배실재-막실재-침곡산-서당골재-태화산-먹재-한티재(한티터널) 3:10, 18.14km
닷새 전까지만 해도 인원이 댓 명밖에 안 됐다. 산행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런데 버스에 오르니 사람이 많다. 20명. 낙동 시작하고 인원이 많은 편이다. 훈련중님도 리얼피크 챌런지를 마치고 정맥길로 돌아와 함께하는 날이다. 물론 대구강님도 참여하시고.... 정맥을 사랑하고 우리 모임을 아끼는 분들의 마음이 한결같다.
낙동길도 어느새 포항에 들어섰다. 버스에서는 햇살이 너무 좋아 날도 좋을 줄 알았다. 10:20, 버스 내리니 바람이 세차다. 이번부터는 난이도가 높다 했다. 2014년 11월, 천안토요산악회는 가사령부터 한티재까지 이 구간을 무박으로 다녀갔다. 우린 당일산행이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패딩을 가방에 넣고 얇은 티셔츠 하나에 가벼운 장갑을 끼고 산에 오르는데, 날이 너무 춥다. 발자국 소리가 컸는지 처음 오신 여자분이 길을 내주시는데 조금 미안하다. 바람이 얼마나 거친지, 1미터 앞에서도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2km 남짓, 장갑을 바꿔 끼는데 대구강님과 맥사이버님이 추월한다. 바로 뒤에 그 여자분이 따라온다. 빡세게 올라 11:32, 5.2km 지점에서 사관령에 닿았다. 선두의 사람들이 다 여기 있다. 788m 사관령, 오늘의 최고봉이다. 령, 재, 치, 티는 모두 고개라는 뜻인데, 하루 정맥길의 최고봉이라니 이해가 안 간다. 그러잖아도 사관령에 가면 유서 깊은 여관이 하나 있을까 했다. 옛날에 정승이 머물렀거나 하는 그런 사관 말이다. 아니면, 간혹 귀신이 출몰하는 귀곡산장?
내 생각이 틀렸는가. 사관령은 포항시 북구 기북면의 오덕리, 성법리에서 죽장면 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대동여지도 등에서 조상들은 이 고개를 관령(官嶺)이라 불렀다. 우리말로 벼슬재란 뜻이다. 사관령(士官嶺)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동해 바닷가 시골 청년들에게 낙동정맥은 거대한 벽이었다. 이 고개로 산을 넘어야 물 많고 비옥한 땅 가사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륙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고개를 극복해야 급제도 하고 벼슬도 얻을 수 있었다. 정맥길은 꿈과 성취의 고갯길이다. 포항 사람들이 팻말 하나도 남기지 않은 그곳에서 우린 단체사진을 하나 남겼다.
20여분 더 진행하여 터를 잡았다. 비탈지고 바람불고... 모든 게 부자연스럽다. 달다방도 어설프다. 점심을 마칠 무렵, 한 사람이 멀리서 다가온다. 단박에 알아봤다. 아까 그 여자분이다. 닉네임이 소전이라고 한다. 맥사이버님 말씀 따라 겸연쩍게 코를 닦으며 자릴 잡는다. 점심을 마친 지 꽤 됐는데도 자유인님과 천지아지님 훈련중님은 아니 오신다. 계란과 만두를 어찌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일어서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님들은 아니 보인다.
손과 얼굴이 얼어붙는다. 하는 수 없다. 무학님 소전님과 함께 일어섰다. 선두는 벌써 멀다. 빠르게 빠르게 진행하는데, 길이 맞나싶다. 사관령 꼭대기에서 3km도 안 돼 배실재에 닿았다. 배실재! 생각해보니 벼슬재의 겡상도 발음이다. 이곳 사람들이 토속 발음으로 그리 불렀나보다.
배실재는 오늘 구간의 중간지점이다. 이정표는 낙동정맥 전체의 중간지점이라고 안내한다. 백두대간의 천의봉부터 다대포 몰운대까지 낙동정맥의 도상거리는 351.2km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청솔산악회의 낙동정맥 일정표를 따라 25회 구간거리를 합산하면 모두 409.4km가 된다. 후자가 맞다면, 낙동의 중간지점은 205km 즈음일테니 지난 13회차의 유리산이나 통점재 어간이 될 것 같다.
배실재에서 무학님 소전님과 교대로 사진을 찍었다. 함께 가는데, 무학님은 기록의 대가(大家)시라서 사진을 찍고 기억을 남기셔야 한다. 혼자서 질르는데,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내 발 뒤에 붙는다. 무학님인 줄 알고 길을 비키며 돌아서보니 소전님이다. 오늘 내게 세 번이나 길을 내주신 이 님은 진정한 산행 고수다. 긴긴 정맥길을, 혼자서 길을 찾으며 꾸준히 그리고 빠르게 진행하시다니....
무리하듯 빠르게 침곡산으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맥사이버님, 풍운님, 산이님을 만났다. 거친 바람소리에 대화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대략 사람과 말의 신용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다. 맥사이버님 말은 신용도가 50%, 풍운님은 30%! 그러시는 산이님의 말은 신용이 얼말까. 내 말은 순도 높은 100%다! 남들도 다 그렇게 안다. 아셨슈?
해발 725.4m 침곡산에 섰다. 주왕산과 운주산 사이에서 낙동정맥의 한 줄기를 이뤘다. 대동여지도엔 사감산(士甘山)으로 표시되었다는데, 산객보다는 약초꾼을 부르는 산이다. 산 아래엔 덕동문화마을이 자릴 잡았다. 여강이씨 집성촌이다. 사람들은 주변의 나무들을 잘라 시야를 열고 표지석을 세웠다. 오늘 구간의 유일한 표지석이 우릴 반긴다. 풍운님 말씀에, 저기 동해바다가 보인단다. 날이 좋으면 울릉도도 보인다는데, 산이님 말씀대로 신용은 30%다. 무학님과 다섯이서 교대로 사진을 찍었다.
서당골재 지나고 한참만에 태화산으로 오르는데 길이 너무 가파르다. 낙엽이 깊어 거의 무릎이다. 힘들게 오르니, 산정엔 매머드 건물처럼 산불감시탑이 서있다. 어? 무학님은 어디 계시지? 아무리 감시해도 님은 아니 보인다. 맥사이버님 산이님 풍운님과 사진을 찍으며 여유를 부렸다. 그 사이 소전님이 올라왔다. 감시원께 부탁하니 단체사진도 하나 남겨주신다. 산이님이 과일을 꺼내고 소전님이 따뜻한 차를 주신다. 풍운님은 과자를 나누시고.... 님들은 모두 한두 살 터우리 동년배다. 띠가 거의 같으니 나이가 비슷하것다. 이리 우기니, 그냥 빠지란다. 정 이러시면, 나 삐지는데.... 늙은이는 삐질테니, 젊은이들은 사관령 다시 넘어 벼슬 허슈~!
태화산에서는 그냥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여, 한참을 내려갔다. 저 아래, 마을이 보인다. 그리로 내려서면 될 것 같았다. 아뿔싸! 등로는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산에서 내려서니 또 산이 가로막는다. 이걸 넘어야 하나. 고도차가 50미터나 될까. 그래도 마지막 오르막은 너무 힘들다. 허벅지엔 가벼이 경련이 인다. 뜻밖에 만난 이 작은 봉오리에 우린 다 질색하였다.
2월 둘째 주엔 설연휴라서 정맥산행이 없다. 우린 3월 첫 주나 돼야 다시 모일 것이다. 한 달을 어찌 기다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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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실수에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낙동정맥을 매번 가고도 잊다니요. 고치겠습니다. 그리고 글 길어 죄송합니다. 말 많으면 안 되는건데....
이번산행은 모처럼 손님들이 오셔서 환영한다구 산신령께서 바람을 신나게 뿌려주는 바람에 똘똘 뭉치는 좋은산행이 아니었나 싶어요
즐거움도 배가되고 거기에 달팽님에 멋진후기가 낙동에 활력소라 생각이 듭니다
잘보고 갑니다 막바지 강추위 저처럼 감기걸리지(훌쩍ㅠ) 마시고 건강하게 명절도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반가운 분들도 많이 오셨고 모두들 뭉쳐지는데... 한 달을 어찌 기다린답니까. 하긴, 이제 봄에 만나니 더 화사한 모습으로 많이들 산행을 즐겼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후기 글 보고 갑니다. 처음 오신여자분입니다 . 글읽다 빵 터졌네유~ 웃음을 주시고 . 감사유
아이고, 처음 오신 그 여자분이 길고 미천한 이 글을 읽으시다니요. 읽고 공감해주시다니요~. 빵 터지신 데가 혹시 코 닦는 덴가요? 정말이지, 세 번 길을 내주실 때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님의 산행에선 굳센 의지와 내공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달팽님 말씀을 듣고 벼슬을 달고자 지나는 이를 위해 잠시라도 머물수 있게 허술한 여관이라도 있길 아니 있었던 터라도 기대를 했었는데 아쉬웠어요. 몇백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ㅎㅎ 그동안 쉬운구간만 다니다 모처럼 업다운이 있으니 조금 힘들게 느껴졌는데 커피 덕분에 할만했어요ㅎㅎㅎ
사관령은 벼슬재, 배실재는 벼슬재의 경상도 발음, 그러니 그게 그거! 이걸 깨닫는 데 쉽지 않았습니다. 몇백 년 전을 궁금해하는 건 고도의 역사적 상상력입니다. 앞으로의 정맥길도 사뭇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