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맥회원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92학번 심재범입니다. 역맥 선배인데도 신경쓰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자현님께서 요청하신 상해사변에 관한 자료입니다. 아직을 이것 밖에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사 참고자료 목록도 올려 놓았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
감사합니다.
자랑찬 백의민족의 후예인 역맥회원여러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인천에서 재범이가.......
메일주소를 몰라서 텍스트로 올립니다. 메일주소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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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전쟁
장개석의 남경정부가 안내양외를 내세우며 공산당 토벌전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점점 노골화하고 있던 일본의 화북침략에 대하여 국공 양당이 일치하여 항일을 해야 한다는 여론 이 높았다. 결국 서안사건을 계기로 내전이 정지되었고 일본이 전면적 침략을 강행하자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8년 간에 걸친 끈질긴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다.
12.1. 일본의 침략과 항일운동의 전개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이 봉천 교외에서 만주철도를 폭발시키고 그것을 중국군 의 소행이라 주장하면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써 9.18사변 곧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황제로 내세워 친일정권인 만주국을 세워 남경정부로부터 단절시켰다(1932.3). 마침 제3차 공산당 포위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 은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장학량에게 휘하 동북군이 일본에 저항하지 말고 철수하도록 하여 부저항정책을 취하였다.
장개석이 부저항정책을 택한 것은 잔여군벌의 지방할거와 반장개석파의 국민당 원로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 등의 존재로 자신의 권력기반이 취약하였으므로 국제 연맹에의 제소와 같은 외교적 수단을 통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왕정위와 타협하여 복직하였다. 왕정위와 장개석의 합작정권은 1932년 1월 일 본이 상해를 침략하자(상해사변) 한편으로 저항하면서 국제연맹에 제소하였다.
국제연맹은 일본군이 상해와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다. 이어 1933년 1월에는 열하성으로 침략해 들어왔고 국민정부군은 반격을 하 다 밀려 6월에 당고(塘沽)에서 정전협정을 맺었다. 일본의 침략을 피부에 난 자질구레한 병으로 보고 공산당을 뱃속 깊숙히 뿌리박힌 병으로 간주한 장개석은 일본과의 정규전이 중지되자 공산당 소탕작전에 나섰다. 4, 5차 포위공격을 벌인 끝에 공산당을 서금에서 몰 아내어 장정길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의 북부 중국에 대한 야심을 차례 로 받아들였다. 일본 군부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 주둔한 육군은 북부중국의 분리공작을 추 진하였다. 이들은 정전(停戰)구역에서의 중국 의용군의 활동이라든가 천진의 친일적인 신 문사 사장 암살사건 등을 구실로 삼아 중국측에 압력을 가하여 협정을 맺었다(梅津, 何應 欽협정, 1935.6). 이에 따라 중국의 국민정부군은 하북성 밖으로 이동하고 일체의 항일 여 론이 금지되었다. 이어 중국에 압력을 가하여 당고협정에 규정된 비무장지대에 친일 괴뢰 정권을 세우게 하였다. 이제 일본의 세력이 만주를 넘어 북부중국에 미친 것이었다.
이와같이 국민정부가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면서 만주사변 이래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부저항주의를 채택하여 북부중국에까지 일본의 세력이 미치게 되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인 항일운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원래 만주사변 이후 학생들은 대규모로 항일운동을 벌여 잠시나마 장개석을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상해사변때 중국군이 적극 항전하는 분 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단속으로 대규모 학생운동은 금지되고 비판적 인사들의 민권보장동맹을 중심으로 한 항일과 민권보장운동, 무장자위운동 등으로 항일운동이 면면 히 이어졌다. 그러던 중 북부중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중국 전역이 식민 지로 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어 12.9운동으로 항일운동이 폭발하였다.
1935년 12월 9일 북경대학생을 비롯한 북평의 수천 명 학생이 내전정지와 항일을 주장하 는 시위를 벌이자 전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상해에서는 이 운동에 호응하여 구국회(救國 會)운동이 전개되었고 상해에서 조직된 구국회는 다른 대도시로 번져나갔다. 북부중국의 항일운동이 학생중심이었던 데 대하여 구국회는 광범위한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이와같 은 구국단체를 대표하는 대표들은 전국각계구국연합회를 조직하여 국민정부로 하여금 항일 을 위하여 전민족의 의사를 결집시킨 거국일치정부를 구성하도록 압력을 가하고자 하였다.
공산당은 이미 장정 중인 1935년에 8.1선언을 발표하여 내전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 을 주장하면서 통일된 국방정부와 항일연군(聯軍)을 조직하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장정이 끝나고 섬서에 정착하게 된 뒤에도 도시에서의 항일 학생운동을 선동하였고 12.9운동에도 공산당의 영향이 컸다. 공산당은 만주사변 이래 중국의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36년쯤 되면 중국의 실세인 장개석과 연합하여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또 구국연합회 등 대중의 항일요구에 적극 찬성한다는 태도를 보였 다.
이와같이 항일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치열해지고 공산당이 이에 적극 동조하고 있었지 만 국민정부는 이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항일전에 대한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구국연 합회 지도하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으로 변하자 지도자 7명을 체포하였고 공산당에 대한 포 위공격을 여전히 고집하였다. 국민정부의 이와같은 방침은 결국 서안사건을 초래하여 내전 정지와 일치항일의 방향으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12.2. 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
만주사변으로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를 잃은 장학량의 동북군은 공산당에 대한 제6차 포 위공격의 임무를 띄고 서안(西安)에 주둔해 있었다. 장학량은 1936년 1월말 동북대 학생들 이 서안에 찾아온 이래 항일의 여론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9월에는 북부중국에서 모 여든 학생 370명을 훈련시켜 학병대를 조직하였고 동북군 안에서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 이 강해졌다. 1936년 전반기에는 공산당과 정전을 맺고 공산당원이 서안에 주재하면서 동 북군과 양호성(楊虎城)의 서북군의 개조를 도와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와같이 장학량이 항일에의 의지를 강화하고 있던 중 일본 관동군이 내몽고를 독립시키 려는 공작의 일환으로 수원성(綏遠省)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부대를 이끌고 수원성으로 가서 중국군을 돕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거부하고 공산군 토벌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총공격 준비를 갖추고 1936년 12월 4일 서안으로 와 서 장학량에게 공산군 토벌을 하던가 아니면 동북군, 서북군이 각각 복건, 안휘성으로 이 동하라고 요구하였다.
동북군, 서북군 가운데에서 항일의 여론이 높아져 가고 상황에서 그들에데 공산군 토벌 을 강요한다는 것은 장학량이나 양호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또 복건, 안휘성으 로 이동하라는 요구는 장개석에 의해 제거됨을 의미하였다. 이에 장학량과 양호성은 제6차 공산당 포위공격령이 내려진 12월 12일에 장개석을 체포, 연금하고 전국에 내전정지, 체포 된 구국연합회 지도자 석방 등 8개항을 주장하는 전보를 내보냈다.
이 서안사건에 대해 국민당내의 친일적인 인물들은 장학량의 토벌을 주장하였으나 장개 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 등은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안으로 왔다. 공산당 은 장학량의 요구에 따라 주은래(周恩來)를 파견하여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구국연합 회는 장개석의 석방과 중앙정부 지도하의 항일전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을 석방하여 그의 지도하에 항일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여론을 배경으로 장학량, 양호성, 공산당과 국민정부 간에 협상이 벌어져 내전정지와 항일,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개조 등을 포함한 협 정이 이루어졌다.
25일 장개석이 석방되고 서안사건은 평화적으로 타결이 되었다. 이로 인해 내전의 정지 와 일치항일이 약속되자 그동안 항일을 요구해왔던 대다수 국민들은 안도하였다. 약속대로 내전이 정지되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지속적인 정식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몇 차 례 회담이 열리던 중 1937년 7월에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둘 러 합의를 보고 9월 23일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당의 소비에트정부는 국민정부 휘하의 변구(邊區)정부로 격하되었다. 그 리고 홍군은 국민혁명군으로 개칭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 되었다. 국민정부는 공산군에 대한 무기공급을 약속하고 공산당 대표를 장래 소집될 국민참정회에 무소속 대표와 함께 참가시킨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제 두 개의 정부로 나뉘어 있던 중국이 항일을 위하여 통 합되었으니 만큼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전면적인 항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2.3. 항일전쟁
12.3.1. 전쟁의 발발과 국민정부의 항전체제
1937년 7월 7일 밤 북평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훈련중이던 일본군을 향하여 총탄이 몇 발 날아오자 일본군은 부근에 있던 제29군을 공격하고 중국군이 응전한 것이 이후 8년 에 걸친 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며칠 간의 국지적인 전투가 있은 뒤 일단 정전협정 이 맺어졌으나 일본은 중국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하였고 중국공산당은 7월 8일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전쟁을 발동하자고 주장하였다. 장개석도 여산(廬山)에서 항전의 의지를 분명히 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맞아 7월 28일부터 제29군에게 총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30일에는 북평과 천진을 점령하였고 8월 13일부터는 상해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이와같은 일본군 의 총공세에 직면하여 8월 14일 국민정부는 전면전쟁을 선포하고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위 원장이자 육해공군 대원수로서 총동원령을 내렸다. 공산당과도 합작하여 홍군을 팔로군으 로 개명하여 화북지방의 국민혁명군에 편입시켜 항전에 나섰다. 전쟁은 국민정부 정규군이 5개의 전구(戰區)로 나누어 전쟁을 치른 정면전장과 공산군이 화북, 화중지방에서 유격전 을 벌인 적후방의 전장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종결시키겠다는 전략으로 화북을 전면 침공한 일본군에 대하여 국민 정부는 화북을 전략상 포기하고 주력군을 양자강 하류에 집중시키고 일부를 산서 등지로 보냈다. 이는 일본군을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자 원, 설비, 인원을 양자강 상류의 오지로 소개시켜 장기적인 항전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 다. 일본군은 전선을 확대하여 차하르성에 침입하여 중심도시인 장가구(張家口)를 점령하 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산서성 대동(大同)과 수원성을 점령하였다(8-10월).
일본군의 전선 확대 도중 산서성에서는 강한 저항이 있었고 9월에는 임표(林彪) 휘하의 팔로군이 평형관(平型關)에서 일본군 1개여단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10월에는 국 민정부군과 산서군이 팔로군 유격부대의 협조를 받아 일본군을 맞아 격렬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의 진격을 1개월 가까이 늦추기도 하였다.
전장이 화북에서 화중으로 넘어온 후 국민정부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방어한 곳은 상 해였다. 상해의 전투에는 항전 초기 최대병력이 투입되었고 장개석이 친히 양자강 유역의 제3전구 사령관직을 맡아 직계 중앙군을 투입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11월 말 상해를 점령하였다. 물론 국민정부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상해 방어까지 3개월을 버텨온 국민정부군은 이후 패주를 거듭하였고 일본군은 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참모본부가 지시한 선을 넘어서 진격하여 12월에 수도인 남경을 점령하였다.
역사상 악명높은 남경대학살이 여기서 자행되었다. 속전속결을 목표로 한 일본군은 중국 인의 항전의지를 꺾어 놓겠다는 의도로 화북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민간인 시설에 대한 폭격, 살상, 강간, 약탈을 해왔는데 남경 점령시에 일본군의 만행은 절정에 달하였 다.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된 학살에서 그들은 중국군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았고 패잔병 소 탕이란 명목하에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부녀자는 어린애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강간, 폭행한 후 살해하였다. 중국인들은 이 학 살로 30만이 희생당했다고 하고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비전투원과 포로로 희생된 수가 약 12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학살이 전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일본은 각국의 비난을 받았고 일본군의 의도와는 반대로 중국인의 항전의지를 더욱 굳어지게 만들었다. 국민정부는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지 구전략에 따라 상해가 함락된 1937년 11월 수도를 사천성의 오지에 있는 중경(重慶)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항전체제를 강화하는 한편으로 항전자위를 재확인하였다.
1938년 3월에는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하고 있던 양자강 중류지역의 도시 무한에서 국민 당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어 외교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총동원체제를 확 립하고자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의를 반영하기 위해 국민참정회를 소집하기로 하고 경제 적으로는 농촌경제를 개발하고 공업을 장려하기로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제한된 범위 안에 서이기는 하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일련의 민주화조치를 취해 항전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국민당의 이러한 조치는 각계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리하여 장개석을 정점으로하여 무한을 보위하겠다는 전민(全民)항전의 결의가 다져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군은 태아장(台兒莊)과 서주(徐州)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중 국군은 2주일 간의 격전 끝에 태아장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힌 끝에 이를 격퇴 하여 항전 초기 정면전장에서 최초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태아장에서 패배를 한 일본군은 대군을 몰아 화북과 화남을 잇는 요충 도시인 서주를 공격하였다. 삼면이 포위되어 불리한 형세에 처한 중국군은 서주 방어를 포기하고 서남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추격하는 일 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정주(鄭州) 북쪽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였으므로 일본군이 물속에 고 립되어 진격을 빨리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태아장과 서주에서의 전투로 일본군은 큰 피 해를 입고 속전속결 작전이 분쇄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제방을 파괴함으로써 중국측은 황하 의 범람으로 홍수가 일어나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낳는 손실을 입었다.
서주를 함락시킨 일본은 무한과 광주 방면으로 뻗어 왔다. 1938년 10월 21일 광주를 함 락시켰고 국민정부군의 끈질긴 저항을 받은 끝에 10월 27일에는 무한을 점령하였다. 장개 석은 무한에서의 철수를 발표하면서 내지에서의 건설과 장기항전을 선언하면서 기필코 승 리를 거두겠다고 장담하였다. 일본은 무한점령 작전에 성공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그 과정 에서 피해를 많이 입은 데다 무엇보다도 애초의 속전속결 방침과는 어긋나게 중국의 항복 을 받아내기는 커녕 백만에 가까운 군대를 중국전선에 묶어둔 채 넓은 전선에서 장기전에 들어가야만 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 포병이나 기계화부대가 힘을 쓸 수 없는 내지의 언덕이나 산에 진을 치고 방어에 임했으므로 더 이상 일본군이 진격할 수도 없어 대치상태 로 들어갔다.
이와같이 전쟁이 대책없이 장기화하자 일본은 국민정부의 내부붕괴를 도모하였다. 일본 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국민정부에 접근하자 이에 동조한 왕정위가 중경에서 탈출하여 일본과 화평교섭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3월 남경에 친일적인 괴뢰정부를 세우고 그동안 점령지에 세워졌던 여러 괴뢰정부를 휘하에 합류시켰 으나 국민정부는 여전히 중경에 수도를 두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국민정부 지역에 대한 경제봉쇄 정책을 취하는 한편으로 1939년 5월 부터는 중경 등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개시하였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 같은 전체 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고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서고 연합국이 중 국을 지원하면서부터 중국에서의 항일전은 이제 동아시아에서의 반파시즘 세계대전의 일환 으로 치러지기 시작하였다.
12.3.2. 공산군의 항전과 국공의 대립
장정 이후 군사력과 경제력이 위축된 공산당은 일본과 전면전쟁이 벌어지자 정치력을 발 휘하여 군사, 경제적 측면에서의 낙후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공산당은 지구전과 유격전 을 항일전술로 채택하였다. 공산군은 유격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일본군 점령지의 후방에 들어가 변구 곧 항일근거지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항일전의 초기에 일본군이 국민정부군 과의 정면전장을 우선으로 여겨 주요도시를 함락시키느라고 보급선이 늘어났기 때문에 공 산군은 그 틈을 타서 유격전을 벌이고 근거지를 확대시켜 나갈 수가 있었다. 즉 일본군의 침공으로 국민정부군이 퇴각한 후 무정부상태에 빠진 촌락에 들어가 구국을 기치로 내세운 공산당이 민심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팔로군은 화북지역의 곳곳에서 항일근거지를 세웠고 새로 조직된 신사군(新四 軍)은 화중지역에서 근거지를 세웠으며 화남지역에서도 광주가 함락된 뒤부터 근거지를 형 성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말 팔로군은 전쟁 전의 3만으로부터 15만 6천 명으로 성장했고 신사군도 1만에서 2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 국민정부군과 일본군의 전선이 확대되고 전장 의 크기가 넓어져서 일본군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공산군의 이러한 발 전추세는 1940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당원이 전쟁초의 4만으로부터 80만 명으로 늘었고 군 대는 4만 5천에서 50만 명으로 늘었으며 공산당 지배하의 인구가 1억에 달하였다. 국민정 부군의 패배가 공산당의 지배지역을 확대시킨 셈이었다.
이렇게 지배지역이 늘어난 것은 공산당이 항일전 도중 활동의 역점을 근거지의 확대, 강 화로 잡은 데도 기인하였다. 이렇게 공산당의 근거지가 늘어나게 되자 일본은 공산군에 대 한 인식을 달리 하게 되어 근거지에 대한 소탕작전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강화하며 경제봉 쇄를 시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팔로군과 신사군은 1940년 8월부터 민중을 동원한 대규모 반격에 나섰다.
이것이 곧 백단(百團)대전인데 화북의 주요 철도에 대한 기습공격, 일본경비대 습격 등 으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공산군도 희생이 컸다. 또 일본은 백단대전을 계기로 북부 중국의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소탕작전을 강화하여 유격부대와 근거지의 사람, 물자, 취락을 모두 죽이고 빼앗고 불태워 없앤다는 삼광(三光)작전을 벌였다.
공산당이 이와같이 항일전쟁의 와중에서 근거지를 확대하고 있었던 반면 국민당은 무한 이 함락된 후 왕정위가 중경을 탈출하여 일본과 화평을 교섭하는 등 지도부에 내부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독재체제를 강화하여 당과 군과 정을 일원화한 국방최고위 원회의 위원장이 되었고 반공의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독재체제의 강화와 아울러 지방에 대한 경제적 통제를 강화하였으므로 지식인, 언론의 반독재 저항과 운남 군벌을 비롯한 지 방 군벌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장개석의 통제강화, 소극적 항일, 반공 조치로 인하여 항일 과 통일전선에 불안을 느낀 중간파 정객, 지식인들은 제헌운동을 통해 장개석 독재에 반대 하였다.
전체 전쟁의 국면에서 국민정부가 수세에 몰려 있고 지배지역 내에서 반장개석의 움직임 이 지식인, 지방군벌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밖으로 공산당의 지배지역이 확장되 어 가자 양당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이들의 충돌은 전쟁 이후의 주도권을 누 가 장악할 것인가를 염두에 둘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국민당이 반공 조치를 결정한 후 1939년 박산(博山)사건, 6월 평강(平江)사건으로 양당이 충돌하고 12월과 1940 년 3월에는 염석산이 공산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1년 1월에 안휘성 남부에서 이동중이던 공산계의 신사군을 국민당이 습격하여 약 9천 명의 신사군 중 겨우 천여 명만이 살아남은 환남(晥南)사변(신사군 사건)은 양당의 합작을 깰 수도 있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측이 무력대결을 피하여 양당의 충돌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공산당이 냉정하게 대처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유지하려고 한 것은 공산당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공산당은 또 국민당 지배지역에서 반독재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간파를 적극 유인하고 자 하였다. 공산당의 항일과 결부된 여러 가지 대민정책도 이들을 유인하는 데 중요한 요 인이 되었다. 즉 2차 국공합작 이후 소비에트정부가 국민정부 휘하의 지방정부로 격하되면 서 공산당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혁명을 급격히 수행하지 않았다. 항일에 협력하 는 지주에게는 기존의 소작료와 이자를 낮추어 지급하는 감조감식(減租減息)정책과 변구에 서의 행정부 및 의회구성에 공산당 외의 당파와 무당파 민주인사를 각각 1/3씩 참여시키는 3.3제를 쓰고자 하였다. 감조감식정책은 농민대중을 광범위하게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고 3.3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유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2.3.3.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의 확대와 종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전선이 화중, 화남으로 확대되자 이 지역에 이권 을 가지고 있던 영국, 미국 등은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였다. 일본은 1938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미국, 영국은 중국에 차관을 주는 등 중국을 원조 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중국원조를 차단하기 위해 해남도(海南島)와 신남양군도(新南洋群島)를 점령하고 천진의 영국, 프랑스 조계에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하여 미국의 군수물자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에 타격을 입 혔다. 또 일본이 왕정위의 괴뢰정권을 세우자 미국은 국민정부를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국 민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미국과 관계가 악화된 일본은 필요한 군수물자를 얻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명분을 세워 남방정책을 추진하였다. 1940년 9월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었고 미국, 영국은 계속하여 중국에 대규모 원조를 주었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진전되어 가면 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남경 괴뢰정권을 승인하자 중국은 독일, 이탈리아와 국교를 단 절하였고 이제 중국의 항일전쟁은 반파시즘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1941년 7월 미국이 미국내 일본 자산의 동결조치를 취하자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 게 된 일본은 12월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12월 8일 진주만의 미군주둔지를 공 격함으로써 아시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와같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은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얻어 고립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의 버마루트 봉쇄로 물자 수송이 두절되고 홍콩이나 미국, 영국 조계로부터의 원조가 끊겨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일본의 동남아점령으로 화교들의 지원이 끊어졌다. 국민정부는 1942년 3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국민생활을 통제하는 국민당 일당독재체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통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급격한 물가상승, 강제 차용, 징병 등은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또 미국, 영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장개석 휘 하의 중앙군이 항전 이후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항일전에 소극적인 채 공산당지역의 봉쇄 에 전념하고 항일전은 다른 군벌부대에게 맡기자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다. 경제적인 어 려움과 국민정부 내의 부패로 국민정부군의 자질과 사기가 저하되어 일부의 분투에도 불구 하고 국민정부군은 전체적으로 패퇴를 거듭하였다. 일본에 투항하는 병력도 늘어났고 국민 정부군 유격부대는 비적떼나 마찬가지로 지방민에게 부담이 되었다.
소극적인 항전과 통제 강화에 반발하는 중간파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서 이들의 민심도 정부로부터 떠나갔다. 정부 안에서는 장개석의 독재를 지탱해주던 기관인 남의사(藍衣社)* 와 CC단(團)* 간의 갈등, 삼민주의청년단과 국민당의 갈등 등이 빚어졌다.
남의사: 1931년 말에 성립된 국민당 안의 기밀기관으로 장개석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전반적인 통제, 감시, 정탐, 처벌 등 비밀업무를 담당하였고 당을 장악하였다. 황포군관학 교 출신들이 많았으며 장개석이 내전에서 패하면서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CC단: 장개석의 독재유지의 지주가 된 폭력적인 정치 결사로서 중심인물인 진과부(陳果 夫), 진립부(陳立夫) 형제는 1926년의 북벌 이래로 장개의 심복으로 활약하면서 국민당 내 의 좌파와 싸우기 위해 이 결사를 조직하였다. 국민당의 일당통치기에 당의 조직을 지배하 면서 행정, 재정 등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공산당 지배지역도 삼광작전으로 불리게 된 일본의 강력한 소탕작전으로 1941년부터 위 험에 처하였다. 일본군이 백전대전 후 공산당 포위공격을 주요목표로 세워 화북지역에서의 전의를 말살시키고자 한 데다 국민정부군의 군사적, 경제적 봉쇄가 겹쳐 근거지는 이중으 로 고통을 받았다. 이에 따라 공산당 지배지역과 지배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팔로군 병력이 1940년의 40만에서 1942년에는 30만 명으로 줄었다. 물자부족과 물가상승 등 경제위기가 닥쳤다.
공산당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루기 위해 군대, 기관, 학교가 엄청난 노동시간과 열의를 쏟아붓는 생산운동을 벌였다. 또 당내의 사상, 조직을 통일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정풍운동을 벌였다. 당내의 주관주의, 파벌주 의를 일소한다는 명분을 세운 정풍운동을 통해 왕명 등 소련유학생파와 코민테른의 영향력 이 배제되고 모택동의 절대적인 권위가 확립되었다.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중국군은 일본군에 대해 몇 군데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 다. 미군사령관 스틸웰에 의해 미국식으로 편성된 부대가 연합군의 버마탈환 작전에 가담 하여 승리를 거두고 호남성에서도 일본군을 패배시켰다. 국민정부 직속부대도 운남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어 중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에 맞추어 중국전선에서도 총반격을 할 준비가 갖추어졌고 위기에 몰렸 던 공산군도 1943년부터는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중반부터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일본은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한 마 리아나군도를 1944년 6월 미국에 빼앗기면서부터 패색이 짙어졌다. 1945년 미국이 필리핀 을 탈환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계속하던 끝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하였고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 써 중국은 8년여에 걸친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8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중국이 입 은 인적, 물적, 정신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승리는 문자 그대로 비참한 승리였 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중국 근대사 이래로 100여 년에 걸친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승리였고 중국은 이로써 반제국주의의 과제를 자신의 힘으로 달성하게 된 셈 이었다.
중국사 참고자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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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지내고계시져???^^
우선 현재 역맥에 대해서 제가 간단히 말씀드릴께여...
그게 가장 궁금하지져???
지금 역맥수업은 재용선배님께서 해주고 계시구여... 2-4학년은 삼국유사
강독을 하고있답니다... 수업은 매주 월요일 3시이후에 하구여...
1학년들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30분 부터 하고 있어여..
1학년은 다음학기부터 같이 수업을 하기 위해서..한국사 개설을 공부시키고 있구여... 다음학기부터는 전학년이 같이 수업을 할것같아여..
글구 1학년 신입생은 10명이구여.. 많져?? 물론 끝까지 남느냐가 중요하지만 아직까진 시작이 좋답니다....^^
그리구 가장 중요한 건... 부탁이 있는데여...
제가 도상범 교수님 수업과 이번에 중국답사에서 상해사변에 대해서 발표와 답사지를 맡았는데.. 상해사변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혹시 선배님들이 갖고 계신게있으면 부탁드릴려구여...
상해에 대한 내용와 상해사변에 대한 내용이여... 상해에 대한건 구할수 있는데.. 상해사변은 거의 없더라구여...
저의 실력이 딸려서...^^;
히~~ 부탁드릴께여....
그럼 이만..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