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8월18일(금)맑음
나는 머리로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가슴으로 사람을 만나며 마음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불교를 가르치는 스승의 일이다. 사랑은 가슴에서 우러나오고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불교는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會encounter) 마음과 마음이 교통(通communicate)하는 會通회통이다.
형이상학적 색안경을 벗어버렸을 때 내가 길들인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보여질 것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말처럼 쉬워서 누구나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어지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는 같아 보일지라고 지향하는 바에는 차이가 있다. 알려지고 말로 표현된 ‘있는 그대로’는 이미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붓다가 지시한 ‘있는 그대로’는 공자의 그것과 다르고, 예수의 그것과도 다르다. 어떤 선각자의 지시를 지향할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그렇다! 영적인 길이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것이다. 길을 찾아 오랫동안 방황한 끝에 선택한 길이 선각자께서 오래전에 닦아놓은 길이라면 그 사람은 행운아이다. ‘있는 그대로’는 ‘있는 그대로’를 벌써 보고 알았던 선각자 붓다가 우리에게 지향하라고 지시하는 방향이다. 그분이 지시한 그 방향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비로소 ‘있는 그대로’가 열리어 나타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있는 그대로’는 명상시장의 진부한 캐치프레이즈가 아니요, 신비화된 영적인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선각자 붓다의 교육의 도구이다. 붓다의 ‘있는 그대로’는 여실지견이며, 三法印이다. 여러 사상가나 철학자들이 ‘있는 그대로’에 대해 말이 많으나 모두 붓다의 삼법인에 담기고 만다. 주먹을 꽉 쥐면 한 물건도 가질 수 없지만 주먹을 활짝 펴면 세상의 모든 게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음을 본다.
2017년8월21(월)비
하루 종일 비 내리다 그치길 반복한다. 이상한 비, 변덕스런 비다. 저녁 강의에 새로운 법우가 두 분 오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경험된다는 주제로 이야기 하다. 홍보팀 만남을 토요일로 정하다. 강의 끝나고 비 내리는 강변을 걷다. 강변의 밤풍경이 아름답다.
2017년8월22일(화)간간히 비
오전에 초하루 독경법회 봉행하다. 학생들과 점심 공양하고 茶樂에 가서 커피를 마시다. 죽향에 남겨두었던 <붓다프로젝트>와 예경문 가져오다. 저녁에 위빠사나 명상교실 하다.
2017년8월23일(수)맑음
적진 가까이에 침투한 요원은 언제 어디서든 잠복해있을 저격수의 표적에 노출되어있다. 침투요원은 언제 어디서 불시에 날아올 총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었기에 살아있는 순간이 오히려 다행할 뿐이다. 그는 땅위의 어느 곳에 있던 ‘죽음’이란 저격수의 표적에 들어있다. 어느 계곡의 물가에서, 어느 골목 어귀에서, 험준한 바위동굴이나 마을집의 골방에서도 쓰러질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염라대왕이 고용한 저격수의 조준경에 포착되어있다. 그에게서 숨거나 도망치려하기 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당당하게 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갈 때가 되었군, 지금이 죽기 좋은 때야.’하고 육신을 땅에 눕히면 그만이다. 죽음은 낯선 이방인이나 쫓아버리고 싶은 불청객이 아니다. 그는 항상 내 주변을 맴돌며 내가 바라봐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죽음은 오히려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짝사랑이라 해야 하리라. 그는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사랑을 거부할 수는 없다. 죽음은 내 옆에서, 내 안에서, 또 다른 ‘나’를 살고 있다. 자, 때가 되었군. 그대 죽음을 기다린 지 오래 이제 가야할 시간, 좋은 삶이었지 않은가? 라고 독백할 순간이 반드시 오리라. 죽음이 지금여기에 겹쳐져 고요한 순간에 잠겨있다.
저녁에 <정진하는 데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라는 주제로 강의하다.
2017년8월24일(목)맑음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문인보살과 고속버스 타다. 서울경부고속터미널에서 내려 지하철 타고 종로3가역에서 하차하다. 보신각까지 가는 길이 헷갈려서 택시 타다. 가까스로 허정스님과 모임 약속을 지키다. 허정, 법안, 일문스님과 합석하여 대화 나누다. 허정스님 말씀에 ‘조계종단 개혁을 위한 집회인데도 정작 스님들의 참여가 부진한데, 스님께서는 일부러 이렇게 멀리에서 와주신 동기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에 나는 답하기를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지만 우선 의리 때문에 왔어요. 몇 분 스님이 대의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는데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참석하러왔지요.’ 시간이 되자 보신각 촛불법회에 나갔더니 사부대중 1,200여명이 모여 있다. 열기가 느껴진다. 내 옆에는 김천 수도암에서 3년 결사 정진을 마치신 원인스님이 앉아계신다. 평소 존경하는 수좌스님이시다. 오늘 조계종 적폐청신을 위한 촛불법회에 법사로 초청받고 특별히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다. 법문시간이 되니 스님께서 단상에 오르셔서 <조계종단 개혁의 5가지 방향>을 말씀하셨다. 모두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는 현실진단과 제시하신 개혁의 방향은 정곡을 찔렀다. 과연 수행자다운 견해였다. 허정스님의 목탁집전에 따라 조계사까지 행진하였다. 동국대학교 학생의 힘찬 구호가 행렬을 따라오면서 울렸다. 조계사 일주문 옆 우정국 자리에 터를 잡은 명진스님 단식장소까지 행진하였다. 대중은 ‘자승은 물러나라!’ 고 외치기를 조계사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도록 소리 지른다. 나는 명진스님 단식 텐트 안으로 들어가 인사하고 조용히 앉았다. 청화스님, 법안, 허정, 일문, 봉암사에서 오신 한 스님이 계셨다. 명진스님 말씀이 다음 일주일 안에 자승권력층 내부에 무슨 중대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연꽃거사와 만나 환담을 주고받으며 사진촬영을 하다.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다. 문인과 지하철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 와서 한 시간 버스를 기다리다. 문인에게 經行경행을 가르쳐주고 실습하다. 진주선원에 돌아오니 새벽3시. 서울 잘 갔다 왔다. 보람찬 하루였다.
2017년8월26일(토)맑음
하늘이 화창하게 개였다. 낮에는 아주 덥지만 습기가 없어 청량하게 느껴진다. 홍보팀과 점심 공양 같이 하고 다락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을학기 공부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기존회원에게 소식 전하고, 장기결석자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하여 관심을 보내기로 하다. 부처님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진주선원 모임을 당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진주선원 도반들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마음을 보내야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친구들을 법회에 데려오도록 정성을 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모임이 끝나고 선원으로 돌아와 사유한다. 너의 존재를 세우는 것은 백지위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하얀 백지는 淸淨無碍청정무애하지만 한 점이 찍힘으로 공간이 긴장하면서 뒤틀린다. 점을 중심으로 공간이 휘어지면서 중력이 발생한다. 점이란 존재는 하얀 공간에게 짐이 된다. 존재가 자기를 유지존속하면서 자기를 주장할 때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 존재를 떠받혀주고 살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는 주변에 의존하면서 존속을 꾀한다. 존재는 세계의 짐이요, 타자에 의존됨이요, 다른 것들의 희생을 먹고 존속, 유지된다. 나는 내 존재를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 내 존재가 주변에 의존하면서 타자의 희생을 먹고 존속하는 데 드는 비용이 내 존재가 타자에 봉사하고 세계의 행복에 기여하는 효과보다 더 많다고 느껴질 때 내 존재는 해체되어 사라져야 한다. 나는 세계의 짐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존재가 세상의 짐이 되는지, 세상에 선물이 되는지 순간 순간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듯이 먹고 마시며 생존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왜 지금 너는 세계에서 양분을 섭취하면서 너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가? 너는 지금 바로 죽지 않고, 꼭 살아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죽음은 쉽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고,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목숨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하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바칠 것이 목숨 밖에 없으니 내놓는 것뿐이다. 장미꽃은 붉기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치고, 빗방울은 비를 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고 떨어진다. 인간의 목숨이 장미 한 송이나 빗방울 보다 나을 게 뭐 있는가? 목숨이란 필요할 때까지 쓰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것이다. 언제까지 필요할까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지혜에 달려있다. 자기 목숨이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목숨이 떨어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너는 그런 생명의 순환 가운데 한 티끌일 뿐이다. 네가 사라진다 해도 해와 달은 변함없이 돌고 꽃은 피고 바람은 불 것이니 너는 깨끗이 떠나라. 세상이 너를 기억해주지도 않을 것이며, 네가 왔다간 자취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긴다는 게 우스운 짓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세상은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네가 있음으로 오히려 잘 안 돌아갈 런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유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새삼스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 애초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해줄까를 물을 뿐,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지 않는다. 내 존재는 세상의 짐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선물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2017년8월27일(일)흐림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귀하게 대접할 것인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마냥 눈앞에서 흘러가는 걸 본다. 너무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잡을 수 없다. 다만 느끼고 바라볼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순간을 잡으라는 말이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은 잡을 수 없고 다만 느낄 뿐이다. 그 순간 하는 일에 몰입하라는 말이겠다.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 순간을 잡은 것이니까. 그러니까 순간은 내용이 없는 극미의 시간단위가 아니고 공백도 아니다. dF/dt=lim경험/최소시간단위. 모든 경험은 시간의 함수이다. 경험을 최소시간단위(순간)으로 미분한다. 미분한 값은 몰입도 혹은 無常計數무상계수가 된다. 0순간으로 미분하면 경험함수는 무한대가 되고, 무한대의 순간으로 미분하면 경험함수는 0가 된다. 순간이 정지하거나 사라지면(근접삼매 이상에 들면) 경험이 무한대가 된다. 빤야띠pannati가 가라앉고 빠라마따paramatha가 드러난다. 이것이 소위 찰나에 영원을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말뿐이지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영원적 순간, 찰나의 무시간성, 무시간의 현존, 하하하, 모두 흘러갈 뿐. 시간이 선풍기처럼 돌아가도 시원하지는 않지만,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시원하다.
2017년8월28일(월)맑음
하루가 날아갔다. 내 생명이 고인 샘에서 한 모금이 사라졌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기에 사라졌다 할 수도 없다. 생명이면 되었지 ‘내 생명’, ‘네 생명’이라 할 게 뭐란 말인가? 깊은 밤 샘물을 바라본다. 물을 마시면 줄어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다. 물은 마신만큼 채워져 늘 한결 같다. 생명의 샘이 한결 같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또 위안이 안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위안을 바라질 말아야한다. 태어날 때 내 이럴 줄 몰랐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고통의 바다에 이미 던져졌다는 걸 벌써 알아차렸어야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세상에서 위안을 구하다니? 오늘 하루 잘 살았으면 됐으니까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들자.
첫댓글 스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렵지도않고 반갑지도 않게 맞이 할겁니다.
인생을 즐겁게 산다는것!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하는가?
이 문제도 사유하고 싶어지는데 정리는 썩 잘되지 않을것같네요.
남은 인생 잘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