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1
예종은 1450년(세종 32)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하지만 예종은 재위 1년 만에 스무살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독살설, 복상사설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정설은 말 그대로 급사였다. 재위기간이 1년 밖에 되지 않아 조선역사에서는 별로 존재감 없는 왕 중 한 분이시다.
그러나 예종 재위기간과 그 전후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예종은 본래의 서열대로라면 형인 의경세자가 있어 왕이 되지 못했을 운명이다. 안타갑게도 의경세자는 용상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저물었다. 후에 덕종으로 추존 된다.
의경세자는 우리가 TV 역사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보아 왔던 인수대비의 남편이기도 했다. 당시 인수대비는 세자빈였으나 왕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만다. 시동생 예종이 죽기 직전 까지는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앞으로 예종과 성종, 연산군시대까지 자주 등장할 것이다.
인수대비에게는 의경세자와 사이에서 아들이 둘 있었다. 둩째 아들 자을산군이 예종이 죽은 후에 왕이 된다. 그가 바로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켰다는 성종이다.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은 한명회 사위이기도 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인수대비와 한명회 합작으로 예종을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설일 뿐이지만 설로만 볼 수 없는 당시 여러 정황들이 있다.
야사에는 의경세자가 현덕왕후 권씨(단종의 친모 )의 저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의경세자는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병사했다. 당시 단종은 살아있었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1년 먼저 죽었기에 이 야사는 꾸며진 야사이다.
세조는 시간이 지날 수록 조카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야사에 의하면 세조가 꿈을 꾸는 데 현덕왕후 권씨(단종 친모)가 저주를 내리면서 세조에게 침을 뱉었는 데 그 자리에 피부병이 생겨 세조가 죽기 직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피부병이 세조 얼굴까지 번졌고 온 몸이 썪어 가는 등 세조에게서 심한 악취도 풍겼다 한다. 지금으로보면 문둥병 증상이었다. 세조가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렸다는 것은 실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 초기에 강력하게 실천했던 왕권강화와 부국강병 정책도 세조 말기로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한명회, 신숙주등 권신들에게 힘이 쏠렸다.
세조는 재임기간동안 왕권강화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공신녹훈을 했다. 그렇게 공신이 된 사람들은 계유공신과 적개공신으로 나뉘어 진다. 이들을 각각 구공신과 신공신으로도 불리어 졌다.
구공신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계유정란등에 도움을 준 신하들 한명회, 신숙주, 권람등이다.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귀성군 준, 남이등이다.
세조 13년, 1467년에 일어 난 '이시애 난'은 세조말기를 크게 흔들어 놨다.
세조는 그래도 의리를 지키는 왕이었다. 공신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했던 세조는 그들과 허물없이 술자리등을 하며 지냈다.
이 점은 세조가 태조이방원과 차이점이었다. 세조는 태종처럼 공신들 대부분 숙청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았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흐르고 공신들 힘이 너무 커졌다. 공신들 세력이 강대해져 세조가 추구한 왕권강화정책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러할 때 세조는 병이 들었고 세자는 아직 스무살이 되지 못하고 어렸다.
그래서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젊은 세자를 위해 한명회나 신숙주를 경계 할 신진세력을 육성하며 키우고 있었다. 특히 세조 친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귀성군 준과 권람의 사위인 남이를 총애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애 난이 터졌다.
원래는 구공신들에게 난 진압을 맡겨야 했지만 이시애는 그것을 방비해서 구공신들이 역모를 꾀한 것 처럼 교묘한 술수를 썼다.
이시애는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과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살해하는 동시에,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고 주장한다.
이 소식을 접한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등 조정 중신이 관련 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일단 이들을 대궐 안에 구금시키는 동시에 이들을 제외하고 반란 토벌단을 편성하였다.
아마 태종이었다면 좋은 기회라고 여기며 이들을 처형시켜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태종처럼 냉혹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종이 재위 1년만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이었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체제 강화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한양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자 이러한 중앙집권정책에 크게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이시애는 지방자치 추종자 였다.
한편, 이시애는 함길도민에게는 세조의 뜻을 받들어 중앙의 여러 중신과 결탁한 반신을 정벌해 평정하였다고 속여 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계유정난 이후 호의호식을 하던 한명회, 신숙주등 구공신들에게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 왔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등 권신들을 감금한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왕족 귀성군 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군사 3만명으로 절도사의 근거지인 함흥을 향해 출발하도록 했다.
이들 토벌단은 난 발생 후 7개월만에 어렵사리 난을 진압한다.
세조는 이시애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장수들에게 공신 녹훈을 내리고 조선역사상 유래없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귀성군 준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제수 했다가 곧바로 남이에게 병조판서를 넘기고 다음해 귀성군을 28세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병조판서가 된 남이 또한 귀성군과 같은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서른도 안된 영의정과 병조판서, 조선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으로 보면 28세의 총리와 국방장관이었다. 지금의 북한에서도 있을 수 없는 충격 그 자체 인사였다.
세조는 그만큼 한명회, 신숙주등 권신들에게 신물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귀성군 준이나 남이는 너무 젊었다. 그들이 노회한 권신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더 큰 문제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해서 귀성군이나 남이를 아주 경계했다는 것이다.
예종이 세자시절부터 세조가 그 둘을 너무 총애하는 것을 질투심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래도 귀성군은 젊었지만 신중했고 겸손한 편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훈구파에 가까웠지만, 신진세력 및 사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 권신들과도 두루 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러나 남이는 달랐다. 권신중의 한사람인 권람의 사위이기도 했지만 남다른 패기와 야욕이 있었다.
남이의 패기와 야욕은 너무 넘쳐흘렀다.
나이먹고 노회한 권신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
비극이 시작 되고 있었다.
조선 최대비극인 사대사화의 시작점 이었다.
예종이 조금 깨어난 군주였고 신진세력과 함께 기득권 세력인 세조 권신들에게 대항할 힘을 키웠다면 조선 최대비극인 사대사화는 없었을 것이다.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 386들을 보는 느낌이다.
김대중정권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이 젊은386들과 함께 했지만.....
세상이 바뀌었는 가?
세상을 보는 눈은 보수와 진보의 시각에 따라 다르지만 세상 변화를 바라는 진보의 입장에서 역사는 퇴보 하고 있다.
역사는 또 다시 정반합으로 반복 되고 있을 뿐이다.
이어서 예종2 가 이어집니다.
첫댓글 굿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