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약속/靑石 전성훈
약속(約束), 약속은 지킬수록 향기가 나고 빛이 난다. 누구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사소한 약속일지라도, 그 언약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잘 마무리함으로써 서로에게 뜻깊은 의미가 있다.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하지는 않아도 10년간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멋지고 아름답다. 약속을 지켜온 나에게 누군가 뭐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정말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그래 부담 갖지 말고 한 달만 해보자, 한 달을 해낼 수 있으면 반년을, 가능하다면 1년을 해보자’, 자신감이 없어 두려움과 어찌 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분에 젖었던 자신을 격려하던 그때의 간절했던 마음이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오늘을 맞이하니 감개무량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불현듯 스승님 생각이 떠오른다. 하늘에 계신 스승님이 너무나도 만나 뵙고 싶다. 스승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시며 내 등을 두드려 주실 게 틀림없을 것 같다. 2013년 12월 첫 번째 월요일 오전 9시, 쭈뼛쭈뼛 대는 심정으로 도봉문화원 수필 강의실을 찾았던 날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아는 얼굴이 아무도 없기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강의실 왼쪽 맨 앞줄 책상에 홀로 앉아서 강의를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상당히 마른 모습에 키가 훌쩍 크신 신사분이 수필 수업을 강의하시던 故 최복현 교수님이시다.
스승님과의 초대면은 마음에 아무런 설렘도 없이 그냥 무덤덤하고 싱겁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 국어 선생같이 스승님의 말씀은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수강생들에게 왜 수필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물으시면서,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글을 쓰고 싶거나, 쓰는 이유와 사연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쓰면 글쓴이에게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거나 밝힐 수 없었던 마음속 깊숙이 숨어있는 슬픔과 가슴 아린 쓰라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셨다. 더하여 “ 글의 내용이나 수준은 어찌 되었든 간에 매일 조금씩 생각나는 대로 쓰세요. 써놓은 글을 수정하고 고치면 좋을 글이 될 수 있으니까, 우선은 글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닥치고 쓰라고 몇 번씩이나 강조하셨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 그래 매일 쓸 수는 없으니까 일주일에 한 편의 수필을 써 보자. 매주 글을 써서 다음 주 수업 시간에 공개첨삭이나 개별 첨삭을 받도록 하자.’고 결심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 작업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가고 1년이 되더니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지나갔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스승님의 격려에 힘입어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서, 첫 번째 수필집 [그해 여름의 나팔꽃]을 2017년 봄에, 이어서 2019년 가을에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두 번째 수필집을 냈다. 2020년 봄 코로나19 사태로 수필 수업이 중단되었고, 1년 후 2021년 1월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젊으신 스승님께서 불치의 병으로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다는 비보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공허하고 슬픈 마음을 추슬러 가면서 매주 한 편의 수필을 쓰고, 아울러 시 짓기 작업도 포기하지 않았다. 2019년 조선문학 2월호를 통하여 풋내기 시인으로 등단하여, 2021년 봄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첫 번째 시집을 출간하고, 2022년 가을 자서전 성격의 수필집 [저 언덕 너머에 길이]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글을 써온 인내와 역경과 고난의 터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드디어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기력이 있고 정신이 온전할 때까지 글을 쓰고 싶다. 물론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하여 늘 번민에 사로잡혀 더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수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승님의 첫 수업 때 말씀을 떠올리면서 지금까지 버티고 버텨온 것이다.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