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水鐘寺)
며칠 전, 미국 갤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LA)에 사는 지인이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며칠 지내는 동안 마땅하게 할 일이 없어 답답하다며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에 있는 명승지 수종사를 추천했다. 오랜만에 귀국했기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보다는 조용하고 호젓한 산사가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종사는 고려 태조인 왕건이 상서로운 기운을 좇아 이곳에 이르러 구리종을 얻음으로써 부처님의 혜광으로 고려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길라잡이로 여행길에 동행했다.
운길산(雲吉山)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는 높이 610m의 산으로 구름이 흘러가다가 산꼭대기에 걸려 멈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산 앞으로는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 춘천을 거쳐 흘러 내려온 북한강 물과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영월, 충주를 거쳐 흘러 내려온 남한강 물이 서로 합류한다. 산에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고로쇠나무, 소나무로 울창하며 운길산 중턱에 있는 수종사의 일주문 앞까지 찻길이 닦여 있다. 특히 산 정상에 오르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많은 사람이 즐겨 찾고 있다.
수종사는 운길산(610m)의 절상봉 아래 위치한 사찰로 조계종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시원스레 밝혀줄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저 이런저런 전설만 무성할 뿐이다. 다만 정약용의 <수종사기>에는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고찰인데 절에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져 종소리를 내므로 수종사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조 후기, 사찰에 대해 쓴 책인 <범우고>에는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땅을 파서 샘을 찾고 종을 발견했다 해서 '수종사'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종사는 조선조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많은 것으로 보아 세조 때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 배를 타고 북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두물머리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벽녘에 어디선가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시종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운길산 옛 절터에서 나는 소리라고 대답했더란다. 그래서 종소리를 따라 산을 오르니 커다란 토굴 속에 18나한이 있었으며 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음으로써 물 수(水)자와 쇠북 종(鐘)자를 쓰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수종사로 가는 찻길을 오르다 보면 산허리에 ‘雲吉山水鐘寺(운길산수종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일주문에 들어서서 독경소리를 따라 백여 걸음 산길을 걷다 보면 돌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난다. 불이(不二)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큰 사찰은 입구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불이문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 그러나 수종사는 규모가 크지 않아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불이문이 나타난다.
양쪽 벽면에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을 그려 넣은 불이문을 통과하여 돌계단을 한숨에 뛰어오르면 좁은 경내에 대웅보전과 나한전, 약사전, 응진전, 산신각이 서로 처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실 수종사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라고는 하지만 현존 당우들은 그리 옛 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세조 연간에 중창한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조선 말기에 고종의 하사금으로 또다시 크게 중창하였으나 6.25동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건물들은 모두 1974년 이후에 신축한 것이라고 하니 이로써 전쟁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겠다.
수종사 대웅전 옆에 자리하고 있는 팔각오층석탑(보물 1808호)은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절의 중창시기인 조선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사찰 동쪽의 능선 위에 있던 것을 195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탑을 해체할 때 탑신에서 금동불감과 금동불보살상 등 18점의 유물이 발견되어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탑은 연꽃무늬의 기단부 위에 5층 탑신을 쌓은 뒤 옥계석과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세운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월정사 구층석탑과 같이 몸돌과 지붕돌이 팔각을 이루고 있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또한 수종사에 있는 주요 문화재로는 정혜옹주사리탑이 있다. 정혜옹주는 태종의 딸로 세종의 아들인 금성대군이 1439년에 정혜옹주를 위해 세웠다는 명문이 사리탑 옥개석 낙수면에 남아있다. 사리탑은 총 높이 2.3m로, 형태는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여 2단을 이루는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이 사리탑에 봉안되었던 사리장엄구(보물 259호)는 탑을 건립할 당시 봉안되었던 것으로 193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청자유개호와 금동제구층탑, 은제도금육각감, 수정사리병 등이 발견되었으며, 유물들은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대웅보전에서 오른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해탈문(解脫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산비탈 아래 어른 네댓 명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쌀 수 있는 나이 540년이 되는 우람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들은 세조가 수종사를 중창할 때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두 그루 모두 용문사 은행나무보다는 나이나 키의 높이가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넓게 뻗어 무척 듬직한 인상을 준다. 가을이 되면 멀리 두물머리에서도 잎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보인다니 수종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수종사 삼정헌(三鼎軒) 곁에는 '묵언(默言)'이라 쓴 팻말이 있으니, 경내에서는 입을 다물고 멀리 보이는 두물머리 경치를 감상하라는 뜻이겠다. 이곳에서 허리 굽히니 발아래 멀리 펼쳐지는 북한강과 양수리, 팔당호 주변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 그래서 두물머리 풍광이 옛날 시인 묵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음 이덕형은 초여름에 수종사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의 시를 지었다. ’산들바람 불고 옅은 구름비는 개었건만/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네/ 구십일의 봄날을 시름 속에 보내며/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나‘
조선 전기 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를 다녀간 뒤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격찬했으며,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다. 또한 다선(茶仙 )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과 함께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수종사에는 삼정헌이라는 다실이 있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 밖에도 수종사에는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전통 양식의 삼층석탑이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수종사가 유적과 더불어 주위 환경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명승’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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