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4년 제 11호(Vol. 11, 2024년 11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게 발등의 불로 등장한 연금 개혁을 푸틴 정부는 어떻게 다뤄왔는지 다각도로 분석했다. 이정민씨(박사, 러시아CIS 사회문화 전공)가 쓴 '푸틴 정부는 소비예트코끼리 옮기기에 성공했는가'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aa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러시아 연금제도의 역사
연금 개혁은 이해 당사자가 많고 규모가 크며 움직이기 어려워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한다. 후발 산업 국가인 러시아는 연금 제도의 역사가 1901년 국가 소유 광업 부문을 중심으로 사회보장 제도를 제한적으로 적용했던 재정 러시아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공산혁명 이후 소비예트 정부는 처음으로 노령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전 인민연금 시대(1964년)를 열었다.
그렇다면 1991년 시장 민주주의로 체제 전환을 한 이후 러시아는 80여 년간 이어온 육중한 소비예트 코끼리를 옮기는 데 성공했을까?
◇푸틴 시대의 신연금 제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신 러시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연금 제도를 포함해 급진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1991년에 러시아 연금공단을 신설했고, 1992년과 1998년에는 연금 개혁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옐친 정부의 무능과 경제 파탄, 정치 혼란으로 연금 개혁은 무산됐다. 옐친을 이어 2000년, 크렘린의 권좌에 오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집권 초기임에도 큰 반발 없이 2002년에 다층 구조 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연금 구조를 기존 부과 방식과 신규 적립 방식을 혼합한 3층 구조, 즉 기초연금, 명목확장기여 연금, 개인 계정으로 재편했다.
신연금 제도가 안착한 이유는 2000년 푸틴 집권 이후 고도 성장과 정치 안정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 유가 고공행진에 힘입어 러시아 경제가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섰고, 체첸 전쟁 승리와 정정 불안을 잠재운 권력 수직화로 푸틴의 인기는 하늘 높을 줄 몰랐다.
2001년에는 정당법 개정을 통해 국가두마(하원)에서 푸틴을 지지하는 정당(집권 여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강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러시아 대중은 새로 도입하는 다층 구조 연금 제도 자체를 잘 몰랐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푸틴을 믿고 연금 개혁을 기대했었다. 2004년 재임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높은 득표율에 고무되어 2005년에 소비예트 현금 유산을 정리하고자 했다. 현물 급여(서비스)를 현금화하는 개혁과 연금 수급 연령을 인상하는 개혁을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푸틴 정부가 추진한 연금 개혁은 예기치 않은 저항에 부딪혔다. 푸틴 정부가 2002년에 도입한 다층구조연금 제도는 국민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중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됐고, 소비예트 유산 개혁은 여론의 반발로 동력을 잃어갔다. 푸틴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현물급여 개혁은 취소(현물급여와 현금급여 병행)하기로 했으며, 연금 수급 연연 상향도 초래했다.
◇푸틴의 지지율 갈아먹는 연금 수급 연령 확대
러시아의 연금 수급 연령 확대는 소비예트 시기부터 꾸준하게 제기된 핫이슈였다. 소비예트 시기에 대중은 연금 수급 연령의 축소를 지속해서 요구했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력 확보를 명분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소비예트 연금 유산 정리에 실패한 푸틴은 2005년 재임 중 연금 수급 연령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언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푸틴은 2018년 전 국민의 시선이 러시아에서 개최한 축구 월드컵 개막식에 쏠려 있을 때, 메드베데프 총리를 내세워 남성의 연금 수령 연령을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의 연금 수급 연령을 55세에서 63세로 늘리는 연금 개혁안을 전격 발표했다.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는 하원에서 법안을 신속 처리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자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광장에 대거 집결했다. (반푸틴 활동가인) 나발니와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등 야권의 정치·사회 지도자가 대규모 대중 시위를 주도했고, 푸틴 정부는 시위단을 체포, 구금하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민심을 격노시킨 연금 개혁은 '21세기 차르'의 위상마저 흔들었다. 연금 개혁의 역풍에 놀란 푸틴은 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메드베데프 총리가 기대 수명의 증가를 명목으로 연금 수급 연령 확대를 주도했고, 상원 의장이 이를 결정했다며 자신을 향한 비난을 피해 나갔다. 푸틴은 TV 생방송으로 진행한 '국민과의 대화'에서 여성의 연금 수급 연령을 당초 63세에서 60세로 낮추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문제 해결사 역할을 부각하는 전략을 꾀했다.
러시아 정부는 연금 수급의 연령 확대가 시급한 이유로 러시아 국민의 기대수명 증가를 내세웠다. 이 주장이 일면 타당성을 갖지만 서구의 대러 제재에 따른 경제 상황 악화와 돈바스(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전쟁 지원비 증가로 연금 재정 부족이 더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연금 개혁은 정권의 지지도로 추락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폭탄'이다. 러시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연금 수급 연령의 인상으로 70%가 넘던 푸틴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2019년 한때 59%까지 떨어졌다.
푸틴은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추락한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모종의 전기가 필요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개시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실제로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국민이 갖고 있는 연금 개혁 불만을 외부로 돌리며 지지를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계기로 '강한 러시아'를 내세워 국민 단합을 이끌어냄으로써 그의 지지도가 다시 급상승했고, 이를 토대로 2024년 3월에 종신 집권을 위한 대선에 승리할 수 있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연금 개혁
푸틴이 단행한 연금 개혁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러시아 대중의 반발 역시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연금 수급자의 불만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지만, 언제든지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복석 내관이라고 할 수 있다.
푸틴이 제왕적 통치를 하고 있음에도 연금 수급자에게는 생존이 걸린 연금 개혁은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권위주의 통치 방식과 카리스마를 지닌 푸틴 정부도 소비예트 시기에 국가와 국민 간에 맺은 암묵적인 사회적 협약인 육중한 '소비예트 코끼리'를 옮기는 데 도전과 실패를 반복했다. 그만큼 러시아 역시 연금 개혁이 어려운 정책 과제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