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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묵상글 들 (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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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오늘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얘기와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들려주고 미카 예언서는 뿌리에 대한 얘기를 줍니다.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성모님의 탄생 축일에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면 성모님의 축일에 정작 성모님 탄생 얘기는 들려주지 않는 것이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성모닌 탄생 얘기 대신 예수님의 탄생 얘기를 들려준 것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의 탄생은 아들의 탄생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런 거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여성주의자들 중에 어떤 분은 여자가
애를 낳기 위한 존재냐고, 그것이 여자의 존재 의미일 뿐이냐고
반박할 것이고, 저도 엄마가 돼야지만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전례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축일을 지내지도 않고, 더더욱 거창하게 축일로 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엄마가 될지, 엄마가 아니라 그저 한 여성으로서 경력 여성이 될지.
저도 선택의 권한이 여성에게 있고,
그래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보다는 한 여성으로서 멋지게 살고,
한 아이보다는 많은 이를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요즘 아이를 낳고 쓰레기 통에 버리거나
낳고는 학대하는 엄마가 아니라 훌륭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이고 또 마땅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간에게 그리고 마리아게 엄마의 선택권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으며
그래서 오늘 미카서는 그 뿌리가 아주 오래 전의 옛날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엄마가 되는 것은 선택권이 마리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오래 전 그러니까 천지창조 이전에 정해진 거라는 얘기이고,
잘 아시듯 성모 마리아께 대한 모든 교리는 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이에 성모님의 몫은 '예스', 곧 순종입니다.
정해진 것을 거부하지 않고 '예스'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예스'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달을 받고 난 뒤
"Fiat mihi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할 때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고,
아니,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스' 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아들 예수가 태어날 때 "예스"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태어날 때 이미 "예스"한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 성소이고,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살겠다는 것이 성소를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임을 이 축일에 다시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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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기홍보(Pr)시대
현대를 자기피알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를 바라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은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1,19).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동은 마리아를 위하는 배려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러운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름에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가1,45). 마침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시며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모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로 인도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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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성모성탄축일”인 오늘은 저희 “몬떼 올리베또의 성 마리아 연합회”(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보 축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대축일로 지냅니다.
성모성탄 전승은 2세기 말경의 위경인 <야고보의 원복음서>에 근거한 것으로,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 축성일(9월 8일)에 지켜졌는데, 동방교회에서 시작하여 서방교회로 전해졌습니다. 로마교회에는 7세기 말부터 경축하게 되었고, 전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게 된 것은 11세기 때부터였습니다. 13세기부터는 이 축일이 8부까지 지내는 큰 축일로 변했으나 교종 비오 10세의 전례개혁에 따라 보통 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로부터 열 달을 거슬러 올라가는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성모성탄축일”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다윗자손으로 메시아이심을 전해줍니다. 동시에 마리아께서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하느님의 특별한 간택을 받으신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다.’(요한 1,16 참조)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인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와 함께 우리 자신들도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카 1,47-48).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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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열 달 전에 지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과 짝을 이루는 마리아 축일입니다. 성경에는 마리아 탄생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오늘 복음은 예수 탄생 보도와 함께 수록된 조상들의 족보입니다. 태어날 때에 마리아께서 입으신 하느님의 은총을 예수 탄생 사건 때에도 입으셨음을 상기시키느라고 예수님의 족보가 나왔습니다. 그 은총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동정녀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전무후무한 신비 사건을 기록하기에 앞서서 예수님의 조상 중에서도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개입하신 사례를 네 가지나 소개했습니다.
- 페레츠와 제라를 낳은 타마르는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습니다.
- 보아즈를 낳은 라합은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가나안 성읍에서 정찰대원들을 숨겨 주고 보호해 준 공로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경우입니다.
- 룻도 모압 여인이었는데 그가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을 잘 따랐기에 받아들여졌습니다.
- 솔로몬은 낳은 밧세바는 다윗의 부하인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야곱은 자신의 열두 아들 중에서 넷째였던 유다의 지파에서 구세주가 나오리라고 축복성 예언을 했는데, 이것이 실현되지 못해서 대가 끊어질 수도 있는 위기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도 자신들에게 뜻밖의 손길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자 처음에는 당황하였지만 천사의 전갈을 전해 듣고는 마음을 돌려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인생사에 있어서나 세상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흐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변함없는 의지로 우리에게 개입하셔서 당신의 일을 완성하십니다. 세상과 인생의 대세는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한결같은 계시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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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11개 직업군의 최근 10년간의 평균수명을 어느 기관에서 조사했습니다. 평균수명이 가장 낮은 직업군은 연예인, 체육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높은 직업군은 어떻게 될까요? ‘종교인’이었습니다. 10년 전쯤에도 비슷한 조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역시 종교인이 압도적인 1위를 했습니다.
종교인이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종교인이 믿는 신이 보살펴주는 것일까요? 그것보다 더 큰 진실은 영적인 이상을 추구하다 보니 세상의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만큼 적어서라고 합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세상의 것에 집착하면서 세속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에 힘이 있음을 평균수명이 낮은 직업군이 연예인과 체육인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세상 안에서 보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한 삶에서는 진정한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영적인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가치 안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세상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의 모습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아직 혼인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기에 복음에 나오듯이 요셉 성인께서는 파혼하기로 작정도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천사가 개입해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잉태된 아기가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해줍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모두가 세상의 규칙에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믿음과 사랑입니다.
성모님께서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 잉태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요셉 성인께서 사랑이 없었다면, 파혼하고 성모님께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구원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성모님을 사랑하셨기에, 꿈에서 받은 계시를 그대로 따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영적 육적 건강은 물론이고,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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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신을 비웃어라. 다른 사람이 당신을 비웃기 전에(엘사 맥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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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도미니크 보비를 아십니까?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장 도미니크 보비를 아십니까? 그가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으로 있던 1995년, 운전 중에 뇌출혈로 쓰러져 락트-인 증후군(locked-in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전신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 밖에 없었습니다. 이 왼쪽 눈꺼풀로 이십만 번 이상 눈을 깜박여 15개월에 걸쳐 쓴 책이 그의 회고록인 ‘잠수종과 나비’입니다. 얼마나 여기에 집중했는지 책을 출판한 지 8일 후 심장마비와 폐렴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십만 번의 눈깜빡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할 정도로 느릴까요? 그러나 이 느림이 세상에 하나의 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느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통해 커다란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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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사연이 있습니다. 특히 오래 전에 이민 오신 분들의 이야기는 감동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은 청지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려서 아일랜드 신부님께 영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유학을 간 적도 없고,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심부름을 다니면서 배운 영어였습니다. 70년대 말에 사우디로 일하러 갔다고 합니다. 건설현장의 통역으로 갔다고 합니다. 건설현장의 용어를 잘 몰랐고, 전문적인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3개월 만에 해고될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조기귀국하면 가족들의 생계도 막막하고,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인 감독관에게 술을 한 병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술을 먹으면서 사정을 이야기하였고, 잘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감독관은 한국에서 회장과 간부들이 왔을 때 형제님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 보다 일을 잘 하니 이곳에서 같이 일 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감독관의 부탁을 들은 회장님은 간부들에게 그 사람이 계속 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형제님이 사우디에서 일을 마칠 무렵에 감독관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과 미국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감독관은 형제님이 미국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형제님은 미국에 와서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35년 동안 같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집 주인은 더 좋은 조건으로 가게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형제님에게 35년 동안 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명절에는 주인에게 작은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날에는 부인에게 꽃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이기에 더 좋은 조건으로 가게를 얻으려는 사람이 나타나도 형제님이 일 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민자의 사회에서, 낯선 미국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였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일을 하는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앙은 일의 결과와 성과를 보기 전에 마음과 정성을 먼저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모님은 시천주(侍天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태중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양천주(養天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기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신앙인으로서도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 우리는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에게 선물하곤 합니다. 선물은 주는 분이나, 받는 분이나 모두 즐거운 법입니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기도, 우리들의 선행, 우리들의 나눔을 성모님께서는 생일 선물로 받고 싶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을 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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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믿는 이들의 영적靈的 족보族譜
- 뿌리 살이 없이는 꽃도 없다 -
“복되신 마리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하세.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네.”
입당송이 참 마음 상쾌하게 합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님 보다 부지런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86세 고령에 날마다 한결같이 노력하시는 늘 새로운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뉴스가 교황님 홈페이지를 장식합니다. 두 기사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과 교회일치의 지도자들;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돌봄은 실천을 요구한다’, ‘교황은 피난민들과 집없는 이들에게 가까이 있음을 표현하다. 피난민들을 위한 교황의 환영과 경청과 이해에 감격한 이의 고백’; “교황의 현존은 미래를 직면하는데 우리들에게 얼마나 새로운 희망을 주는지 모른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현존 자체가 이웃에겐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동정 마리아는 물론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우리들에게는 늘 새로운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희망의 현존!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이미 9개월 전, 이날 작년 12월8일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참 기쁜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물론 성모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교회는 성모님이 수태되는 순간은 물론 전생애 동안 죄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믿어왔습니다.
교회는 마리아의 부모님께 요아킴과 안나라는 이름을 주었고 7월26일에 양친의 축일을 지냅니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과 서방의 로마에서는 이미 6-7세기부터 성모님의 축일을 성대히 지내왔으며, 서방에서는 1955년 교황 비오 12세 때, 8부 축일에서 오늘처럼 단순한 축일로 축소되어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교회가 마리아 성모님 탄생을 중요시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 보면 모두가 굽이굽이 하느님 섭리의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성경역사든 교회역사든 수도회역사든 개인역사등 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우리의 영적 시야를 날로 확장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시작으로 예수님의 족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지금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뿌리처럼 생각됩니다. 면면히 계승되어온 예수님의 족보에서 하느님의 한없는 인내와 기다림, 겸손과 섬세한 사랑의 섭리를 배웁니다. 바로 이 뿌리에서 꽃처럼 폈다졌던 수많은 사람들이요 지금도 계속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구약의 족보에서 특히 주목되는 네분의 여인들입니다. 참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의 섬세함이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은 어느 하나 쓸모 없다 버리지 않으시고 다 섭리의 도구로 쓰십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원주민이요 룻은 모압 출신이고 솔로몬의 어머니이자 다윗의 아내인 바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네 여인의 공통점은 정상적 부부관계가 아니라 매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심모원려深謀遠慮의 하느님은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구원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는 신약의 동정녀 마리아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하느님의 한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남자들이 족보의 주인공이었는데 마리아에게서 여자 마리아로 주인공이 바뀝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런 마리아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냅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예수님 족보의 뿌리에서, 마리아의 뿌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꽃으로, 파스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난 예수님입니다. 문득 오래 전에 써놨던 ‘뿌리 없이는 꽃도 없다’란 시를 읽으며 마리아 성모님을, 또 평생을 뿌리로 사셨던 제 육친의 신 마리아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뿌리 살이 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 까지
끝없이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 살이 고달플 때
꽃사랑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 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 살이 없이는 꽃도 없다.”-1999.1.2.
예수님 족보의 뿌리에서, 마리아 성모님의 뿌리에서 온 인류의 희망의 꽃으로 피어남을 상징하는 예수님 탄생입니다. 성모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오버랩되는 느낌입니다. 오늘 따라 배경의 뿌리인 마리아 성모님이 참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통해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임마누엘 예수님 탄생하시니 바로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뿐 아니라 이미 예언자 미카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너희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미카 예언자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어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 고백합니다. 하느님 덕분에, 한결같은 뿌리살이에 충실하셨던 성모 마리아님 덕분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시고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 탄생을 경축하며 우리의 영적 족보를, 영적 뿌리를 새롭게 환기하며 주님 안에 우리의 영적 뿌리를 깊이 내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께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며 당신의 평화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복음 환호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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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구원사적 일치를 보여 주십니다.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전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근거가 되어 아기 예수님 출생 당시 베들레헴의 어린 사내아이들이 살해당한 비극이 일어났지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시리라."(미카 5,2)
모든 인간의 탄생이 그러하듯 메시아 역시 한 여인의 잉태와 산고를 통해 이 세상에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세상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복음사가는 먼저 베들레헴의 다윗 가문 족보를 보여 줍니다. 일찌기 주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울 대신 새로이 임금이 될 다윗을 소개하실 때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1사무 16,1) 하신 바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마태 1,16)
그 족보는 마리아의 남편이 될 목수 요셉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마리아는 그와 약혼했던 나자렛의 처녀였지요.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살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관습적으로 몹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지만, 천사를 보내신 주님의 개입으로 메시아를 낳게 될 구약 예언 속 여인의 소명을 완수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복음사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그 어머니 마리아 역시 메시아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신 "동정녀"이심을 확증합니다.
말씀은 이렇듯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옛 계약의 내용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으로 완성됨을 보여 주십니다. 이 구원 계획 안에서 마리아는 지혜와 용기, 순명으로 구원자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한 탁월한 구원의 도구요 협력자이십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는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여성 신자뿐 아니라 남성 신자들까지 모두) 각자 안에서 이 고귀하고 거룩한 "모성"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마리아께서 육화하신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기르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과 영으로 말씀을 잉태하여 이 세상에 낳아 기르는 모성을 살아가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말씀께서 머무르시도록 우리 마음과 영혼의 순결한 태를 간직하고, 해산의 고통을 인내하며, 이 세상에서 말씀이 걷는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을 묵묵히 동반하는 것이 바로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끝까지 지켜내신 모성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기도로 동반해 주시는 성모님께 의탁하여 거룩한 모성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 세상에 말씀을 품는 태가 많아질수록 임마누엘 주님의 현존이 온 누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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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을 낳으신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을 기억하면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했고, 서방교회인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입니다.(매일미사책 54쪽)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도 지니시고 인성도 지니신 분,
곧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예수님께서 어떤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낳으실 어머니의 태가 필요했고,
그렇게 선택된 존재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복음환호송)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의 어머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성모 어머니는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연결시켜주는 '중재자'요 '전구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성모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회개'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낳으신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돌아갈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순교의 한 모습인 회개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성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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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성모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한 여인에게 태어날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은 기다림의 정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언급한 여인이 성모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오랜 계획(로마 8,28-29 참조) 안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위로이시며 피난처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을 실현하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우리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전구하시는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탄생은 소중합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 모두 저마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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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 즉 창세기의 원복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이다. 마태오는 복음을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족보는 우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네 여인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즉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둘째,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여기서 예수의 출생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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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마음을
따뜻하게
밝히는
마리아의
새로운
탄생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은총의
탄생이다.
탄생은
하느님을
닮아 있다.
탄생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이다.
이와같이
탄생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탄생은
신비이다.
깊어지는
사랑의
신비이다.
가파른 삶의
오르막도
오르게 하는
사랑의 놀라운
힘이다.
동정 마리아의
탄생은 하느님
사랑의 힘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느님 사랑은
영원하다.
가장 좋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매순간이
탄생이고
매순간이
사랑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랑에
맡길 때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으로
살아있는 희망을
보게되었다.
탄생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넘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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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임마누엘이신 분의 어머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성경에 성모 마리아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서
예수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 미사의 복음 말씀으로
읽고 있는데, 그래도 신학적으로는 성모 마리아 탄생과 예수님 탄생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일이고, 사실상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복음 말씀으로 읽고 묵상해도 상관없습니다.
메시아 강생은(예수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하느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탄생은 메시아 강생에 포함되어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라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짓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이
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떨어져 계셨는가?
하느님은 인간들에게서 떠나신 적이 없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인간들과 함께 계시는 분인데, 인간들이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는 인간들을 회개시켜서
하느님에게로 다시 데려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임마누엘이신 분의 어머니’로서, 또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분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처음에 성모 마리아를 찾아왔을 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인사했습니다(루카 1,28).
이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 쪽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인생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이고,
구원 사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 2,10).”
피조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은 없고,
우연히 태어난 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존재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선택과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만일에 자기 자신을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생긴 존재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하찮은 존재라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구원할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너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나에게는 나쁜 것만 주었다.” 라는 식으로......)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0-21)”
인간은 하느님의 ‘깊은 뜻’을 모릅니다.
그 뜻을 모르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똑같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귀한 데 쓰는 그릇’이라는 말과 ‘천한 데 쓰는 그릇’이라는 말은,
그릇의 ‘용도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탈렌트에는 많거나 적은 차이도 없고, 귀하고 천한 차이도 없습니다.
따라서 직책과 직분이 다르다고 해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또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불공평하게 보이는 일들이 많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받아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남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거나,
억울해 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남보다 더 좋게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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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상에서 복된 삶을 사는 길
구원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종교인들처럼 신앙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수도축성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과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란 그만큼의 땀을 흘리고 공을 들이고 자신을 내어주고 견디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모님을 본받아 일상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본다.
오늘 복음은 서두에서 긴 예수 탄생에 이르는 긴 족보를 열거한다. 곧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지속되어온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어 ‘함께 하시는 하느님’(1,23; 28,20) 그분이 구세사에 들어오심,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하심, 죄를 사해주심, 함께 하심을 함축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핵심적으로 제시해준다. 여기서 동정녀의 잉태는 사실 부차적인 이야기로 나온다.
성모님은 시골 마을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다. 누가 보아도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보잘것없는 탄생은 인류사를 바꿔 놓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시작이었다. 이처럼 보잘것없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는 영의 안목을 길러야 하겠다.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기쁨의 서곡이며 온 세상의 희망의 서광이 된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 곧 하느님의 축복과 생명, 기쁨과 희망의 손길이 뻗쳐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평화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시게 되었다.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강생은 온갖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치유로 드러나는 사랑의 신비 자체이다.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삶이 예수님을 잉태하신 분으로 ‘복되게’ 사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천사로부터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간적인 고통이 따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이 복되신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깊이 되새기심으로써 ‘말씀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의 경청과 수용, 말씀의 실행이 복된 삶으로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품어 잉태한다는 것은 성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다. 그분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말없는 가운데, 철저히’ 따르시면서 전 생애를 온전히 되돌려 드리고 헌신하셨다. 동정 마리아는 침묵 가운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분의 사랑으로 모두를 품을 줄 알았다. 그분은 이 사랑의 여정을 항구히 걸으셨기에 복되시다.
우리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사소한 일상사나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담겨 있는 구원의 표지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성모님처럼 말씀에 귀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잉태하는 ‘품음과 헤아림의 영성’을 실천하자.
성모님처럼 착하고 거룩한 표양, 사랑의 견딤을 통해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도록 하자. 성모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하실 임마누엘’을 잉태하시어 우리에게 낳아주셨듯이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내 마음에 하느님의 선과 사랑, 진리와 정의를 품고 이 길을 겸허히 걸어갈 때 기쁨과 행복이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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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2020년 9월 8일
초대교회부터 성모신심이 깊었습니다.
7세기부터 지내온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전례는 요셉과 마리아를 정점으로 하는 예수님의 계보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끝 부분을 이렇게 전하며 이 계보의 목적이 ‘마리아’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기원전 732년 호전적인 아시리아 제국은 유다의 요청으로 북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차례로 팔레스티나 영토을 공격하고 결국 유다도 그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결국 북부 이스라엘 사마리아가 기원 전 722년 이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유다 왕 히즈키야 시절에 아시리아가 정권을 교체하는 틈을 이용해서 반 아시리아 정책을 펼치지만 아시리아 왕 산 헤립은 유다의 영토를 위협하고 국론은 혼란에 휩싸입니다.
이렇게 국내외의 긴박한 와중에 유대 모레셋 사람 미카는 하느님으로 예언자로 불림을 받고 활동을 합니다.
모두 7장으로 되어 있는 이 예언서는 하느님의 심판의 날과 장차 펼쳐질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제로 한 예언이 펼쳐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사제들, 예언자들의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회적 불의를 또한 고발합니다.
“모레셋 출신 미카가 유대 임금 히즈키야 시대에 예언하였다”(예레 26,18)라고 증언할 정도로 예레미야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의 활동이 유다의 히즈키야의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미카 예언서는 예언 중에 다음과 같음 말씀을 전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베틀레헴이면 이스라엘 다윗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다고 전합니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 오리라는 예언의 말씀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별빛을 따라 예루살렘을 찾은 동방에서 세 박사는 헤로데에게 장차 유다의 왕이 태어날 곳을 물어 봅니다.
그때에 왕은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장차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알아보도록 합니다.
그들이 미카 에언서를 인용하여 대답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마태 2,5-6)
마태오는 그의 복음 시작에서 유대식의 가족 계보가 남자 이름들로 이어서 내려오다가 예수님께 와서는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해서 여성인 마리아를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대신 ‘마리아에게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계보를 아브라함-다윗, 다윗-바빌론 유배, 바빌론 유배-그리스도까지 14대를 세 번 나누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보를 더 살펴 보면, 첫 번째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는 성경의 역사와 일치하는데,
두 번째, 다윗에서 요시아까지의 순서에서 빠진 이름들이 있습니다.
다윗을 다시 꼽고, 두 번째에는 여호람 다음에 아하즈야(2열왕 8,25), 요아스(2열왕 12,1), 아마츠야(2열왕 14,1)가 빠지고 우찌야로 넘어갑니다.
그러다가 요시아 다음으로 여호아하즈(2열왕23,31), 여호야킴(왕하23,34)이 야호야킨으로 넘어가고 다시 치드키야(2열왕 24,17)가 빠지고 스알티엘로 넘어갑니다.
마태오 저자가 잘못 꼽았을까요? 그러나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 마태오가 틀릴 리는 없겠지요.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기 명단에서 빠진 여섯 명의 왕들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아하즈야는 유다의 가문이면서도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임금의 손녀이다보니 이스라엘의 악한 아합 집안의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어 처음에는 옳은 길로 가다가 이교도의 산당에서 제물과 향을 피우면서 정작 주님의 집이 망가졌는데도 그의 사제들이 들어오는 헌금들을 착복하고 방치해 두었던 잘못을 저지릅니다.
아마츠야도 이방인 신을 섬기는 산당에서 여전히 제물과 향을 피웠던 잘못을 저지르지요.
여호아하즈는 석달 동안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임금 노릇을 하였는데 그도 조상들의 잘못을 따르다가 파라오 느코에 의해서 해임됩니다.
파라오 느코에 의해서 왕이 된 여호야킴도 조상들의 잘못된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방인의 신으로 흐르지 않고 정통 하느님 신앙 안에서의 인물만으로 추려서 계보를 그의 신앙에 맞추어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14라는 숫자를 세 번이나 번복하며 저자는 이 계보를 소개하는 것일까요?
우선 14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 7을 배로 한 것으로 완전에서 완전하게 하느님께서 섭리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물 흐르듯 우연한 역사인 것 같고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거론하고 싶지 않은 이방인 여인들, 유다의 며느리 타마르, 창녀 라합, 룻의 인물들은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계보에서 다만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만 동정녀이며 정숙한 정통 유대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여인들 속에서 선택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칭호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다윗의 후손’이 붙습니다.
이 계보에서도 다윗이 중심이며 틀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 번이나 겹칠 정도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유다 가문이면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서 다윗(David)이라는 이름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서 4(ד)+6(ו)+4(ד)을 합쳐 14라는 숫자가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자렛이라는 시골의 한 처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약혼자 요셉에게도 약혼녀의 갑작스런 임신은 큰 고통과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20,20-21)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약혼자와 약혼녀는 혼란과 고통스러움을 겼지만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그들의 믿음이 이 모두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예언자가 예언했듯이 그리스도를 낳으십니다.
오늘 교회는 성모님의 크신 자리를 기념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족보를 보다보면 지금의 윤리적 판단로서는 이름을 대기가 꺼려지는 타마르(창세 38장), 라합(여호 2장)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자랑스런 다윗 가문의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사이의 부끄런운 이야기의 주인과 타마르, 적과 같은 모압 출신의 룻(룻기 4장), 그리고 다윗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우리야의 아내(2사무 11장)를 보아도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는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혼인 전의 이야기도 사실 그렇습니다.
약혼사실을 파기하는 마리아도 오해를 살만합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여인, 배신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여인으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기까지의 아브라함에서 마탄과 요셉에 이르기까지 얽히고설킨 인간의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오늘은 성모님 탄생축일입니다.
옛날 어머니들과 얽힌 '생선 대가리'가 생각납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하고 철이 들 때까지 생선 대가리가 정말 맛이 있는 줄 알았지요.
좋은 생선은 가시를 발려서라도 자식들에게 먹이고 어머니 당신은 먹을 것이 없는 대가리를 모르고 자라납니다.
그런 어머니께 투정하고 뭐 안 해준다고 칭얼대며 때로는 울어 제끼기까지 합니다. 어머니 속을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새까맣게 그을렸을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 탄생의 전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리아의 역할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어머니는 아드님이 중심인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축제관습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하룻길에 아들이 보이지 않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찾다가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함께 있는 아들을 발견합니다.
성모님은 아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던 심정으로 말합니다. 루카는 성전에서 아들을 찾아내고 기쁘면서도 애타는 어머니의 심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마르코는 공생활을 하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전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식에 친척들이 그를 나섰고(마르 3,21), 성모님은 아들을 찾아갑니다.
(마르 3,31) 아들을 따르던 여인들과 함께 어머니는 십자가 아래에 있습니다.(요한 19,25)
오늘 복음이 비천한 사람들의 이야기, 오해의 아픈 이야기까지 구원의 이야기에 소중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노래하신 한 대목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시고'를 우리 삶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은 자리, 잊혀지는 자리, 언젠가는 나의 자리까지 없어지는 미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되겠지요.
가장 소중한 자식들에게 이웃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잊혀진다 해도 어머니는 상관없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축일을 맞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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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여러 축일들 가운데 탄생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던 당시 딸이다 보니 많이 두분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지만, 즉시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 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자렛 마리아에게 전해진 특별한 소식,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소식은 마리아 개인에게 있어 너무나 영광스럽고 황송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두렵고 부담스런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초대에 응답함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내려놓음으로 인해 완전한 시온의 딸, 하느님의 딸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성모님의 충만하고 역동적인 신앙을 명문장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자신과 자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데서 참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진리만을 알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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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무소의 뿔과 같으신 분>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지상 탄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도우셨기 때문에 구원의 또 다른 협력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족보로 시작하며 성모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이 처음부터 계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족보 안에 들려면 그에 합당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큰일을 한 사람일까요?
『숫타니파타』라는 불교 경전에서는 깨달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렇게 깨달은 분은 우리 주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가 자신이 본 죽음 중에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본 그가 어떤 죽음을 가장 특별하고 위대하다고 보았을까요?
그는 폐암 말기 어머니를 돌보던 딸의 편지를 인용합니다.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고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이제는 많이 다잡으셨어요. 선생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희 정말 열심히 치료받겠습니다. 우리 엄마 꼭 낫게 해주세요.”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태라 생명 연장 수단으로 항암치료를 받자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말할 때 수많은 반응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편지 속의 ‘우리 엄마’는 3주에 한 번씩 항암을 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싫은 기색도 없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마지막을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딸의 아파트 옆으로 이사와 손주들을 돌봐주고 손주들과 놀아주고 맞벌이하는 딸 가족을 위해 밑반찬도 해주고 주말엔 김밥을 싸서 북한산 등산을 하고 하산 길에 사우나에 들르는 등 다른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일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길어야 1년이고 매우 고통스럽다는 폐암 말기였는데도 어머니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일상을 사셨던 것입니다. 딸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엄마는 치료 의지가 매우 강해서 힘든 내색 안 하고 열심히 잘 치료받고 계세요. 일상생활도 아주 많이 잘하고 계시고요. 다른 분들도 잘 견디시는 건가요? 힘든데 저희 때문에 내색 안 하고 혼자서 참고 있으신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그렇게 암은 머리까지 전이되었고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방사선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좋지 못하네요….”라고 말하면 환자들은 수많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이렇게 애썼는데 미안해요.”
할머니는 오히려 말하기 주저하는 의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 자기 탓으로 모든 것을 돌렸습니다.
그때 의사는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항암제를 몇 번 바꿔야 하는 적도 있었는데 그런 때도 할머니는 화를 내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서도 할머니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자기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평온했고 담담했습니다.
한 가지 손주들이 자신 없이도 잘 클 수 있을까가 걱정이지만 어차피 한 번 겪어야 하는 일이니 자녀들도 씩씩하게 잘 헤쳐나갈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담배도 피운 적 없는 할머니는 폐암에 걸려 딸 옆에 살며 1년 동안 남과 다를 게 없는 일상을 사시다 할머니는 그렇게 평온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김범석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합니다.
“할머니가 실제로 돈이 많았는지 대학은 나왔는지 그런 것들은 알지 못한다. 짐작하건대 가방 끈이 길지도 않았던 것 같고 넘치게 부유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위인도 아니고 언론에서 칭송받을 만한 이력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누군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지켜본 그 노년의 환자는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분이었다. (중략)
할머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특별했고 보통 사람이지만 위대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성인은 큰 업적을 낸 인물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집착 없이 순리에 따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리니 두려움도 없고 집착도 없고 모든 것에 ‘순응’(아멘!)합니다.
진정 할머니는 암이라는 사형 선고에 놀라지 않았고, 세상 집착에 걸리지 않았으며, 분노와 원망을 하며 진흙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 죽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모님은 그렇지 않을까요? 성모님도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사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건 자신을 위협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리며 설득하지 않습니다.
또 성모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분이십니다. 거침이 없으십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듣고는 늙은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갖느냐고 했지만 성모님은 당신은 주님의 종이니까 그냥 말씀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거침도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성모님은 골고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십니다.
성모님이 그렇게 두려움도, 거침도 없는 분이신 이유는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지만 그 더러움이 연꽃에 물들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안나와 요아킴은 성모님이 어렸을 때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맡겨진 사람은 죄에 물들지 않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을 죄에 물들게 만들 수 있는 유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달리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는” 성모님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른 이들과 친교를 맺지 않고 독단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봉헌되고 자아가 죽어 두려움도 없고 거칠 것도 없고 죄도 짓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치 코뿔소로 상징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주님 뜻대로 달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코뿔소의 ‘외뿔’은 코뿔소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뿔처럼 ‘코뿔소의 도구’가 되려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이런저런 상황에 좌절하며 세상 죄에 물든 사람은 누구도 코뿔소의 외뿔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코뿔소가 썩은 외뿔을 굳이 장착하고 달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코뿔소가 주님이라면 외뿔은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실 때 그분을 그쪽으로 달리게 만든 것은 태중에 잉태된 코뿔소인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코뿔소는 또한 세상에서 외뿔이 없으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코뿔소라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장착된 외뿔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도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어머니로서 모범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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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다윗의 후손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통해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후손도 아닌 그녀가
다윗의 족보에 포함된 것은
그녀를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일을 기뻐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른 마리아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이들이며
품행이 단정하며 신심이 충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혈통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살아갔던 이들입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천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을 알았고
하느님을 향한 신심이 충만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녀를 통해 주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은
혈통을 통해 전해지지만
그 일은 준비된 이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이유 역시
평범했던 여인이 하느님을 잉태하였듯,
우리 역시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일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만큼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이 열린 만큼 하느님께 투신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일상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하루를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보내며
주님과 함께 마무리하는 일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며
우리가 알지도 못한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역시 성모 마리아를 닮아
하느님께 나아가며 그분과 함께 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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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대군 형제님.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양모)
1장 1절
기원전 1750년경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바로 저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다. 또한 예수 시대 유다인들은 기원전 1010~970년경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2대 임금으로 재위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성군 메시아가 탄생하리라고 기대했는데,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아들”“그리스도”시다. 유다인들은 족보를 가리켜 “탄생의 책”이라 하는데, 마태오도 그런 표현을 따랐다.
3절
족보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말고 다른 부인 네분이 수록되어 있다.
다말과 라함은 가나안 원주민이요, 룻은 모압 출신 여자였다. 그런가 하면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기 전에 본디 히티트 출신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네 부인은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남편이 이방인이었다. 예수님은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마태오는 일부러 이런 부인들만 골라서 족보에 올렸을까?
네 부인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정상적 부부관계가 아닌, 매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다말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한 다음 기상천외하게도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고, 라합은 예리고의 소문난 창녀로서 살몬과 결혼하고, 룻은 보릿가리 옆에 잠든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고, 바쎄바는 자기를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하고, 이렇게 네 여인은 제각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
오늘날 독자들은 윤리적 관점에서 이 여인들의 불륜을 나무랄 것이다. 곧 다윗의 각 메시아의 가계가 바야흐로 끊어지려는 순간순간에 하느님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계를 이어가셨다고 풀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인들은 하느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신 순간순간의 유용한 도구인 셈이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로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다.
히브리어 구약성경 원문에서는 람, 칠신인역에서는 아람이라 하는데, 마태오는 후자를 따랐다.
5절
기원전 1236년경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고 성곽도시를 점령코자 할 때 여호수아는 밀정 두 사람을 잠입시켰다. 밀정들을 자기 집에 숨겨준 원주민 창녀가 라합인데 라합은 구약성경이나 유다교 문헌 어디를 봐도 다윗 가계에 들어 있지 않다.
7절
남주 왕조 유다의 2대 임금 아비야의 아들은 3대 임금 아사, 마태오는 아사를 시편 50장과 73~83장의 시인 아삽으로 착각해서 잘못 표기했다.
8절
요람이 곧바로 우찌야를 낳은 것이 아니다. 실은 요람-아하지야-예호아스- 아마지야- 우찌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아하지야-예호아스-아마지야, 이렇게 3대를 빠뜨렸다.
10절
므나쎄는 유다왕국 15대 임금 아몬을 낳았지 아모스를 낳지 않았다. 아모스는 예언자.
11절
요시아 –여호야킴-여고니야로 대가 이어졌으므로 여고니야는 요시아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다. 여고니아는 유다 19대 왕으로서 기원전 507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당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60년 동안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12절
12절에서처럼 여고니아-스알디엘-즈루빠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지만 여고니아-브다야-즈루빠벨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다. 기원전 538년 페르샤 황제 고레스가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유다인들을 석방하자 즈루빠벨은 이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13절
즈루빠벨의 자손 목록에는 아비훗이란 사람이 없다. 루카 3.27에서는 즈루빠벨의 아들을 레사라 한다.
16절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음을 강력히 암시하여 요셉에게서라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나셨다고 한다. 동정녀 잉태 신앙은 예수 탄생 이야기에 분명히 드러난다.
18절
옛 이스라엘 관습에 따르면 처녀는 결혼한 다음에도 숫처녀로 그냥 친정에 눌러 살다가 일년쯤 지나 시가로 옮겨간 다음 비로소 성생활을 시작했다. 18절의 “정혼하다”동사는 결혼은 했으되 아직 성생활은 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리킨다. 루카 역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의 상태를 두고 “정혼했다”고 한다.
19절
이스라엘에서는 부인이 간음하면 원칙적으로 돌로 쳐죽였다. 잘봐주는 경우라야 남편이 이혼장을 만들고 증인 두 사람과 함께 서명한 다음 부인에게 건네줌으로써 부인을 소박했으니. 이것이 합법적 이혼절차였다. 이제 19절에서는 요셉을 평하여 “의롭다”고 하는데, 유다교에서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으로 의롭다고 했다. 따라서 유다교인 관점에서는 요셉이 공적으로 이혼절차를 밟아 마리아를 소박했어야만 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공적 이혼절차를 포기하고 “남몰래 마리아를 소박하기로 작정한”요셉은 유다교인들이 보기에는 불의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요셉을 일컬어 의롭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 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아기를 갖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이혼절차를 밟지 않은 요셉이랴말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21절
마태오는 “예수”라는 이름을 나름대로 풀이하여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라 한다. 통속적 어원 풀이로 예수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22절
마태오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도시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이른바 성취인용문이다. 성취인용문은 예수 사건 이야기,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고정적 도입구, 구약성경 인용문,이렇게 새 부분으로 짜여 있다. 1.22-23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맨 첫 번 성취인용문이다.
23절
23절은 이사 7.14인용문이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라 하는데, 마태오는 칠십인역을 따랐다. 마태오가 보기에 하느님은 예수의 가계를 치밀한 수치로 계획하고 실현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로 하여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에게서 탄생하게끔 예정하고 추진하셨다. 그 결과 예수는 단지 다윗의 가계에 속하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일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임마누엘”이라 불린 적은 없다. 그러니 임마누엘은 실명이 아니고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존칭이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을 풀이하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를 일컬어 임마누엘이라 한 것은 그분이야말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응ㄹ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본질적으로 숨어 계신 하느님을 우리가 느끼고 듣고 볼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행적 하나하나에 영원하신 분의 뜻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신이라 해도 좋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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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제1독서(미카5,1~4ㄱ)
'미카'란 '누가 주님과 같으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미카야'의 단축형이다.
미카의 고향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4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먼저 유다의 평원지대를 침략했으니, 틀림없이 이곳을 거쳐갔을 거라고 본다. 미카는 고향에서 아시리아 침략군의 진군을 보면서 국가적 재난이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다가가고 있음을 확인한다(1,8-16; 3,12).
미카는 소예언서의 예언자들 가운데 호세아와 아모스와 더불어 8세기에 활동했던 마지막 예언자이다. 열두 소 예언서에서 6번째 책인 미카서는 하느님과의 수직 관계를 강조한 호세아서와 이웃과의 수평 관계를 강조한 아모스서의 메세지를 고루 포함한다.
오늘 9월 8일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미카서 5장 1-4ㄱ절이 독서로 채택된 것은 새로운 통치자가 베틀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메시아 신탁 때문이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영신적 메시아로 오시기 위해 성모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신,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하기 때문이다.
'너 에프라타의 베틀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5,1~4ㄱ참조)
이 신탁은 메시아를 다윗 가문과 연결시킨 사무엘서의 전통(1사무16장; 2사무5,2; 7,8)과 동정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이사야 예언서의 전통(이사7,10~17)이 합쳐진 형태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것을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한다(마태2,6; 참조: 요한7,42).
메시아 시대가 오면, 야곱의 남은 자들이 민족 가운데서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민족을 굴복시킬 것이다(미카5,6~8).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 마술사, 점쟁이, 아세라 목상을 비롯하여 온갖 부정한것들을 없애 버리시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정화하실 것이다(미카5,9~14).
우리는 보통 구세주 예수님을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정의(의덕)의 태양, 구원의 태양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면 성모마리아는 무엇으로 비유할까?
영원으로부터 성부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여인을 통해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계획하셨기에 초자연과 자연의 만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여인 중에 간택된 여인이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길 원하셨기에 성모마리아의 탄생은 구세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마리아의 어머니이신 안나에게서의 수태, 그리고 마리아의 탄생 자체가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왜냐하면, 성모마리아를 통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때문이다.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복음(마태1,1~16.18~23)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6)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복음에는 두 군데 나온다. 루카복음에는 3장 23~38절에 예수님으로부터 아담에 이르기까지 77(=7x11)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오복음에는 1장 1~17절까지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까지 42(=14x3)대를 내려가며 기록한다.
두 족보 모두 객관적으로 조상들의 계보를 밝히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힌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아담의 후예요, 하느님의 후예임을 강조하며(3,38),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예요,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이심을 강조한다(1,1).
B.C.1750 년경,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으리라.'(창세12,3; 22,18)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저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다.
또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B.C.1010~970년경 통일 국가 이스라엘의 2대 임금으로 재위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위대한 성군 메시아(희랍어; 'Christus')가 탄생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족보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말고 다른 부인 4명이 등장한다.
ㄱ) 타마르(3절) ㄴ) 라합(5절) 위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가나안 원주민이다. ㄷ) 룻(5절)~모압 출신 여자 ㄹ) 바쎄바(6절)~우리야의 아내;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기 전에 본디 이방인 동네 히티트 출신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네 부인은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남편이 이방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메시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일부러 이런 부인만 골라서 올렸는지도 모른다.
네 부인들의 또 한가지 공통점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매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타마르는 자식없이 남편과 사별한 다음에 기상천외하게도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한다. 라합은 예리고의 소문난 창녀로서 살몬과 관계하고, 룻은 보릿가리 옆에서 잠든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고, 바쎄바는 자신을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한다. 이렇게 네 여인들은 제각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윤리적, 도덕적 관점에서 이 여인들의 불륜을 나무랄 것이다. 그러나 유다교 율사들은 그런 일들을 달리 풀이 했다.
곧 다윗의 가계, 메시아의 가계가 바야흐로 끊어지려는 순간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 가셨다고 풀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인들은 하느님께서 극적으로 개입하신 순간 순간의 유용한 도구들인 셈이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에수님을 잉태하고 낳는다(마태1,18~25).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 가문의 부도덕을 정당화, 합리화, 미화하시고 계시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실수, 허물로 가득찬 인간사(세속사)를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말하자면, 악(惡)에서도 선(善)을 끌어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어 오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예수님 조상들의 혈통, 족보, 계보도 그리 개끗하지도, 산뜻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한 구석들이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피가 더러우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한 부족하고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인간의 역사도 내치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로, 하느님의 역사로 만들어 나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과 다윗에게 한번 하신 약속을 그대로 이어가시고, 신실하게 지켜 나가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요셉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가 아니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부의 자연 생산력이 아닌, 출산전(前)도 출산시(時)도 출산후(後)도 동정녀(평생)이신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모의 무염시태(원죄없으신 잉태) 신덕 도리의 성경적 근거가 된 '은총이 가득한 이여'(루카1,28)에 해당하는 '케카리토메네'(kecharitomene; you who are highly favored)는 '거저주다', '은총을 베풀다'를 뜻하는 동사 '카리토오'(charitoo)가 여기서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로 쓰여서,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과 호의를 입은 상태가 이미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모께서 평생 동정 마리아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가 가능하도록 믿음을 고백했다는 사실은 성모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 가문의 후예라는 말이다.
무한히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지엄하시고 거룩하신 성삼위의 내적 영광은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성삼위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지극히 존귀하심, 엄위하심, 거룩하심과 진실하심, 권능과 권세 등등을 하느님의 자녀들과 천사들이 자꾸 밖으로 드러내어 기릴 때에 하느님의 외적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도 나부터 주님 대전에, 주님 뜻대로 잘 살고 거룩하게 걸으면 된다. 그러면 나를 통해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전해진다. 창세기의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처럼 말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여기서 '남편'으로 번역된 '안드라'(andra)는 원형 '아네르'(aner)의 목적격 단수로서 정관사 '톤'(ton)과 함께 '톤 이오세프'(ton Ioseph)와 동격으로 쓰였다.
'아네르'(aner)는 여성과 구별된 '남성', 아내와 구별된 '남편', 그리고 미성년자와 구별된 '어른'이라는 명사인데, 여기서는 '남편'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요셉'에 해당하는 '이오세프'(Ioseph)는 '더하다'(to add)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인명 '요쎄프'(yoseph)에 대한 희랍어 음역이며, 족보상 예수님의 아버지지만, 혈통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마태1,18)에게서 출생했기 때문이다(마태1,18~25).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마태오 복음 1장 2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는 모두 남자가 그 아들을 낳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본문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족보상으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시지만, 육체적으로는 그들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예언('여자의 후손'; 창세3,15)과 이사야가 한 예언('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사7,14)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금까지 '낳다'라는 표현인 '에겐네센'(egennesen)이 능동형이었는데, 본문에서는 '태어나셨다'에 해당하는 '에겐네테'(egennethe)가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마리아는 자의적으로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된 메시야를 육체적으로 낳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사가는 단어 하나의 선택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느님의 역사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로 번역된 '엑스 헤스'(eks hes; of whom)에서 '엑스'(eks; of)는 '(공간적으로)안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서 분리와 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헤스'(hes; whom)는 관계대명사 '호스'(hos)의 여성 소유격 단수로서 본절 상반절의 '마리아스'(Marias)를 받고 있다.
따라서 '엑스 헤스'(eks hes)는 문자적으로 '그녀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불리는'으로 번역된 '레고메노스'(legomenos; is called)는 '말하다' (to say)는 의미를 지닌 동사 '레고'(lego)의 현재 수동태 분사 남성 단수 주격으로서 앞에 있는 정관사 '호'(ho)와 함께 형용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즉 '호 레고메노스 크리스토스'(ho legomenos Christos)는 '(일반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라고 말해지는(일컬어지는)'이라는 뜻이다.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출생하던 당시가 아닌,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록하던 초대 교회 시대인 것이다.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선교사들은 나자렛 예수님이 바로 유다인들이 그토록 대망해 오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선교했으며(사도 5,42; 17,3; 18,5.28), 자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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