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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8일(월) 출애굽기 38:1~20 '놋거울을 드린 여인의 헌신' 찬송가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오늘은 출애굽기 38:1~20 말씀을 중심으로 '놋거울을 드린 여인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니 성막에 ‘물두멍’이 놋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이 손과 발을 씻는데 사용하던 기구인데요, 성소의 입구와 번제단의 중간이 놓여 있는 성물입니다. 제사장들은 번제단에서 수없이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그의 손과 발은 피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두멍에서 깨뜻이 씻어야 했고, 또한 광야생활을 하면서 더럽혀진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깨끗이 씻은 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물두멍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달리 성막뜰에 있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에는 뚜껑이 없습니다. 또한 물두멍의 자세한 모양이나 크기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허물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 고백하며 회개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또한 그렇게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나아갈 때 우리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용서와 긍휼, 사랑에 제한이 없으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자신들의 더러운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정결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게 쓰임받는 물두멍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보니까 8절에 보니 그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는데,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물두멍은 여인들의 놋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유리 거울이 채 발견되기 전인 고대 사회에서는 놋 거울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대 애굽의 거울은 구리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매우 값비싼 것으로서 여인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재산 목록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애굽 할 때 이것을 가지고 나와 소중히 간수해 오다가 이것을 성전의 거룩한 기물 중의 하나인 ‘물두멍’을 만드는 데 바쳤습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필수적인 ‘거울의 진가’를 생각해 볼 때, 여성들에게 만일 거울이 없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큰 불편을 가져올 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의 봉사자들이 사용할 물두멍의 제작에 쓰이는 놋이 필요할 때 그들은 아낌없이 자신들의 소중한 물건을 바쳤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헌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헌신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소년은 어머니가 싸준 빵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의 손에 얹어드립니다. 자신만 먹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얹어드린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자기만 먹었다면, 거기에는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도시락 하나 까먹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 드리게 되고, 그것이 주님의 축사와 더불어 제자들의 손에서 나누어질 때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광주리가 남은 그런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회막에서 봉사하며 수종드는 여인들이 쓰는 놋 거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들이 자신들만을 위해서 이 놋거울을 사용했다면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었겠지요. 그런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사용해도 될 놋거울을 제사장들이 사용할 물두멍을 만드는 것에 드리게 될 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특별히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거룩하지 않았을 거울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인해 거룩한 일에 쓰임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져서 만들어진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으로 엄청나게 쓰임받게 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자신의 티를 보고 고치던 개인적인 놋거울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이제는 하나님의 성역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의 정결함을 책임지는 물두멍으로 그 쓰임새가 확장되어 쓰임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이 여인이 부은 향유 한 옥합의 가치는 당시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일년연봉이지요. 이 여인은 자신이 시집갈 때 쓰려고 조금씩 저축하여 모아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주님 발 아래 깨뜨려 드립니다. 자신의 시집갈 비용을 포기합니다. 그저 모아두었다가 시집갈 때 썼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믿음의 결단, 헌신의 결단을 통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옥합을 주님 앞에 깨뜨려부어드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음으로 예수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표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것이 주님께 드려질 때 그 향유 옥합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되었고, 그 향기로 자신에게 뿐 아니라 온집에 가득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의 승리는 물질생활에서의 승리를 말한다고 합니다. 물질과 신앙과의 상관관계는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아낌없이 드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막에서 봉사하며 수종드는 여인들은 자신에게는 소중한 놋거울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렸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등장하는 소년은 자신의 도시락을 주님의 손에 기꺼이 드렸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헌신의 마음과 그 물질을 받으시고 좀 더 차원높은 영역에서 그 물질을 사용하시고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물질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헌신’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님이 한 집회에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 새 생명을 소유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또 다시 목사님은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아는 죽었습니까?”라고 묻자 교인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서도 삶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죽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이 죽지 않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채,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삿 21:25) 하는 것이 죄입니다. 부부 싸움도, 교회 분란도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연합해 죽게 하셨고 부활의 주님과 연합한 새 생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을 때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받았다면 이미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대해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주님께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주님께 비로소 오늘의 여인들처럼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