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나. 비판의 풍자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아이러니는 주로 내면과 외면 사이에 벌어진 틈을 연결시키고, 특히 내면성의 과도한 열망을 상대화함으로써 그것을 교정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 언어는 외면과 내면, 추상성과 구체성,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원적 세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언어로 작용할 수 있다. 여성작가가 풍자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과 남성작가가 풍자적 수법을 활용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면, 페미니즘 언어 이론으로 봐서 여성작가가 사용하는 풍자 수법이 소극적인 저항의 표시 차원 전략이라면, 남성이 사용하는 풍자 수법은 작품의 문학성 내지는 맛을 내는 수법으로 이용된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소설가 박완서가 ‘발언’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속상해 하고 답답해 한 것들”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현안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박완서의 풍자는 현실의 억압을 드러내는 글쓰기로서 시사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의 성격을 띤다. 박완서는 영웅적으로 일상을 초월하게 하는 큰 도덕이 아니라 생존과 일상적 생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도덕을 강조한다. 그는 역사의 진보나 사회의 정의와 같은 큰 질서에 대해서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상의 생활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작은 질서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활의 물리적 환경과 제도와 심리와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박완서는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믿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전 서부영화는 사람 하나를 죽이기 위해 두 시간 가량이 소모되었고, 죽여야 할 까닭 또한 관객이 공감할 만큼 절절했다. 그렇게 꼭 죽여야 할 원수나 악당을 죽이고도 그 승리자의 모습엔 허망함과 우수가 어렸었다. 그러나 요새 영화는 두 시간 미만의 시간에 몇 백 몇 천 명도 죽인다. (...중략...) 흘러간 명화를 재미가 없어 끄고 나서 문득 우리가 신봉해 온 발전이란 것에 대해 몸서리쳐질 적이 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박완서, 「어떤 몸서리」 중에서 -
박완서는 보통사람들이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래서야 어떻게 편안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겠는가’라고 분노하고 개탄한다. 박완서가 널리 유통시킨 새로운 이미지는 ‘꼴찌’와 ‘꼴찌들의 공동체’이다. 「꼴찌에게 보내는 마음」에서 ‘꼴찌’는 엘리트에 대비되는 사회적 다수이며 ‘꼴찌의식’은 서민의식보다 휠씬 광범한 다수의 어쩔 수 없는 자의식이 되고 있다. 그녀는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마음’에서 “하긴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곤 이 사회가 곧 꼴찌들의 공동체가 아니겠는가”하고 소외된 그룹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그녀의 수필에서 꼴찌가 엘리트에 대하여, 여성이 남성에 대하여 본원적인 우위를 점하는 영역이 바로 ‘도덕적 감각’이다.
엘리트의식이 시초부터 수많은 꼴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게 마련인 것과는 달리 꼴찌들에게는 그런 “파렴치함”이 없고 정직이야말로 보통사람들이 가진 미덕이라는 것이다. 그의 수필은 대개 우리의 생활 세계 안에 믿음과 도덕이 부재함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분개하는데, 그 비판의 근저에는 여성의 도덕적 감각이 놓여 있다. 그녀는 ‘미풍양속’ 특히 ‘부덕’ 이데올로기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소위 부덕이니 미풍양속이니 하는 것은 거의 다 여자의 희생을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녀는 ‘부덕과 미풍양속’ 이데올로기 아래 노동을 착취당하는 주부들, 식모보다 낫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여공들, 권력과 언론에 의해 업신여김을 당하는 ‘여류’ 작가에 대해서 말할 때, 그녀는 옛 도덕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의 형성을 주창하고 있다.
한무숙은 여성의 삶과 생활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서구 교육을 받음으로써 봉건문화의 몰락과 근대 문화의 생성을 생활로 체험하고 두 문화간의 긴장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던 작가이며, 한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인습적인 시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자기 표현 형식을 갈망한 데서 그녀의 글쓰기는 출발한다. 그녀의 수필들 중 특히 여성의 삶과 생활을 주제로 하는 텍스트에는 여성 인물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전기적인 글, 여성 인물에 대한 스케치적 성격을 가진 글, 여성의 삶과 생활에 대한 사색을 담은 글, 그리고 자화상적인 글을 포함한 자서전적인 글이 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는 거나,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는 거나 실질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조삼모사에는 화를 내고 조사모삼에는 만족해 했다. 교활하고 슬기로운 주인이 어리석은 원숭이들을 농락해서 감쪽같이 자기 뜻대로 그들을 휘말아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냥 웃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의문이다.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 원숭이의 주인처럼 농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또 이 원숭이를 사랑하여 갖은 애를 쓰듯이 정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을 걸어 결국은 같은 일이 되는 것을 가지고 시비분란을 일삼는 사람이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봐야 될 것 같다.(pp. 149-150) (굵게 강조 : 인용자)
- 한무숙, 「내 마음에 뜬 달」 중에서 -
위 작품에서 여성작가는 사자성어 ‘조삼모사’와 ‘조사모삼’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용된 구문에 나타나 있는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 원숭이의 주인처럼 농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고 한 진술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 내지는 남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특히 여성들에게 아이러니는 남성중심적인 질서를 비판하는 데에 쓰이므로 주로 ‘비틈’이라는 풍자적 기능의 중심이 됨으로써 현실적인 억압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는 언어가 된다. 즉 풍자적인 아이러니의 언어가 남성중심적인 세계의 위선․자만․자신감에 찬 우행․합리화․허영을 폭로하려는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와 풍자와의 연결이 가능한 것은 아이러니가 이러한 풍자의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그리고 처벌하는 힘”을 빌어와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건설하려는 여성의 욕망에 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자적 아이러니를 통해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날카롭게 인식할 수 있기에 전적으로 여성만의 언어는 아니지만 남성의 허점을 비판하거나 여성들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낼 때 유용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아이러니의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남성적 아이러니의 언어와 그 목적과 밀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러리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의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뜻하고자 하는 것과 그와는 반대의 말을 하는 것, 어떤 것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비난하기 위해서 칭찬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이 바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인데 이러한 언어가 여성의 모호함이나 양면적인 복합성과 연결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를 폭로하는 데에 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언어는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하는 ‘풀림’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언어와는 달리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해야지만 가능한 비판성을 보이기에 비판적으로 쳐다보거나 뒤집어서 이야기하는 발화자의 언어가 중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