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림사(公林寺)에서
첩첩 산 속 걸어 공림사에 다다르니, 절간은 바로 속세와 다르구나. 층층 봉우리에 푸른 이내 내리고, 향내 짙은 옛 절엔 한낮이 한가하다. 짧은 지팡이 걸고 나 또한 늙나니, 큰 일 이뤘으나, 누구와 돌아갈꼬? 시냇물은 경계 밖으로 흐르나니, 아롱진 이끼돌에 추연히 앉아본다.
언뜻 떠올라 읊다(偶吟)
어느새 석양인가 쓸쓸한 빈 절. 두 다리 뻗고 한가히 잠들었네. 바람소리에 놀라 깨어났나니, 단풍 든 잎이 뜰 안에 가득하네. 시끄러히 떠들음이 침묵만 하겠는가? 어지러히 소란 피움이 잠자기만 못하네. 쓸쓸한 산에 밤도 길어라. 베갯머리에 달빛이 환하네. 저 휜구름은 그 무슨 일로 날마다 이 산으로 날아드는가? 저 티끌세상 나쁜 일 꺼리어 나를 따라 산으로 돌아오는듯, 옳고 그름, 명예와 이익의 길, 마음은 어지러히 미친듯 달려간다. 이른바 이 세상 영웅이란 사내들,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갈 곳 모른다.
한암스님(漢巖重遠)에게 준 전별사(餞別辭)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원개사(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였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아침저녁 연기구름,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원개사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래서 시 한 수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삼계(三界)의 큰 스승 부처님이 이르시대, 마음 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원히 끊고, 불생불멸 저 국토(國土)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 줄로 팔만대장경 전해온다. 사람 되어 못 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큰 줄거리 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옷 입고 밥 먹는 것, 사람 만나 이야기 함,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운 것,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래 공한 것이고, 천진(天眞) 면목 (面目)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이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疑心)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육칠십 늙은 과부 외동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연구하되, 일념(一念)이 만년(萬年) 되게 하여, 자고 먹는 일조차 잊을 지경이 되면,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의 영험스러운 빛,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 열반(涅槃)의 진실 낙(樂)이 가이없다.
지옥천당이 본래 공(空)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분명하고 명확히 인가(印可) 맞아,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인연을 따를 뿐 까리낌 없이 지내가되, 빈 배 같이 떠놀면서 인연 있는 중생 제도(濟度)하면, 부처님 은혜 보답함이 아닌가?
일체 계행(戒行) 지켜 가면 천상인간(天上人間) 복(福)과 수(壽) 얻고, 큰 원력(願力)을 발(發)하여서 항시 불학(佛學) 따를 것 생각하고, 대비(大悲)의 마음먹어 가난하고 병든 걸인 괄세 말고,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보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기뻐하거나 성내는 마음 내지 말고, 텅 비고 신령한 이내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여덟 바람과 다섯 욕심, 일체 경계(境界)에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헛튼 소리 우시개로 이 날 저 날 다 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 볼까. 죽을 제 고통 중에 후회한들 무엇 하리. 사지(四肢)를 백 줄기로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는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하고 참혹한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저 지옥과 저 축생(畜生)에 나의 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百千萬劫) 미끌어지고 넘어져 뜻 이루지 못하니, 다시 사람 몸 받기가 아득하다.
참선(參禪) 잘한 저 도인은,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앓도 않고 선탈(蟬脫)하며, 오래 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며,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逍遙)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에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 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푸줏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寸陰)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무명(無明) 업식(業識) 독(毒)한 술에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고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昏迷)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어수선하고 소란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 할꼬? 지각(知覺)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계행(戒行) 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히 보아 하루에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시시 때때 경책(警策)하소. 할 말을 다하려면 바다물을 먹물로 써도 다 말할 수 없으니 이만 적고 끝내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할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이 나면 그때에 말 할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