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종료 직전까지 1-0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던 한국 대표팀은 89분 박주영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 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추가 시간 2분, 박주영의 슈팅이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나오자 뒤따라 들어오던 백지훈이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결승골을 터뜨렸다.
청소년 대표팀의 주장 백지훈은 이 골 덕분에 스타로 떠올랐고, 이 경기에서의 극적인 역전승이 “축구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나이지리아전은 축구팬들 뿐만 아니라 선수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경기였다. 백지훈은 2개월 뒤 국가 대표팀에 합류했고 내년 여름 독일 월드컵에서 질레트 최우수 신인 선수상을 노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초창기
1985년 2월 28일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태어난 백지훈은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에 축구화를 처음으로 신었고, 이듬해 지역 인근의 축구 명문 학교로 스카우트돼 10세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백지훈이 선택한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그러나 그는 “키가 너무 작다(174cm)”는 이유로 장갑을 벗어야 했고 그 이후 계속 중앙 미드필더로 뛰게 됐다.
진주중을 거쳐 안동고에 진학한 백지훈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02년에 19세 이하 국가 대표팀에 발탁됐다. 그러나 뛰어난 공격 가담 능력에 비해 수비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주전 자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K-리그의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한 백지훈은 2003 시즌 초반 3경기에 교체 투입되며 프로 무대에 빨리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들이 영입되고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지면서 백지훈은 2군으로 내려앉게 됐다.
하지만 2004년 1군 소속으로 7경기에 출장한 백지훈에게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20세 이하 국가 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차면서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듬해에는 클럽 경력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백지훈은 FC 서울의 지휘봉을 잡은 이장수 감독을 따라 서울로 이적했다. 시즌 초반에 출장 기회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지훈은 2005년 K-리그 15경기에 출장해 1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태극 전사의 꿈을 이루다
청소년 대표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백지훈은 2005년 8월 7일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마지막 경기였던 일본전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백지훈은 축구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태극 전사가 되는 꿈을 이루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백지훈은 FIFAworldcup.com과의 인터뷰에서 "목표를 달성한 셈이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을 보고 축구에 눈을 떴다는 백지훈의 목표는 원래 2010년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붉은 유니폼을 입어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지만 부담은 없다.
“우선 팀에서 내 자리를 잡는 게 중요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목표였지만 이번 대회에서 뛸 수 있게 된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배울 것도 많지만 넘어야 할 산도 있다. 백지훈은 대표팀에서 전남 시절 팀 동료였던 김남일과 터키의 트라브존스포르에서 뛰고 있는 이을용 등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의 주역들과 주전 경쟁을 벌여야 한다.
만약 백지훈이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오는 6월 18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프랑스와의 조별 라운드 2차전에 나설 수 있게 된다. 이 경기는 백지훈에게 자신의 우상인 지네딘 지단과 맞대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지단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수이지만 경기장에서 맞붙게 되면 사적인 감정은 배제할 것”이라는 백지훈은 “2006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지난 대회처럼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당당히 각오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