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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50. 9.15~11.25) 유엔군 반격
지금까지 북한군 님침 이후 낙동강선 방어까지 상화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이 38도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시작했다. 200여 대의 T-34전차를 앞세운 그들의 앞도적인 전투력에 국군은 무방비 상태로 전선이 돌파되고 만다.
(가) 6.25~6.28 : 38선 무너지고 의정부무너지고 창동-미아리선 무너지며 6월28일 서울한강교 폭파에 이은 국군 한강선 이남으로 철수
서울-홍천-강릉선에서 적과 접촉하며, 적이 서울복판에서 머뭇거리는 도안 한강 방어선이 7.3일까지 유지, 미군의 상륙시간 확보기여
(나) 6.29~7.6 : 시흥사 통제하 7월 4일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며, 국군은 평택.오산-충주-소백산-울진선으로 물러나며 7월 5일 개전후 최초로 미제24사단 스미스 부대가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전투
(다) 7.7~7.20 : 금강-소백산맥선 방어선이 무너진다.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대전전투에서 실종 되었다가 포로가 되고, 북한군의 빠른 진출에, 맥아더의 구상에 상륙작전 구상에 따라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가 영동-김천지구로 축차 투입되고 미 제25사가 상주일대로 들어온다. 천안에서 전의구간에서 북한군은 엄청난 전차가 미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에 피해를 입게 되고, 후속하던 제6사단이 우회항여 천안-예산을 거쳐 서남부지역으로 우회진출하게 된다. 당시 전남북 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라) 7.20~8.20 : 미군은 유엔군의 투입을 위한 지연작전을 통해 시간을 획득해야 하고, 북한군은 유엔군이 투입 전에 국군과 미군을 마지막 부산으로 몰어붙여야 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4전차사단은 영동에서 김천으로 진출 중에 미군의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에 전투력의 과반을 잃게 된다. 하지만 서남부로 우회한 제6사단의 마산 서쪽의 하동-진주 방면에 모습을 나타내고 대전에서 금산-안의로 우회한 제4사단이 낙동강 돌출부로 진입함에 따라 미 제8군사령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서 전 부대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명령을 하달한다.
(마) 8.21~9.15 : 미 제8군은 전투력이 약화되어 재편성 중인 미 제24사단을 긴급 투입하고, 이어서 의성-상주지역에 투입되었던 미 제25사단을 마산 서부로 투입하면서 부산에 들어온 미 제1임시해병여단과 제5연대 전투단을 함안-진동방향으로 투입하여 적을 지연하고, 추가 투입되는 미 제2사단을 낙동강 돌출부로 투입하여 부산 서측방의 위기를 극복한다.
또한 대구북방 위기는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책임지역을 분활하여 왜관-328고지-수암산-유학산-가산-팔공산선에서 저지하고, 영천 북방은 신령에서 국군 제6사단이 갑령일대에서 북한군 전차 21대를 파괴하는(미 전폭기와 대전차특공조 활약)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영천에 돌입한 북한군은 국군 제8사단과 재편한 제7사단 연대들, 여기에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도 1개연대씩 투입하여 북한군을 무력화시켜 버린다. 반면 안강-포항에서는 적 제5사단과 전창에 밀려 포항이 피탈되고 안강이 피탈되고 곤제봉에서는 15회 이상의 쟁탈전이 벌어진다. 영일 비행장 좌측 운제산 까지 북한군1,600여 명이 침투하는 위기가 발셍하지만 미 제24사단의 처치특수임무부대와 국군 수도사단 및 제3사단이 혈전으로 경주로의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형산강을 피로 물들이며 다시 포항을 탈환하면서 적 5사단은 무력화 되어 철수하게 된다. ]
◆ 6.25전쟁 제2단계 작전('50.9.15~11.25)
국군과 유엔군은 '50. 9월 15일 낙동강선에서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9워 15일에는 인천상륙작을 감행하여 적의 퇴로 및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하여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수복한다.
38도선을 '50.10월1일 넘어서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출한데 이어 동부 전선에서도 혜산진과 청진까지 진출하여 통일이 눈앞에 다가선다. 그러나 '50. 10월 19일을 전후하여 압록가을 도하하여 은밀기동으로 묘향산산맥 일대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되면서 '50. 10월 24일은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중공군 1차공세), '50. 11월 24일은 유엔군의 X -머스 공세(중공군 2차공세) 시에는 강력한 중공군의 선제 역습에 한만 국경지대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1) 인천상륙작전 ※ 9월 12일 : 한.미.영 혼성부대가 군산에 양동 작전 감행
※ 9월 14~15일 : 삼척일대에 맹렬한 폭격
※ 9월 15일 : 영덕 장사동에 이명흠대위가 지휘하는 독립유격 제1대대 학도병이 상륙작전 실시. 태풍 케이지 영향으로 상륙주정이 좌초되고 적에게 노출되어 많은 희생자 발생
이 작전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6월29일 전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길로 수원에 내려, 한강 방어선을 바라보이는 지금 영등포 어느 강변 언덕에 올라서서 최초는 북한군 주력을 수원 부근에서 막아세우고, 1개 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시시켜 적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소규모 작전으로 맥아더 원수는 동경으로 돌아가 참모장 알몬드 소장(원산상륙작전시 미제10군단장)에게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지시하는데 "불루하트"란 작전명이 붙었다.
[불루하트"작전 : 디데이는 7월 22일로 미 제1기병사단을 상륙부대로 선정한다. 그러나 최초 스미스부대가 7월 5일 오산에서 무너지며 수원이 피탈된다. 이어서 금강-소백산맥선 마저 무너지자 영동-김천축선을 방어하기 위해 미 제1기병사단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이용하여 포항에 18일 상륙하여 영동으로 추진해야 했다.
이에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 후방을 강타하여 적의 진출을 차단함은 물론 공세이전하기 위해 "크로마이트"란 작전명으로 9월 15일을 상륙예정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출동부대는 미 본토에서 증원되어 오는 미 제1해병사단이 주 부대로 한국군 해병 제1연대와 미 제7사단, 국군 제17연대 등이다.
계획단계에서 인천항의 협소한 수로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항이 협소하여 대형 함정이 상륙하기 적함하지 못하다운 반대여론이 미 행정부 측의 합참쪽에서 많다는 이유로 군산이아 아산만을 요구한다. 하지만 맥아더는 바로 악조건이 감행해야할 이유라며 북한군이 불가능이란 이유로 대비가 소홀한 점을 이용하여 기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밀어붙ㅇ여 8월 28일 최종 승인을 받게된다.
이를 위해 '50. 8.18-9.14어간에 덕적도와 영흥도에 해군육전중대가 상륙하여 확보하고, 한국 해군첩보팀과 미 극동군 첩보팀이 상륙하여 경인지역의 적정을 파악하여 제공한다. 또한 KLO부대원들이 팔미도 등댓불을 밝혀 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이 인천해역에 진입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다.
(가) 1단계 : 월미도 상륙(녹색해안)
[9.15일 새벽 월미도 상륙,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 150여 명 매몰, 미군 피해 부상 17명]
9월 15일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가 상륙명령에 따라 17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10대의 전차와 새벽 02:30분에 수로를 따라 진격하고 함포지원부대 19척도 월미도 가까이 진격했다. 새벽 05:45분에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기가 목표물을 폭격하고 함포사격이 아어지면서 제3대대 1파가 06:33분에 월미도 녹색해안에 전차 10대와 상륙한다.
[썰물에 밀려나가는 함대들, 월미도에 고착된 미 제1해병 5연대 3대대]
당시 월미도에는 북한군 제918해안포 여대의 2대대 등이 있었지만 미군의 선제 포격에 거의 궤멸도기고 06:55분에 월미도 정상에 성조기가 나부끼었다. 즉시 공병이 부교를 가설하여 장비와 병력이 상륙했지만 1시간도 못되어 바닷물이 빠져나가 함대도 함께 밀려나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후 4시 밀물이 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알 한방 쏘지않았다.
(나) 2단계 : 인천항 상륙(적색해안, 청색해안)
월미도를 탈환하면서 9월 15일 16:45분 미 5해병연대와 1해병연대가 만조기가 되면서 해안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적색해안(월미도 좌측, 만석동 방향. 외인묘지. 응봉산) : 한국 해병대 3대대를 배속받은 제5연대 1,2대대가 상륙주정에 탑승하여 17:33분에 상륙시도하여 20:00시까지주어진 목표 확보. 상륙시 해안벽이 1M이상 높아 사다리를 놓고 벽을 넘었다.
[적 기관총을 어깨와 가슴에 맞은 소대장 로페스 소위의 찬란한 전사]
제5-1대대 A중대 3소대가 상륙한 곳은 북한군의 암벽진지 한가운데였다. 암벽을 뛰어 올라 백병전이 전개된다. 돌담에서 얼굴을 내민 해병대원은 저격을 당해 전사하고 소대장 로페스가 수류탄을 던질려던 순간 기관총을 맞아 수류탄이 손으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참호내에는 소대원이 가득했다. 소대자은 "수류탄읻다"를 외치면서 대피를외쳤으나 참호위로는 적의 기관총이 날아와 피할 수도 없었다. 소대장은 다시 수류탄을 잡고 던지려 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수류탄 조긍로 기어가서 팔뚝으로 끌어당겼고 순간 수류탄이 폭발하여 소대장의 몸은 퓽지박산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부하들은 무사했다. 소대장의 영웅적익고 극적인 행동에 소대원은 무사했고 목전의 적을 격파했다(일본 육전사 1968년 발행 한국전쟁사 145쪽 옮김)
국군 해병 제3대대는 15일 저녁 8시에 후속 상륙하여 응봉산 일대와 도심지역 적을 소탕(국군 해병 제1연대)한다,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제3대대가 상륙후 이어서 적색해안으로 상륙하여 해안가 공동묘지 부근에 집결 숙영한다.
★시가지 소탕작전 중에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무고한시민 100여 명이 학살당한 모습을 목격한다.
▶국군 제17연대는 9월 24일 상륙군 후속부대로 인천항에 상륙하여 부평을 거쳐 흑석동 일대로 진출, 미 제7-32연댕에 배속된다. 그 다음에 연대는 한강 북쪽 응봉을 탈호나하고 용마산를 탈호나하느 것이었다.
●청색색해안(월미도 우측, 소원도. 염전방향) : 미 제1해병연대가 17:32분에 상륙하여 16일 01:30까지 목표 확보. 상륙부대는 전사 21명, 부상 174명이었고, 인민군 포로 300명을 생포한다.
(다)3단계 : 한강으로 진출
9월 17일 : 미 해병은 김포비행장을 19:00싱에 탈환하고 인천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서울방면으로 철수하였다.
9월 18일 : 제10군단의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 32연대가 상륙하여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영등포 우측을 공격, 안양과 수원사이 국도를 장악한다. ※ 당시 미 제7사단 제32연대는 총 5,114명 중에 미군이 3,241명, 국군 카츄사가 1,873명이었다.
9월 19일 : 미 제7-31연대가 인천항에 도착, 수원방면으노 진출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2) 서울탈환 작전
당시 북한군은 유엔군의 기습상륙작전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서울주변의 잡다한 부대들을 서울로 끌여들이고 ,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 동중이던 제18사단을 되돌려 경인지역 방어에 임하게 된다. 9월 초순 신의즈에서 출발한 제42전차연대를 배속받아 전차가 18대가 되며 영등포 방면에 투입되었다. 또한 개성 남쪽에 위치해 있던 제107보안연대도 김포와 강화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가) 한강 도하 및 신촌전개 ※ 9월 19일 : 정찰팀이 엉뚱한 곳을 정찰하여 잘못 보고로 1차 도하작전 실패
1) 9.19일 ,1차 한강 도하 행주산성 탈환작전 실패
미 해병 5연대장은 사단수색중대에서 14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소형보트를 타고 행주나루터를 개구리 수영으로 20: 40분에도하하여 정찰을 실시했으나 잘못 정찰로를 들어가 적정이 없는 엉뚱한 곳을 보고한다. 잠시후에 수색중대가 8척의 상륙용 주정을 이용하여 강 중간쯤 대안의 125고지에서 적의 강력한 사격과 박격포 사격으로 도하 실패한다
2)9.20일 2차 한강 도하 행주산성 탈환, 도하용 조립교 설치
이에 연대장은 야간 도하공격이 실패하자 주간공격으로 전환하여 새벽에 해병전투기의 지원을 받으며 혈투끝에 09:40경에 고지를 탈환하며, 수륙양용트럭을 탄 채로 내륙으로 진출하여 서을 동남쪽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 국군 해병 제2대대도 한강을 도하한다. 이날 공병은 행주나루에 도하용 조리교를 설치한다.
9월 21일 : 미 제5해병연대는 신촌 북쪽의 백련산(216), 서쪽의 68고지를 점령하고 , 국군 해병 2대대는 신촌 서쪽의 104고지를 점령하여 서울 심장부 공격태세를 갖춘다.
(나) 영등포 탈환 및 안양 및 수원 확보 ※ 9.20일,미 해병 1연대 2대대가 갈천 변 덕고개 일대에서 북한군 300여 명 사살
※ 9.21일 영등포 공격개시, 개활지 통과하면서 적의 포병사격으로 제2대대 85명 희생
※ 잘못 기동공간으로 들어간 우측의 1연대-1대대-A중대가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영동포 시내 진입, 돌격대처럼 적을 유린하고 시내를 벗어나 한강 남쪽 제방에 진지를 편성한다
1) 9. 22일 영등포 탈환 및 노량진 부근 고지 확보
영등포 방면은 미 해병 제1연대가 진출하게 된다. 적은 9월 20일부터 영등포로부터 선제 역습을 감행한다. 경안국도상에는 적 전차 5대와 1개 대대규모가 있었다. 갈천 주변 고지군에서 미 해병도 많은 희생자를 낸다. 하지만 덕고개 일대에서 적을 일거에 무력화시켜 영등포시가를 감제할 수 있는 고지를 탈환하였다. 덕고개에서는 적 시체 300여 구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21일 영동포를 공격하면서 개활지 통과간 적의 포병화력에 미 해병1-2대대는 85명의 피해를 입고 돈좌된다. 이에 에비인 제3대대가 투입된다. 반면 우측으로 공격한 미해병제1연대 1대대 A중대는 잘못하여 엉뚱한 가동공간으로 진출하면서 적의 저항이 없이 시내로 진입하여 투입되는 적의 지원부대를 유린하며 한강 남쪽 제방으로 진출하여 진지를 편성한다.
계속된 공격으로 22일 아침에 영등포 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게 되며 노량진 부근의 고지를 확보한다. 안양천 변 논둑과 도로변에 275명의 적군 시체와 50여 정의 자동화기가 흩어져 있었다.
2) 안양(9.21일) 및 수원(9.22) 확보 ※ 9.21일,미 제7사단 정찰대가 수원비행장으로 출발할 때에 지도를 휴대하지 않아 길을 잘못들어 수원비행장 남방 5K까지 진출하여 급편진지 편성
※ 사단에서 두절된 정찰대를 찾기위해 해넘(제73전차대대장)특수임뭅부대"를 편성하여 수원으로 진출중 연락이 되면서 정찰대가 수원으로 복귀과정에 적전차 4대를 아군으로 판단하여 전조등으로 신호를 보내다 적전차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작전참모 전사, 적전차는 계속남아하다 정찰대 전차의 기습으로 2대 파괴, 2대는수원방향으로 도주, 22일 비행장을 해넘특수임무부대가 확보
9월 19일, 미 제7사단 제32연대가 미 해병 제1사단 제1연대로부터 경인국도 이남의 책임지역을 인수받고영등포 서측 갈천부근에 있었다.
9월 20~21일, 연대는 동측 안양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계속적인 적의 지뢰지대 설치로 진출이 지연된다. 전차 3대가 파손되고 연대장 지프도 파손되는 등 공병부대가 150여 개의 지뢰를 제거한 후에야 9월 21일 독산리와 안양을 점령했다.
이무렵 미 제7사단 정보처 보좌관이 인솔하는 사단 수색중대가 수원비행장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21일 18:00시경 수원입구에 도착하고, 사단 작전참모도 공병소대를 인솔하여 수원입구에서 만나, 함께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다. 시가전에서 북한군 제104전차사단 장교 2명을 포함하여 37명을 생포하고 수원비행장으로 내려가다 지도룰 휴대하지 않아 비행장을 지나쳐 수원 남방 5km까지 진출하였다. 사단과 통신두절이 되었고, 사단은 "해넘(제73전차대대대대장)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정찰대를 찾도록 조치했다.
해넘특수임무부대가 수원 성문에 도착했을 때에 잠복한 북한군 T-34전차가 기습하여 전차 중대장이 전사하고 적전차는 1대가 파괴된 가운데 사라졌다. 밤을 센 주간이동을 위해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수원남쪽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정찰대는 이들과 연결하기 위해 지프 4대에 편승하여 수원으로 올라오다 전차 4대를 발견한다. 작전참모는 그들이 해넘특수임무부대로 착각하고 전조등을 명멸하여 신호를 보내자, 상대 전차에서 기습으로 기관총사격을 가해 작전참모는 전사하게 된다. 적 전차는 계속 남하하다 정찰대 전차의 기습사격으로 2대는 파괴되고 2대는 되돌아 다시 수원쪽으로 도망갔다.
9월 22일 , 해넘특수임무부대가 수원 비행장을 점령하고 미 제7-31연대다 수원에 도착 , 비행장 경계임무를 인수한다.
3) 서울탈환작전
가) 서측방 돌파 ※ 9.22~23 : 연희고지에서 국군 해병1대대 200여 명 사상자 발생 , 임무를 미 제5-2대대에 인계
※ 9. 23~24 : 미 제5-2대대는 전투중 D중대장 전사등 150여명 사상자 발생, 탈환
※ 의령고지, 안산, 와우고지 일대에서 적 1,200여 명 사살, 서측방전투에서 북한군 총 1,750명 사살
서을탈환을 위해 한강 남쪽에서는 미 제7사단이 안양과 수원을 확보하고, 미 해병 제1사단의 주도로 작전이 시행된다.
9월 22일, 지금의 연희동 주변 고지군으로 진출한 미 해병 제5연대와 제1연댁가 북한군 서측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4일간 게속된다.
당시 북한군도 일부 방어병력을 주요고지군에 배치하여 경의선 철도와 경의국도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곳의 적은 제25여단과 제78독립연대로 제25여단은 철원에서 창설하여 낙동간 전선으로 투입위해 훈련을 받던 중에 19일 서울에 들어왔다.※제25여단과 제78독립연대 병력중 장교와 하사관은 과거 중공군으로 근무한 전투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9월 22일, 07:00시에 미 해병 5연대는 국군 해병 제1연대 제1대대를 중앙으로 하여 의령터널고지, 안산, 와우산의 105고지를 목표로 공격한다. 여기서 국군 해병 1대대는 의령터널 공격에 앞서 지금의 연세대 서측에 있는 중간목표인 연희고지를 탈취해야만 했다.
9.23~24일 : 국군 제1대대 연희고지 탈취실패, 200여 명 사상자발생으로 미 제5-2대대가 임무인수, 미 2대대 F중대 어느 소대는 총원이 7명으로 줄어들며 계속 피해발생, 이어서 D중대도 총원이 44명으로 줄어들며 중대장이 전사하고 중대원 26명 만이 목표 점령한다.
한편 미 제1해병연대는 미 제5연대 우측방에서지금의 한강 북로 절두산 방향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진출하여 노고산-마포 방향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9월 21일 인첞항에 상륙한 미 제7연대는 서울 북쪽의 고지군을 가로질러 북한군 퇴로르르차단하기 위해 해병 5연대 좌측으로 진출한다
또한 통영지구에서 작전하던 해병 김성은 부대가 25일 인천항에 상륙하여 수색에서 연대와 합류후 제5대대로 개편되면서 미 제7해병연댕에 배속된다.
나) 남동측으로부터 압박 ※ 미 제5연대의 서측방 돌파 지연에 따른 미 제7사단 제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 남동측방 진출
※ 9월 26일, 북한군 일부가 남산으로 역습을 감행했으나 384구의 시체외 174명의 포로를 남기고 물러났다
미 제8군사령관은 제1-5해병연대의 서측방 돌파 지연에 따라 제1해병사단장과 제7사단장을 불러 작전숙의를거쳐 24일까지 제5연대가 돌파하지 못한다면 이란 전제조건으로 미 제7사단의 투입을 지시한다.
그러ㄴ데 실제로 24일에도 제5연대는 돌파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 25일 06:00시를기해 미 제7-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한가을 도하하여 남동측을 공격ㅎ란다.
미 제7-32연대는 안양에서, 구룡산(292), 신사리 (현재 신사동)에서 잔적소탕 중에 있었다. 노량진 철교와 인도됴, 사당동부근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9월 25일 06:00시에 신사리에서 서빙고로 미 제32-2대대가 기습도하를 개시하여 남산과 응봉을 탈환하다. 적은 소수만이 저항하다 도망갔다
한편 국군 제17연대는 신시라 도선장에서 보광동-한남동으로 도하하여, 미 제32연대 동측으로 진출하여 용마산과 망우리일대를 탈환하여 경춘가도와 중앙선 철도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연대는장춘단과 한남동 사이의 고개를 넘어 무학봉을점령하고 26일 하왕십리를 거쳐 중랑천 동측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26일, 북한군 일부가 남산으로 역습을 감행했으나 384구의 시체외 174명의 포로를 남기고 물러났다.
다) 시가지 전투 ※ 9.26일 : 미 해병 제1연대 공격으로 적 시체 250여 구 남기고 주력인 제18사단 철원으로 철수
9.27일 적은 시체 250여 구 남기고 의정부 경유 철원으로 철수(북한군 제18사단)
※ 9월 26일 미 제32-제2대대가 응봉에서 용마산으로 집굘 중에 적을 발견하여 기습으로 500명 사살
※ 9월 27일 새벽 미 제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태릉방면에서 철수중인 적을 발견 500명 사살
※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의 진실공방 : 한국전쟁사 기록에는 9월 27일 15:08분에 미 제5해병 3대대가 점령, 대대 지휘소 설치, 일설에는 그 보다 먼저 9.27일 새벽 6:10분에 국군 해병대 2대대가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설이 있다.
9월 25일부터 포위망이 형성된 가운데 시내진입작전이 수행되었다.
미 해병 1연대와 국군 해병 2대대가 시내중심부에서 미아라를 점령하며, 국군 제1해병대대는 미 제5해병연대와 같이 주앙천 일대를, 국군 해병 5대대는 미 해병 제7연대와 같이 서울 북쪽 북악산 일대 고지군을 점령하고 국군 제3해병대대는 예비였다.
9월 25일 야간 작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제5연대는 서대문 형무소 서측에서 일부 적의 역습을 26일 04:45분에 격파한다. 제1해병연대는 26일 01:30분에 마포전차길을 따라 공격을 개시할 무렵 대규모 적이 전차 12대, 2문의 자주포 등 앞세워 700여 명이 역습을 가해왔으나 본인들이 매설한 지뢰에 전차가 파괴되고 해병의 75일리 대전차 로켓포에 격파되면서 250구의 시체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때 적은 제18사단 주력이었다. 이들은 25~26일 밤에 의정부 경유 철원으로 이동하였다.
군단은 9월 26일까지 서울의 반 정도를 점령하였다. 시가지 도로에는 온갖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마대와 빈가마니에 흙을 가슴높이로 쌓아 길을 막았다. 그 전면에는 지뢰가 매설되었다. 그 후면에는 기관총과 대전차포가 위치하고 인접 건물에도 적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날 해병대의 전투는 이 바리게으트를 격파하고 제거하며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다.
9월 27일 15:08분 : 미 제5해병연대가 중앙청 점령, 제3대대 지휘소를 설치한다. 여기서 국군 해병 제1대대가 미 제3대대를 후속하여 중앙청을 점령하게 된다. ※ 하지만 일부 자료에는 미 해병 제1연대에 배속된 국군해병 제2대대가 전사자료에는 시청 덕수궁, 미국대사괸을 거쳐 현 조선호텔에 지휘소를 설치했다고 기록하는데 , 9월27일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처에 인공기가 내려지고 우리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 양병수 일등병. 최국방 견습 해병 등 세 용사가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같은 시각 서울 남쪽과 동쪽에서도 미 제7-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시가지 전투를 전개한다. 26일 새벽 미 제32연대가 남산에서 적의 역습을 격퇴한 뒤에도 하루종일 치열한 조우전을 계속했다. 제3대대는 응봉에서 용마산 방향으로 집결 중에 L중대가 적의 큰 대열을 발견하여 기습공격으로 적 500명을 사살하고 전차 5대를 파괴했다.
이시각 26일, 중랑천 일대에서 소탕작전을 하던 국군 제17연대는 용마산과 망우리고개를 점령하며 미 제32연대는 서울-의정부 축선의 중랑천 동측을 봉쇄했다.
이날 26일 야간에 태릉 방향에서 철수하는 적을 발견하고 기습작전으로 27일 03:00시까지 작전을 수행하여 적 500여 명을 사살하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어린학생들로서 서울에서 강제 모집되어 북한군에 편입된 것이다.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린치(대대장)특수임무부대"가 26일 22:36분에 연결되어 미 제10군단의 연결작전을 성공했다.
이와같이 한.미연합부대는 상륙작전 개시 12일 만인 9월 27일에 중앙청을 비롯한 서울시가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9월 28일 소탕작전을 완료하게 된다
9월 29일에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삭이 거행된다. 맥아더 장군이 동겨을 출발하여 10:00시에 김포비행장에 도착하며, 잠시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여 맥앋더와 같이 서울시내로 향하여 12:00시에 중앙청 중앙홀인 국회의사당에서 수도서울의 수복 및 환도식이 거행되었다.
(3) 낙동강에서의 반격
(가) 피아상황
1) 적 상황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은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미 제8군의 정보분석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전선사령부가 김천에 있었고, 1개 전차사단 및 2개 전차 여단의 지원하에 총 13개 보병사단이 마산 서측 남지-영산-창녕-현풍-왜과ㅣㄴ-다부동-영천-안강-포항선에 전개되어 있었다. 그 병력 수준은 약 10만명이다고 분석하였다.
낙동강 서부지역에서는 제1군단 예하 제10. 제2. 제4. 제9. 제7. 제6사단등 6개사단 47,400명선, 낙동강 동부지역에는 제2군단 예하 제3. 제13. 제1. 제8. 제15. 제5사단 등 7개 사단 54,400명 선으로 사단별 75%수준이었다.
그러나 실제 북한군은 이보다 훨씬 모자란 병력은 7만명 수준이고 장비는 약 50%인걸로 보였으며, 많은 인원이 남한에서 강제 모집된 신병들이었다. 또한 식량부족에 영양실조와 유엔공군의 게속작인 폭격으로 전장 공포증에 걸려 있기도 했으며 식사도 1일 겨우 주먹밥으로 2끼 정도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2) 아군상황
유엔군은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국구 ㄴ제1사단. 미 제24사단으로 대구방어, 그 남쪼긍로 미 제2사단이 창녕-영산에서 미 제25사단이 마산에서 적을 방어했다. 국군은 제2군단이 제6사단과 제8사단이 신녕-영천에서, 국군 제1군단이 제3사단과 수도사단으로 안강-형산강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당시 전투부대의 병력수준은 총병력은 158,000여 명이고 이중에 국군은 6개사단 약 60,000명을 비롯하여 훈련병 드응ㄹ 포함시 72,730명이었다. 미 제8군은 4개 사단 약 60,000명을 주축으로 84,478명이고 영국군 제27여단이 1,693명이었다.
미군은 개전초기부터 참전하여 전사자 4,280명에 부상.포로. 실종 등 2만여 명 수주으로 소총중대에 고참병이 25%를 조금넘었다.
반격작전 당시의 전투력 수준은 유엔군이 2:1로 높았고, 장비 등은 6:1정도로 우세하였다.
(나) 낙동강선 돌파작전
1) 대구정면 돌파작전 ※ 9월 19일, 제5연대전투단이 금무봉에서 적 제3-7연대 연대장을 포함 250여 명 사살, 왜관진출 교두보구축, 미 제24사단이 대구 서측에서 낙동강 강안으로 진출, 북상하여 왜관으로 진출한 제5전투단과 김천 진출위한 도하여건 확보
※국군 제1사단이 낙정리로 먼저 진출 , 교두보를 확보하여 도하작전 여건 확보
※ 제1기병사단, 다부동 자측방 253.300고지 탈환간 제1대대 207명 피해
※9.20 미 제1기병사단장 전격적으로 제7기병연대장 해임하고 제77포병대대장 해리스 중령을 보병연대장에 보임하는 초강수 단행, 무기력하고 무능한 장수는 전장에서 필요하지 않는다
※ 미 제1군단, 반격작전 6일만인 22일 대구북방 적 방어선 돌파, 인찬상륙작전 부대와 연결위한 진격작전 개시, 적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대령 투항 (너무 많은 희생자 발생에 사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했으나 사단장이 거부하며 죽인다고 하여 사단장 팔에 권총을 쏘고 미군측에 귀순했다 함)
낙동강에서의 반격작전은 계획대로 9월 16일 09:00시에 개시되었다. 미 제1군단은 주공으로 왜관-김천-대전-수원으로 진격하여 인천상륙부대와 연결해야 한다.
당시 미 제1기병사단은 대구북방에서 적 제3 및 제13사단과 대치하고, ㄱ국구 ㄴ제1사단은 가산성-팔공산에서 적 제1사단과 제13사단 일부와 대치주이고 미 제24사단은 예비로 경산에 집결해 있었다. 영국 군 제27여단은 대구 서남방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지역에서 군단 서측방 경계를 하고 있었다.
미 제1군단장은 미ㅣ제1기병사단으로 왜관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미 제24사단을 투입하여 김천방향으로 진격하며,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에서 미 제1기병사의 도하작전을 도울 수 있도록 도하하여 상주 방향으로 공격하는 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18일 그동안 기상불량에서 호전되어 왜관 서안지역에 B-29 폭격기 42대가 출격하여 폭격을 실시한다. 그러나 게속하여 적의 저항이 거세 좀처럼 진출이 어려웠다. 특히 왜관지역을 감제하는 금무봉이 적의 핵거점이었다.
반면 국군 제1사단은 가산성 동측방 횡격실 능선(583,655)으로 진출하여 공격발판을 확보하는 등 양일간 10KM를 기동하여 다부동-군위 도로상의 교차점을 점령하면서, 도로의 차단으로 적이 혼란이 발생하여 철수가 불가피하게 된다.
그러나 미제1기병은 금무봉을 탈환하지 못하는 가운데 제1군단은 예비인 제24사단을 군단 서측방으로 이동하여 금남동과 하산동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낙동강 서안도로를 다라 왜관 대안으로 진격하고, 제24-19연대는 현풍 대안에 머물고 있는 북한군 제10사단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우요곡절 끝에 19일 05:30분에 낙동강 도하지점에 도착하여 은밀도하를 개시하게 되고 적의 경미한 저항을 날이 밝자 항공기 지원으로 적진지를 공격하여 강안고지를 점령한다.
이날 제5연대전투단이 금무봉의 북한군 제3사단 제7연대를 공격하여 연대장을 비롯한 250여 명을 사살하고 19일 14:15분에 왜관에 진입하게 된다. 낙동강 철교 북쪽 1.6KM되는 지점에 왜관교두보를 구축하게 되면서 먼저 서측에서 도하를 개시한 미 제24삳간이 영 제27여단이 성주방향의 도로를 봉쇄한 가운데 강안도로를 다라 북상항여 미 제1기병과 김천으로의 진격을 위한 교두보가 확보된다.
하지만 작전지역의 주공인 중앙의 제1기병사단은 왜관 우측 직후방의 253. 300고지군에서 고전 끝에 19일 점령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1대대는 207명이라는 엄청난 전투손실을 입게 된다. 여기서 다부동 쪽의 제7기병연대가 적후방을 공격하여제8기병연대의 돈좌 상황을 타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제7기병연대장은 밤이란 이유로 전진을 중단게 되고 이로인해 제7기병연대장을 해임하고 포병 대대장인 제77포병 대대 해리스 중령을 제7기병연대장에 보임하게 된다.
9월 22일 왜관에 도보교가 가설되고, 중장비와 차량들이 도하하기 시작하여 , 우측의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가산을 완전 점령하고 적을 소탕하는 한편 다부동에서 제1기병사단과 연결된다. 제11연대는 유학산 북방의 천생산을 점령하고 제12연대는 대구-상주도로를 봉쇄하여 지대내 적 제1. 제13사단을 격퇴하고 상주로 추격하게 되었다.
반격작전 6일만인 22일에는 미 제1군단은 적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하였으며 지대내 적 제1.13사를 포위격멸한 다음 인천상륙부대와 연결작전을 위해 진격하게 된다.
2) 서남부지역 돌파작전
왜관 남쪽 서남부지역은 미 제25사단과 미 제2사단에 의해 전개된다. 이곳은 9월 23일 부터는 새로이 제9군단이 창설되어 통제하게 된다.
가) 창녕-영산지역 돌파작전 ※낙동강 대안상에 네이팜탄 260여 개 투하, 10일 부곡리에 도하성공, 교두보 확보
이곳은 미 제2사단(카이저 소장)이 북한군 제2. 제4. 제9사단 및 제10사단 일부와 대치하며 9월 16일 09:00시부터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작전 당일에 심한비로 인해 공중이나 화력지원 없이 공격을 개시하여 적의 저항으로 피해가 속출한다. 오후부터는 날시가 개어서 강력한 공중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하게 되고 적은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헸다.
17일에는 낙동강 대안상에 미 폭격기가 네이팜탄 110갤런자리 260여개를 투하하여 후퇴하는 적은 많은 장비를 유기한 채로 도주하게 된다.
18일부터 부곡리로 제38연대 정찰대가 도하하여, 기습적인 교두보를 구축하며, 적 132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20일에는 낙동강 지류인 신반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부곡리 북쪽지점에서도 공격단저을 이용한 기습도하에 성공하며 신반리 방향의 감제고지인 227고지를 점령, 참호안에 잠자고 있던 북한군 중령 1명과 그의 참모들을 생포한다.
22일 초계읍에 도달하고 적 제2. 제4. 제9사단 지휘부가 위치한다는 신반리를 공격하게 되면서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게 된다.
나) 마산서부지역 돌파작전 ※
마산서부지역은 미 제25사단이 북한군 제6사단 및 제7사단과 대치 중이었다.
사단은 9.16일 09:00시에 최초 공격 목표인 진주를 향해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앙의 필봉과 전투산이 적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8월의 킨특수임무부대 작전시에도 완전 소탕하지 못한 전례가 있어 사단은 별ㄹ도로 제35-제3대대장에게 이무를 부여하여 17~8일 양일간포병과 항공지우너하에 맹공을 가했으나 실패하고 특수임무부대를 해체 하였다.
그러나 19일 아침부터 적의 저항이 사라지고 철수를 하는 징후를 포착하여 각 부대들이 진출하게 된다. 제35연대는 진주고개로 진출하게 되고, 그러나 중앙의 제24연대와 제 27연대는 진출로가 험하고 간간히 적의 기습을 받으며 진출하게 된다.
3) 동부지역 돌파작전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9월 15일 안강평야와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남쪽에는 수도사단이, 포항 남쪽에는 제3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1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가) 형산강 돌파작전 ※ 피로 물든 형산강 돌파작전 , 전임 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결사코 포항 이남으로 철수를 반대하다 미 고문관과 마찰로 사단장을 그만두게 되는데, 당시에 장군이 "내려가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다시 올라서려면 이 형산강이 피로 물들여야 한다"고 했는데 실제 돌파작전간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동해안의 제3사단은 형산강 이남에서 포항의 북한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9.16~17일은 비가 억수로 솓아지는 가운데 도하작전이 모두 실패한다.
9월 18일 사단장(이종찬 대령)의 진두지휘아래 다시 도하작전을 감행한다.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31명의 자원결사대가 진출하여 교량 위에서 19명이 쓰러지는 가운데 교량 북단 제방을 확보하면서 후속 부대가 도하하게 된다.
9월 20일에 제26연대가 포항을 탈환하게 되는데 이미 적 제5사단 주력이 후퇴하고 일부병력기 남아 저항을 하였다. 일부는 서쪽 비학산으로 잠입했다.
나) 안강 돌파작전 ※ 피로 물든 형산강 돌파작전
안강은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의 일부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단의 1단계 작전목표는 청송-길안선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예비대 없이 3개 연대 병진 공격을 감행한다.
9월 16일 공격 당일 제1연대는 호명리와 양동에서 안강 동북방을, 제18연대는 갑산리에서 서쪽으로 기동하여 무릉산 북쪽 무명고지군을, 기갑연대는 중앙에서 무릉산으로 진출한다.
9월18일 기갑연대가 안강읍에 돌입하고 기계방향으로 진출하게되면서 적은 포위를 고려하여 후퇴하고 사단의 좌측에 제7사단 제8연대가 도덕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제1군단과 제2군다늬 간격을 메우게 된다.
북한군 제12사단은 환자들도 철수시키지 못한채 서북쪽으로 도주하는데 이 당시에 청명하여 공지합동작전에 유리하였으며 송요찬사단장이 장군으로 진급한다.
4) 중동부지역 돌파작전
중동부지역의 국군 제2군단은 9월 15일 제6사단이 신령에서, 제8사단이 영천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제1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여 제1단계 작전목표인 함창-예천-안동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할계획이었다.
가) 신령 돌파작전 ※ 21일 조림산 공격시 차량 170대를 이용한 증원부대 도착처럼 기만전술로 적에게 공포감을 주어 적이 22일 철수하여 무혈 점령
당시 국군제6사단은 갑령-화산분지선에서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당시 조림산에는 적 1개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갑령 서측에서는 제2연대(함병선 대령)이 그 동쪽 화산분지에는 제7연대(임부택 대령)이 예비는 제19연대(김익렬 대령)이었다.
9월 16일 08:00시에 제2연대가 조림산을 공격하여 일진일퇴의 격전이 계속되고, 17일에도 조림산을 탈환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적 후방에 1개 연대 규모가 증원준비하고 있다는 포로 진술을 확보한다. 이에 예비인 제19연대를 조림산 서북쪽으로 우회기동시켜 증원을 차단하고 양측방에서 공격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9월 21일에도 제2연대의 조림산 공격은 실패했다. 이에 차량 170대를 이용한 증원병력 증원처럼 진출시켜 적을 현혹, 양동작전이 성공하여 밤을 이용하여 적이 모두 철수하여 22일 조림산을 탈취하여 6일만에 목표선 도달
나) 구산동돌파작전 ※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채명신 대위)가 노고령을 우회기동으로 기습하여 점령함으로서 북한군은 보현산의 퇴로차단을 우려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영천을 탈환한 제8사단(이성가 준장) 제1단계 목표로 안동선을 계획하고, 그 중간선을 구산동-의성이었다. 그러나 적 제15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기룡산(961)과 보현산(1124)를 탈취해야 했다.
9월 16일 사단은 제10연대를 기룡산 남쪽 고지군에, 제21연대를 영천-구선동 도로 축선에 전개하고 제16연대를 예비로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9월 18일 계속된 공격에도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 노고령을 달리던 적 지프를 정찰대가 기습하여 부상당한 대위 1명을 생포하고 그의 가방에서 상부에 병력과 탄약이 부족하여 도저히 현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보고문을 획득하여, 9월 18일 일제히 3개 연대 병진으로 제10연대는 기룡산, 제21연대는 노고령, 제16연대는 보현산을 공격하여 21일 점령하게 된다.
당시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채명신 대위)가 노고령을 우회기동으로 기습하여 점령함으로서 북한군은 보현산의 퇴로차단을 우려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9월 22일 구산동으로 진출한다.
(다) 38선을 향한 추격작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개시 1주 만에 북한군의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북한군은 처음에는 인천상륙작전에도 불구하고 대구 또는 부산 점령이란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낙동강전선에서 강력히 저항하다가, 18일 김포비행장이 유엔군에 피탈되고 낙동강에서 유엔군의 도하작전이 성공하여 교두보가 확보되면서 다부동 서측방이 돌파되자 방어선에 균열이 생겨 9월 19일부터 주력부대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추격작전 명령]
미 제1군단 : 주공을 대구-김천-수원 축선에 두고 미 제10군단과 연결한다 제2사단은 합천-거창-안의-전주-강경 축선으로 무제한 공격
미 제25사단은 군의 남측방에서 진주를 공격하고 의명 서쪽 도는 북서방향으로 공격한다.
국군 제1군단 : 주공은 청하-영덕-평해 축선따라 공격, 족은 인지동-천지동-춘양축선 따라 무제한 공격
국군 제2군단 : 주공은 도원동-함창-충주축선다라 공격, 조공은 의성-안동-영주축선 따라 무제한 공격
9월 23일 국군과 유엔군 사령부는 부산에서 대구로 지휘소를 옮겨 개소하였다.
1) 인천상륙작전 부대와 연결작전
※ 9월 22일 "린치특수임무부대의 오발이 적 탄약차에 명중, 적 200명 수장 및 적전차 2대, 차량 50대, 10문 등 노획
※ 9월 23일 린치부대는 낙동리 도하지점에서 허리에 차는 강믈을 도섭으로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적 500여 명 사살
※ 9월 26일 18:00시에 "린치특수임무부대"선두인 "베이커 제3소대"가 진천부근 도착, 무자비한 진출로 전차휘발유가 고갈
※ 9월 26일 22:26분 오산 죽미령 일대에서 운명적인 미 제31연대와 만남. 연결작전 성공
연결작전의 주공인 미 제1군단은 최초 미 제1기병사단으로 왜관을 점령후 미 제24사단으로 김천-대전방향으로 진격하 ㄹ곟획이었으나, 돌파작잔시 초래된 상황변화로 먼저 왜관교두보를 확보한 미 제24사단(미 제5연대전투단, 영 제27여단 배속)이 김천-대전방향으로, 제 1기병사단을 동측 상주-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으로 투입하여, 국군 제1사단을 예비로 미 제1기병사단을 후속하도록 계획을 수정하였다.
9월 22일 미 제1기병사단장은 제7기병연대를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 제7기병연대장은 제3대대장 "린치중령'을 부대장으로 하는 "린치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9월 22일 08:00시에 선두로 다부동을 출발하여 22:30분에 도하장인 낙정리 도하장을 굽어볼 수 있는 돌출부에 도착했을 때에 선두 전차병이 대전차포를 발견하고 전차포 사격을 가하였다.
[오발이 탄약차에 명중하다]
하지만 전차를 더난 포탄이 은페된 적의 탄약차에 명중되어 포탄이 폭발하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대낮처럼 주위를 밝히는 바람에 인근에서 수중교를 건너던 적을 발견하여 200여명을 수장시켰다.
9월 23일 린치부대는 낙동리 도하지점에서 허리에 차는 강믈을 도섭으로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적 500여 명 사살한다.
9월 24일 사단 공병대는 낙동리에 전차 및 차량 도하를 위해 노무자 400명과 수중교를 개수하여 오후에 개통시켰다. 연대장 해리스 중령은 제777특수임무부대의 선두인 린치부대를 보은으로 출발시켰으며, 린치부대 선두는 제3소대장 "베이커 중위"가 앞장섰다.
9월 26일 진격을 재개하여 11:30분에 보은을 출발하여 오후에 청주를 지나 18:00시에 충북 진천 서남방 사암리 부근에서 휘발유가 고갈, 전차 6대중 3대의 휘발유를 다른 전차에 급유하고 있을 때에 적 차량 3대가 나타났다가 미군전차를 보고 차량을 놓고 도주하여 마침 실려있던 휘발유를 획득하여 충분히 급유한 후에 게속 야간에도 진출하여 20:30분에 천안에 도착한다.
베이커 소대의 진출시 인접에 북한군 철수 병력이 있기도 하고 일부 저항도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웃지못할 일은 적병에게 "오산"하고 길을 묻기도 했으며 체념한 북한군은 바라만 보았다.
9월 26일 22:26분 드디어 오산북방에 진출하고 있을 때에 죽미령 일대에서 사격을 받게 되었다. 미 제7사단 제31연대였다. 일순간 오인 사격이 있었지만 백린연막탄이 터지면서 보인 미군전차의 흰별을 식별하여 우군임을 확인하고 사격이 중지되었던 것이다.
2) 대전탈환 작전 ※ 9월 23일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성주를 공격하던 영 제27여단이 유엔공군기의 오폭으로 60여 명 사상자발생
※ 9월24일, 미 제24사단은 김천에서M-46 중형 패튼전차 6대를 잃고, 적 T-34전차 8대를 격파한다. 여기서 적 제849연대는 미공군의 공중폭격과 전차의 공격으로 전멸되고, 미 제5연대 전투단도 100여 명의 사상자 발생했다.
※ 9월 28일 대전시내 진입시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 부근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집단학살되어 매몰된 국군을 목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대전시내에서 5,000~7,000명의 민간인, 17명의 국군, 40명의 미군이 살해되어 매장된 것을 찾아냈다.
배속된 미 제5연대전투단과 함게 왜관교두보를 확보한 미 제1군단의 주공미인제24사단은 9월23일 왜관-김천간 경부국도를 따라 추격작전을 전개한다. 제24-19-1대대가 성주를 탈환하여 영 제27여단에 인계한다.
북한군 제105전차사단은 후퇴하면서 요소요소에 그들의 전차를 위장시켜 매복시키고, 도로상에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대전차포를 매치하여 아군의 진출을 방해하였다.
9월 24일 미 제5연대전투단이 새벽에 미 제21여대를 초월하여 김천으로 진격을 선도하였다. 김천에는 적의 전선사령부와 제1군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에 적은 제9사단, 제105전차사단의 잔류부대, 제849독립전차연대를 투입하여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M-46 중형 패튼전차 6대를 잃고, 적 T-34전차 8대를 격파한다. 여기서 적 제849연대는 미공군의 공중폭격과 전차의 공격으로 전멸되고, 미 제5연대 전투단도 100여 명의 사상자 발생했다.
9월 25~27일 김천시가 피탈되자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하고, 27일 옥천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이곳부터는 대전에 가가워지며 김천에서 처럼 적의 저항이 거센 가운데 패잔병 3000명을 포로로 하고, 적 전차 13~20대를 파괴하였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일에 때맞춰미 제24-19-2대대 정찰대와 제3야전공병대대 지뢰 제거조가 대전외곾에 돌입한다. 이들 부대는 바로 지난 7월 20일 대전을 철수할 때 사단장을 잃고 철수하던 부대였다.
9월 28일 대전시내 진입시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 부근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집단학살되어 매몰된 국군을 목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대전시내에서 5,000~7,000명의 민간인, 17명의 국군, 40명의 미군이 살해되어 매장된 것을 찾아냈다. 이 인원들은 공산군이 7월 20일 대전을 함락훙에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 애국시민, 관리, 저명인사들을 대전형무소나 천주교 교회당에 집단 수용했다가 유엔군이 낙동강을 도하하던 9월 21일부터 손을 뒤로 묵은 후에 100명 또는 200명씩 미리 파놓은 호에 끌고가 총으로 사살하고 집단매장했다.
미 제24사단은 대전 탈환후에 대저에서 낙ㄷ오강에 이르는 병참선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후방지역 소탕작전] ※ 9월 25일 국군 제1사, 낙동리를 도하하여 상주-충북일원에서 게릴라 소탕작전 : 적사살 4,543명, 포로 5,211명, 각종 포 36문을 획득하고, 피해는 전사 355명, 부상 1,023명, 실종 77명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추격작전간 미 제1군단의 예비로서 낙동강을 도하여 선산-상주로 전진하라는 군단 명에 따라 9월 25일 낙동리에서 도하하여 추격대열에 참여한다.
사단은 선산-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으로 진출하며 낙동강전선에서 소백산맥을 따라 월북을 기도하는 적 사단들의 패잔병을 추격하여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소탕하였다. 충북일대에서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청주에 지결하게 되는데 전과는 적 사살 4,543명, 포로 5,211명, 각종 포 36문을 획득하고, 피해는 전사 355명, 부상 1,023명, 실종 77명이었다.
3) 금강선 차단작전 ※
낙ㄷ오강 서남부 전선에서의방격작전은 미 제9군단에 의해서 통제된다. 예하의 미제2사단과 미 제25사단으로 낙동강 서안에 확보한 교두보와 남강 남족에 구축한 공격의 발판으로 추격작전을 전개하여 강경을 점령하고, 금강선을 확보하여 경부축선 서부지역의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지대내 적을 격파하게 된다.
가) 강경점령 ; 미 제2사단이 9월 22일 추격작전을 개시하여 합천-거창-안의 전주를 거쳐 9월 30일에 강경도착
기간 중 적 사살 360여 명, 포로 757명과 야포 23문 대전차포 32문 박격포 22문, 트럭 17대, 탄약 425톤 등 노획하고 손실은 전사 32명이 발생한다.
미 제2사단은 합천-거창-안의-전주-강경을 점령하는것이다. 9월 23일 신반리를 점령하게 되고, 저항하는 적 제2. 제4. 제9사단 일부는 합천을 통과하였다. 25일, 사단은 공군의 53회 출격 지원 속에 적 300여 명 격멸하고 거창으로 진격한다. 26일에는 거창에는 북한군 제2사단(최현소장)이 차량과 중장비를 모두 버리고 무질서하개 퇴각하게되며 450명이 생포되었으며, 적 45명이 수용되어 있는 야전병원도 점령하였다.
9월 28일 전주에 도착하여 적 제102, 제104경비연대 300여 명 중 100여 명 사살, 170명 생포하게 되며 , 너무 달려오다 보니 연료보충이 어려웠지만 연락기를 이용하여 보충을 받게 다시 진출한다.
9월 29일 전주를 출발하여 9월 30일 03:00시에 강경에 도착하여 목표를 달성하고, 통과된 지역에 대한 후방경계작전에 돌입하여 지대내 패잔병 소탕작전을 벌인다. 기간 중 적 사살 360여 명, 포로 757명과 야포 23문 대전차포 32문 박격포 22문, 트럭 17대, 탄약 425톤 등 노획하고 손실은 전사 32명이 발생한다.
나) 군산점령 ; 미 제25사단은 제24연대의 "매튜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진주-하동-구례-남원-순창-김제-이리-군산으로 진출
※ 하동경유 구례로 향하던중에 민간인들로부터 미군포로가 끌려가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 하동 북방 11km지점에서 11명을 구출한다. 28일 정오 남원에 진입시 기습을 달성하여 86명의 미군을 구출
제35연대는 "돌빈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진주-함양-남원-전주-이리 -강경을 경유 금강선으로 진출
미 제25사단은 진주를 탈환하고 의명 서측방 혹은 서북방으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단은 9월 23일 공격을 개시하여 진주를 25일 점령하고, 이 과정에 남강교량이 파괴되어 있어서 진출이 다소 지연된다. 26일에는 강을 건너 의령읍으로 진입한다.
무제한 공격하라는 명령에 미 제25사단장은 제24연대의 "매튜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진주-하동-구례-남원-순창-김제-이리-군산으로 진출시키고, 제35연대는 "돌빈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진주-함양-남원-전주-이리 -강경을 경유 금강선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매튜스특수임무부대는 하동경유 구례로 향하던중에 민간인들로부터 미군포로가 끌려가고 있다는 정보를 받아 하동 북방 11km지점에서 11명을 구출한다. 28일 정오 남원에 진입시 기습을 달성하여 86명의 미군을 구출한다.
9월 29일에 군산에 미 제25-24-1대대가 무혈입성하였다.
4) 동부지역 추격작전 ※ 9. 30일 제3-23-3대대 전초중대가 국군 최초로 38선 돌파 양양 근처 도착
※ 국군 제3사 전과 : 적 사살 1,351명, 포로 230명, 각종 소총 700여 정, 중화기 230여 정(문) 전차 2대 노획. 사단손실은 전사 71명, 부상 477명, 실종 2명
동부지역 추격작전은 국군 제1군단에 의해서 진행ㄷ되었다. 군단은 9월 22일 안강-형산강선에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기계-청하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육본에서 춘양-평해선까지 총공세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공을 제3사단, 조공을 수도사단으로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동해안 축선도로와 산간도로를 따라 9월 23일부터 추격작전을 전개한다.
가) 흥해-인구리 추격작전
국군 제3사단은 9월 22일 청하-평해 축선을 따라 공격 명령을 받고, 동해안의 7번도로상에 주력을 지향한다.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5사단으로 이들은 지난 1주일 동안 국구늬 돌파작전으로 거의 불가능의 상태로 동해안 도로를 따라 철수하고 일부는 비학산으로 잠입하였다.
9월 23일 공격을 개시하여 청하를 탈환한다. 25일에는 영덕을 탈환하였다. 영덕에서는 미 고문관의 주선으로 차량 25대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기동력이 향상된다. 9월 28일에는 삼척 남쪽까지 진출한다.
9월 30일 08:00시강릉남쪽 운산리까지 진출한 다음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15:30분에 강릉을 점령했다. 이 당시에 수도사단 제1연대도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진격한다.
한편 영덕에서 청송방면으로 우회한 제22-3대대도 청송-진보-청리-영양-철암을 거쳐 삼척으로 나와 강릉에서 합류했다. 강릉탈환 훙에 제22연대가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제23연대는 계속진격하여 9월 30일 23:00시에 제3대대 전초중대가 38선을 넘어 양양부근까지 진출한다.
나) 기계-서림 추격전 ※수도사단 제18연대 수색대 9월 30일 , 장평리 북쪽에서 창촌을 경유하여 38선 직후방 서림리까지 진출하고 그 선두는 이미 서림을 통과하여 38도선을 돌파하고 수색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제18연대 수색대도 제일먼저 38도선 돌파 양양 진입 주장
기계를 탈환한 수도사단은 9월 22일 군단의 조공으로 인지동-천지동-춘양축선을 따라 공격한다. 정면의 적은 제12사단이다.
사단은 9월 23일 공격을 시작하여 제18연대가 25일 청송을 점령하고, 이때 우인접 제3사단은 영덕을 점령하고, 좌인접 제2군단의 제8사단은 안동을 점령했다.
9월 27일 춘양으로 진출하게 되고, 적 제12사와 제5사의 일부는 영월-대화를 경유 오대산으로 도주하고 일부는 인근 산악지대에 은거하게 된다.
9월 29일 사단정면의 적 제12사단과 제5사단 일부가 오대산 산악지대를 경유 38도선 이북으로 패주하고 있었다.
9월 30일 제18연대가 장평리 북쪽에서 창촌을 경유하여 38선 직후방 서림리까지 진출하고 그 선두는 이미 서림을 통과하여 38도선을 돌파하고 수색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5) 중동부지역 추격작전 ※ 신림고개 일대에서 국군 제2군단 및 제6사단 지휘소 피습, 패잔병 2,00여 명이 진출로상에 은거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많은 사상자 발생, 북한군 패잔병들은 원주에서 1,000~2,000명의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국군 제8사단과 제6사단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사실은 "인재"였다는 후문이 있음
중동부지역 추격작전은 국군 제2군단이 전개한다. 군단은 9월 23일, 제6사단을 주공으로 신녕에서, 제8사단을 조공으로 구산동에서 추격작전을 전개한다.
가) 신령-춘천 추격작전 제6사단 10.2일 춘천 탈환
국군 제6사단은 9월 22일 조림산을 탈환하고 도원동-함창-충주 축선으로 공격하며 전방의 적은 북한군 제8사단 (오백룡소장)으로 조림산에서 물러난 후 안동-영주-단양 방면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6사단은 9월 25일 낙동강변에 도착하여 야간도하로 함창까지 진출하고 다음날 점촌에서 집결하였다.
9월 27일 사단은 제2연대가 보은 괴산으로 진출하고, 제19연대는 점촌 북방 유곡리에서 적과 조우하여 물리치고, 제7연대는 문경까지 진출한다.
9월 28~30일 28일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진입한 다음 30일에는 제2연대가 선봉으로 원주로 진입하고 제3대대는 횡성까지 진출하였다.
10월 1일 제2연대가 춘천으로 진입하게 되며 원창고개에서 적 1개 중대의 저항을 격퇴하고 진입한다.
이 무렵 적 제2군단의 패잔병 2,000여 명이 국군 제8사단에 쫒겨 제천에서 원주에 이르는 신림고개 일대에 고립되어 있다가 북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철수로상에 있던 제6사단 지휘소와 제2군단 지휘소가 피격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북한군 패잔병들은 원주에서 1,000~2,000명의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나) 의성-동두천 추격작전 제8사단 10.2일 춘천 탈환
영천의 제8사단이 보현산을 탈취하고 구산동을 점령하던 9월 23일 군단의 조공으로 의성-안동-영주-축선을 따라 북으로 공격하게 된다.
9월 24일 제8사단은 의성의 적을 포위 공격하여 100톤의 살과 물자, 그리고 1개 사단 장비에 해당하는 많은 장비를 노획한다.
9월 25일 안동으로 진출하는 가운데 적이 돟하를 방해하는 저항을 계속하면서 항공지원으로 적을 강타하여 무력화 시키며 시내 진입
9월 27일~29일 적 제8사단을 추격하여 제10연대가 사단의 선봉으로 단양 진입, 충주-원주-횡성-용두리-양평-양수리-수유리-의정부축선으로 진격명령을 받고 진출하게 된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제8사단장 이성가 준장의 엉뚱한 판단?]
신림고개(일명 치악고개)일대에서 적 1개 연대와 조우하게 되는데, 이미 원주로 진출한 국군 제6사단에게 퇴로가 차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제8사단장은 군단에 보고하고 협공을 건의한다. 그러나 국군제6사단과 협동작전을 실패했고 앞에서 기술한 대로 퇴각하는 적의 제2군단사령부와 제6사단 지휘소가 피습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성가 장군은 술회에서 제6사단이 병력을 야간이니 개활지에 배치하여야 하나
좌우측방 고지 위에 배치하여 적이 모두 빠져났다는 것"
10월 2일 사단은 원주엣서 양평으로 진격하고 그 이튿날 양수리-도농-미아리에 도착하여 부대정비를 한다
10월 6일 제8사단은 의정부를 경유하여 동두천으로 진격한다. . 동두천에서 일부 낙오병과 애국청년단과 공동투쟁하던 마차산 유격대들과 만나 사단 특수유격대를 편성한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은 경주에서 군예비로 집결해 있다가 제6.8사단을 후속하여 9월 말 문경으로 북상한다. 이후 제2군단에 배속되어 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에 도착하여 포천으로 이동하여 차후작전에 대비하게 되었다.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38도선 북으로 도주한 병력은 25,000~30,000면 선이고, 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이 9,294명이었다.
(라) 38선 돌파 북진
1) 국군의 38선 돌파 결정
"이 고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38도선이 기하학적으로 뚜렷한 선이나 장벽ㅇ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공격하게 해 달라"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명령으로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북진명령서를 하달, 정총사령과는 제8군사령관을 만나기 전에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에게 연락하여 "지금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이 진격시 큰 손실을 입게 될 고지가 없겠느냐?"고 물었고 얼마 후 제3사단 정면 38도선 북쪽(하조대)에 그런 곳이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정일권총사령관은 제8군사령관 워커를 방문하여 38도선 북방에서 적의 치열한 사겨그로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부득이 이 고지를 점령해야겠다고 말한 다음 " 이 고지를 점령했다고 해서 38도선이 기하학적으로 뚜렷한 선이나 장벽ㅇ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공격하게 해 달라"고 역설하자 워커가 승인한다.
9월 30일 이렇게 하여 정 총사령관이 강르의 제1군단을 방문하고, 38선에 도달한 제3-23연대의 진지에 나가 보고 구두명령을 먼저 네ㅐ리고 이어 성문화된 명령을 내리어 역사적인 1950년 10월 1일 38선 돌파작전이 전개된다.
2) 원산-평양 탈환작전
◆피아의 작전계획
● 북한군의 방어계획
북한군은 9월말 가지 약 25,00030,000명이 겨우 38선을 넘억 갔고, 나머지 3만여 명이 지리산과 소백산맥, 태백산맥 일대에 잠입하여 유격활동을 하거나 이북으로 북상을 기도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으로 나누어, 서부지역은 최용건이 지휘하는 서해안방어사령부 주도하 배천-개성-고랑포-사미천 지역 일대에서 새로 편성된 제19. 제27. 제43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을 배치하여 방어하고, 동부지역은 김책 전선사령부가 지휘하여 북상하는 제5. 제12. 제15사단과 후방지역 예비부대들로 의정부-철원, 포천-김화, 춘천-화천 사이의 도로방햐에 집중하여 방어에 임하게 된다.
● 국군과 유엔군 북진계획
9.27훈령에 의거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해 38선 이북으로 작전을 확대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0월 2일 북진명령을 하달하였다.
[ 맥아더의 북진 명령]
가. 미 제8군은 주공으로 38도선을돌파하여 개성-사리언-평양 축선으로 공격하고
나. 미 제10군단은 주공이 공격을 개시하면 1주일 내에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 후 원산-평양 축선으로 서북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과 연결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하라
다. 유엔군은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연결하는 선까지만 진격하고, 그 이북은 한국군이 전담하게 한다.
가) 원산 탈환작전 ※7번국도에 5개 연대가 북적, 선착순으로 원산으로 진격, 상급부대 명령으로 수도사단이 내륙으로 진출로 변경
※10. 9일, 수도사단이 철령고개 88개 굴곡부를 철야작전(차량에 시동걸고 라이트를 밝혀 지원부대 도착위장)으로 넘어가 신고산 점령, 적 1개 사단분의 장비와 물자 노획, 따발총 3,000정, 화차에 실려 원산으로 수송 중이던 전차 6대, 경기관총 500정, 소총 5,000정 의약품 1개 화차분 노획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를 선봉으로 10월 1일 05:00시에 양양 인구리 북쪽 진지에서 38선을 넘어 양양으로 진격하여 10월 1일 14:00시에 양양에 진입한다. 같은 시기에 서림 북쪽에서 38선을 돌파한 수도사단도 제18연대를 선두로 양양에 들어왔다.
국군 제3사단은 10월 4일 고성을 점령하고 5일에는 장전을 점령한다. 제18연대는 간성에서 진로를 바꾸어 원통-양구로 공격하게 하여 부대가 집중되는 것을 조정하게 하였다.
10월6일 제3사단과 수도사단에 원산 공격명령이 주어졌다.
제3사단의 뒤를 따라 수도사단의 기갑연대와 제1연대도 북상하여 7번국도에 5개 연대가 북적였다. 반면 수도사단 제18연대는 양구로 진출하여 문등리 게곡을 타고 회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0월 7일 수도사단이 회양-신고산-원산으로 진출, 제3사단이 계속하여 동해안 도로 따라 진출명령, 선두의 제1기갑연대와 제1연대가 태백산맥의 추지령을 넘어 화천까지 진출하고, 제18연대는 계속하여 말휘로 진출한다.
10월 9일 내륙으로 진출하는 수도사단이 철령(685), 88개 굴곡부를 철야작전으로 넘어 신고산으로 진입, 적 1개 사단분의 장비와 물자 노획, 따발총 3,000정, 화차에 실려 원산으로 수송 중이던 전차 6대, 경기관총 500정, 소총 5,000정 의약품 1개 화차분 노획, 후속하던 제1기갑연대(-)가 잔적소탕작전으로 적 200명 사살, 소화기 1,500정, 탄약 2백만 발, 양곡 3트럭 분 노획, 기갑연대 제1대대가 안변도착
제3사단 제23연대가 남대천 도하, 갈마반도의 원산비행장과 원산시가지 공격할 수 있는 위치 확보
38도선-원산간 진격로
함흥
흥남 동해
영흥
평원선 고원
원산
상음
안변 국3사
수도사
신고산 황룡산 통천
회양 화천 수도(-)
경원선 말휘리 금강산 고성 국3사
평강 간성
금화
대우산
철원 양구 수도-18연
원통
인제 양양
[원산 탈환전] ※10. 10일 국군 제3사-23연대와 수도사단 기갑연대의 원산진입 쟁탈전,
제3-26연대와 수도사단 제18연대의 여왕산 쟁탈전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의 심판 : "양 개 사단 공히 10일 05:00시에 공격, 10:00시에 동시 점령"
당시 원산에는 북한군 약 2만여 명으로 제249여단으로 원산방어사령부가 설치되고, 제42사단 신편 및 제12사단 재편성(제5사단일부 포함)과 패잔병 3,000여 며이 석왕사 주변에 집결되고, 강릉여단 2,000여 명, 해군사령부 직속 1개 대대, 공군사령부 직속 1개 중대 등이 있었다.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의 원산공격작전이 개시되었다. 먼저 원산시가지를 감제하는 2개의 고지군, 하나는 시 동쪽끝의 189고지. 136.73고지구이고 다른 하나는 여왕산(143)고지군이었다. 이날 10:00시에 양개 사단이 동시에 원산을 점령하게 된다.
원산 탈환시 무참히 학살당한 양민이, 여왕산 기슭 신풍리 방공호에 300여 명, 원산 앞바다에 230여 명 등 600여구 발견
3) 중부전선 38선 돌파
중부전선의 38선 돌파는 제2군단이 전개한다. 제2군단은 제6사단이 화처네회양-지경리(원산외곾)으로, 제8사단이 철원-평강-용지원리(신고산북쪽)로, 제7사단이 제6사단과 협조하여 금화를 점령한 후 에비로 후속하도록 한다.
10월 3일 ~8일 제일 먼저 국군 제6사단이 10월 3일 춘천 모진교(일명 38교)에 도달하고, 10월 7일에 제8사단이 동두천 북방 초성리로 진출한다. 당시 군단 에비인 제7사단은 10월 8일 포천 북방 양문리로 진출한다.
10월 6일~10일 38선 돌파명령에 따라 국군 제6사단이 모진교에서 돌파하여 8일에 화천을 점령하고 10일에는 금화를 점령한다.
10월 8일~10일 좌측의 제8사단은 초성리에서 돌파하여 전곡을 점령하고 10월 9일에 연천, 10월 10일에 철원을 점령한다.
한편 예비인 제7사단(신상철 준장)은 양문리에서 돌파하여 10월 10일에 금화부근 지경리로 진출한다
10월 10일 국군 제1.2군단에 주어진 명려은 다음과 같다
● 국군 제1군단 : 미 제10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우너산항을 확보하고 영흥을 확보하며 흥남축선을따라 진격
● 국군 제2군단 : 가능한 한 신속히 원산으로 전진, 미 제1군단과 합세하기 위하여 좌측 평양을 향하여 공격
4) 평양 탈환작전
가) 38선-평양외곾선 진격작전
미 제1군단의 주공인 미 제1기병사단응ㄴ 평영공격을 위해 도로망이 양호한 개성-평양에 이르는 1번도로를 따라 진격한다. 사단은 3개 연대 병진으로 진출하고 영국군 제27여단을 예비로 화였다.
미 제1구단은 10월 9일 09:00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38도선-평양 진격작전
평양 국1-15연. 국7-8연
국1사
상원 율리
흑교리
미1-5기병
대동강 수안 국7-8연
진남포 황주 능리
미1기병사
사리원 신계
미24-19연 영27여
제령 시흥
한포리 시변리 국1사
금천
예성강
해주 배천 개성
연안 미 24사 미 1기병사 국1사
미 제1기병사단의 죄알선인 제7기병연대는 예성강철교를 이용하여 돌파작전을 감행하며, 적 제43사단의 강력한저항을 받게된다. 사단 중앙의 제8기병연대는 개성-금천간 도로를 따라 진격하지만 적이 많은 지뢰를 매설하여 개성북쪽 3.5km지점의 송악산을 점령하는데 그쳤다. 사단의 우일선인 제5기병연대는 장단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우회기도을 하면서 10월 9일 19:30분에야 38선에 도달한다.
그러나 진출간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진출속도가 느렸으며, 이에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영 제27여단으로 금천 우측방을 공격하하게 한다.
금천 한포리 간에서 미 제7기병이 먼저 한포리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 북진하는 제8기병을 피해 북으로 철수하던 북한군 1,000여 명이 차량에 탑승하여 후퇴하다 포위망에 걸려 인민군 500여 명 사살되고 201명이 생포된다.
10월 15일, 미 제1기병ㅅ단이 금천을 점령하였다.
[국군 제1사단 38선 돌파. 10.11일]
※ 미 제10고사포단장 헤닝 대령의 "보.전.포 협동 돌파작전" 건의, 고사포단에서 차량 50대 지원
진출간 북한군이 사전에 매설한 지뢰제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됬으며, 이로 인해 전반적인 진출 속도가 느렸다
반면 미 제1기병사단이 38선을 돌파하여 금천포위작전을 할때에 국군 제1사단은 10월 9일 15:00시에 제15연대 제1대대로 고랑포를 돌파하게 한다.
10월 11일 미 제1기병사보다 2일 늦게 38선을 돌파한 국군 제1사는 첫번째 목표인 38선 전방 32km지점의 시변리를 공격하게 된다. 10월 13일 시변리 점령
[10월 10일, 육본의 국군 제2군단에 평양공격 명령 하달]
이에 국군 제6사단 선봉인 제2연대가 10월13일 신고산을 출발-원산경유-언산-평양간 도로를 따라 덕원까지 진출
좌익 제8사단은 13일 이천을 점령하고 마식령산맥을 넘어평양을 향해 신계방향으로 진출, 국군 제1사와 혼재되지 않도록 곡산쪽으로 전환 평양 동북방 진격 명령
예비인 제7사단은 10월 12일 평강으로 진출하여 지대내 잔적소탕 중에, 10월 14일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평양공격 참여
◆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의 주사위 "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는 부대에 평양 입성 영광을 주겠다"
1번국도로 진출하는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사단, 영 제27여단 장병들은 먼저 평양을 점령하려는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 "너희들이 대적하고 있는 부대는 소련군이다" 북한군 1,700여명과 간호원 13명 투항
10월 17일 미 제7기병연대가 진출하는 사리원 - 황주 간 도로 주변 고지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이대 제7-1대대장 크라이노스 중령이 기지를 발휘하여 한국군 통여관에게 적진에 접근하여 큰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너희들이 대적하고 있는 부대는 소련군이다" 이 소리에 1 소대병력이 실제 크라이노스 대대장 앞으로 다가왔고 생포되며 연쇄적으로 줄을 지어 투항하면서 무려 1,700여 명의 병사와 13명의 간호원이 대대에 투항했다.
먼저 사리원을 점령한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공격을 담당하고, 미 제24사단은 진남포 방향으로 진격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의 평양 진격]
10월 14일 신계점령후 상원- 율리 축선 진출계획 논의, 제12연대가 우익에서 신계-수안-율리 축선으로, 제11연대가 좌익에서 신계-능리-상원 축선으로 진격하고 제15연대는 예비로서 사단사령부와 제12연대 후속한다.
10월 17일 주공인 제12연대가 수안에서 율리로 진격, 17:00시에 점령하고 상원으로 진격하고, 제11연대도 18:00시에 상원으로 진출하여 평양공격을 눈 앞에 두게 된다. 사단은 제1군단장 밀번에게 전차 1개 중대를 요청하여 2개 중ㄷ대 50대의 전차가 평양공격에 가담하게 되었다.
나) 평양 입성
미 제1군단은 10워 17일 평양외곾선인 활주-율리선까지 진출하여 평양까지 40km를 앞두고 있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이 원산-평양축선으로 서진하여 동양까지 진출하고, 제8사단은 평강으로부터 3번도로를 따라 양덕남쪽 17km까지 진출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제8사단을 후속하여 마식령산맥을 넘어 예성강 상류의 곡산으로 진격하고, 그 중에 제8연대가 17일 오후에 율링에 진출하였다.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선두 입성 명령]
정일권 총참모장이 제2군단 방문, 율리로 진출하여 제8연대장(김용주 대령)에게 평양을 미군보다 먼저 탈환하라는 대통령 명령 하달한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 중에 제6사단을 제외한 2개 사단이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최인 소장)하고 있었으며, 황주-율리 선이 무너지자 대동강 및 동평양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부 정부판단에 의하면 북한군은 제17사단과 제32사단 소속의 잔류병 8,000여 명이 바어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였다.
10월 18일, 평양 탈환작전이 개시되었다. 미 제1기병은 황주에서 양호한 경의선 철도와 국도로 평양 남쪽을 공격하기 위해 흑교리까지는 별 저항없이 진출한다. 그러나 흑교리 일대에 지뢰지대와 적 전차 3~4대가 전차호 속에서 버티고 있어 진출이 돈좌 되었다.
10월 19일, 제7기병이 다시 공격하자, 이미 적은 야간에 철수한 상황이었고, 이에 사단장은 공격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초월하여 제5기병이 진격하여 11:02분에 동평양을 점령한다.
[10. 19일 11:00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 선두 평양 입성]
※제11연대 : 추을미 일대에서 적 3,000여명 투항, 1/3이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의용군으로 대부분 귀가조치
※ 미 제1기병 제5기병연대 제2대대 F중대 진출시 대동강 철교와 대동교는 철수하는 북한군이 폭파했다.
한편 평양 동측방을 향해 공격을개시하였다. 사단은 적정을 고려하여 상원의 제12연대가 주공으로 보.전협동으로 제11연대를 초월하여 대동리-선굘리 대동교 축선으로 진격하고, 율리의 제15연대가 조공으로 삼등-강동 축선을 따라 평양 동북방으로 우회기동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0월 18일 제12연대 보.전조가 대동리 못미쳐 관음산과 반용산 사이 애로지역에서 적 2개 대대로부터 사격을 받는다. 대동리를 돌파하여 진출 중에 대동리 북쪽 1km 지점에서 적 1개 연대규모의 저항으로 진격이 돈좌되었다.
한편 10.17~18일, 율리를 출발 삼등으로 우회한 제15연대가 평양시내에 있는 대동교로부터 서쪽 11km 지점ㅇ에 있는 대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쌍강포 상류쪽 남안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다음날(19일) 도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19일, 제12연대가 여명을 기해 공격해 들어가자 이미 적은 도주한 상태였으며 전차에 탑승하여 동평양으로 진출 중에 적의 제3저지선에 봉착하였으나 적 300여 명을 사살하며 진격하여 11:00시에 동평양의 선교리 로터리에 진출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한 부대가 되었다.
또한 제12연대 우측에서 미림비행장과 문수리비행장(평양비행장)을 목표로 진격한 제11연대는 인민군총사령부가 있던 추을미 일대에서 퇴로가 차단돤 적 3,000여 명이 투항하여 이들을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했다. 이들 포로의 1/3은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의용군으로 이들은 간단한 심사를 거쳐 바로 귀향조치하였다.
평양의 동북방으로 우회기동한 제15연대는 19일 05:00시에 도하를 실시하여 본평양 모란봉과 김일성대학을 목표로 진격한다. 14:50분에 모란봉을 점령하게 된다.
10월 19일 미 제1기병 제5기병연대 제2대대 F중대가 11:00시경 동평양에 도착, 대동강 철교와 그 북쪽 제방을 화보하라는 임무수행을 위해 확인과정에 적이 모두 폭파하였다.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의 최초 평양입성은 사실인가?]
전쟁사에는 제7-8연대(김용주 대령)가 국군 제1-15연대를 후속하여 본평양에 진출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지금도 제8연대 참전용사님들은 제8연대가 먼저 동평양에 들어갔다고 증언하고 평양입성 기념행사도 실시하였다.(내가 현역에 남아 있을 때는 그랬다).
지금 전쟁사의 기록은 모두가 제15연대 후속이라고 기록하지만 이분들은 제15연대가 도하한 장소보다 위에서 먼저 도섭하여 동평양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 제15연대 병력이 와서 본인들이 먼저라며 나가달라하여 그 자리에서 옥신각신 하며 있는데 제1사단 지휘관이 와서 강제로 제8연대 선발대를 밀어내고 독식했다는 주장이다.
10월 20일 야간에 미 공병이 대동교와 반월도 사이에 부교를 가설하여 모든 부대들이 대동강으 도하하게 되며 20일 10:00시를 기해 평양은 완전 장악되었다.
[맥아더 원수의 미 제1-5-2-F중대 사열, "전쟁초기부터 있던 자가 있으면 나오라? ]
미군중에제일먼저 평양에 입성한 F중대를 10월 21일 맥앋더 원수가 평양 비행장에 내려 사열한다. 그리고 전쟁 초기부터 있던 병사는나오라고 하자 5명(처음 보긱 인원이 200여 명)이 나오는데 그증에 3명은 그나마 부상병이었다.
이 평양 탈환 작전간 미군은 "인디언 헤드"라고 부르는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평양의 주요 기관및 관공서에 들어가 정보자료를 획득하여 10월22일 동경으로 후송하였다.
10월 30일 평양시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환영식이 거행된다.
5) 압록강. 두만강을 향하여
10월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맥아더 전략회담 " 추수감사절 안에 적의 공식적인 저항을 종식시킬 수 있다"
가) 압록강을 향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입서을 눈앞에 두고 흑교리로 진격하고 있을 때에 평양방어사령부는 1개 연대만 평양에 남긴 채 사리원과 철원 및 평강방면에서 후퇴한 병력과 합류하여 그 주력을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당시 북한은 수도를 평양에서 신의주로 다시 강계로 옮겼다. 그들은 단계별 방어선을 1차는 안주-개천-덕천을 연하는선, 2차는 희천선, 3차는 강계선을로 설정하고 독전대를 편성, 폭압적인 방법으로 결사항전을 요구한다.
맥아더 사령부는 38선을 돌파하고 돌파작전을 하던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 사령관과 트루먼 대통령이 전략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맥아더는 승리를 낙관하며 "추수감사절 안에 적의 공식적인 저항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호언하게 된다.
10월 17일 맥아더 라인 설정 , 서해안 선천에서 동해안 성진ㅇ에 이르는 새로운 목표선으로 종전의 정주-함흥 선보다 48~64KM 북상한 선으로 이 선의 북쪽은 국군이 전진하도록 한다.
['50. 10. 16일, 국군 제3군단 창설]
재창설된 국군 제5사단('50.10.8일 재창설), 제11사단('50.8.7일 창설)을 배속받아 10월 16일 창설되어 국군의 후방지역 방어임무 수행한다.
◆ 청천강선 확보
● 10월 20일~21일 숙천-순천 공수작전 : 적 사살 2,000명, 포로 3,818명 획득
20일,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이 평양 북방 약 56KM지점인 숙천. 순천지역에 수송기 113대가 참여하여 105밀리 곡사포와 탄약, 90밀리 대전차포, 차량 등이 공중 투하 된다. 투하 작전간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진출하는 국군 제6사단, 영국군 제27여단과 연결된다.
21일, 순천에 공수된 제2대대가 순천 북쪽 약 9KM지점 터널에서 200여명의 미군포로가 학살되었다는 주민제보로 수색작전을 실시하여 미군 23명을 구출하고 66구의 시체를 찾아냈다.
이 작전간 적 사살 2,000명, 포로 3,818명 획득하고, 미군 피해는 공수낙하시 46명, 지상전투시 65명 등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청천강으로 진출
20일, 국군 제2군단은 평양 탈환작전시 미 제1군단의 급속 진출로 제7-8연대를 제외하고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9일 평양탈환 당시에 제6사단은 평양 동북방 50KM 지점의 성천을 점령하여 20일에 미 제187공정연대의 공수낙하부대와 조우하면서 청천강으로의 진출이 먼저 시작되었다.
[국군 제6사단]
21일, 국군 제2군단의 공격목표는 희천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6사단은 10월 21일 06:00시에 순천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8군의 선봉으로 청천강변 개천으로 진격한다.
북진작전 상황도
중강진
만포진
강계
초산(10.26)
벽동
수동
회목동 국6-7연
구성(10.31) 온정리(10.25)
신의주 희천(10.25)
태천 운산(10.25) 국6-2연
정거동(11.1) 미5연 국2사
곽산 영변 구장동 영원
미21연 정주 개천 덕천
신안주 안주 맹산
영27여
숙천 미24사 순천 국6사
국8사
성천 국6사
평양 국7사
미1기병사
[이제 전쟁은 끝났다,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21일 "개천에 무혈입성"
"신안주에서 출발한 적 기관차를 개천강 철교에서 기습하여 10량의 보급품 화차와 T-34 전차 8대 노획"
"인민군 복장으로 가라입은 제6사단 장병"
21일, 제7-2대대는 선두에서 차량에 탐승하여 개천으로 달렸다. 경미한 적은 그대로 놓고 달리며 전쟁은 끝났다고 외쳤다. 그저라 적은 대부분 총을 버리고 주변의 산림지대로 흩어져버려 총 한방 쏘지 않고 개천에 무혈입성했다. 그리고 신안주에서 출발한 적 기관차를 개천강 철교에서 기습하여 10량의 보급품 화차와 T-34 전차 8대 노획"
22일, 제6사단-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제1대대로 희천을 탈환하라고 명령, 제1대대는 희천을 향해 진출 중 중간의 구장동을 무혈 입성하였다. 계속하여 청천강 원참도섭장에서 적군의 미군트럭 등 100여 대를 발견하여 밀어붙이고 도섭하여 화평참 도로변에서 식사중인 북한군 장교 13명을 생포하고 적 500여 명을 사살 또는 생포한다.
[제6-7-1대대 23일 희천 전투에서 대대는 T-34전차 20대와 의약품 및 보급품을 실은 화차 6량을 노획한다.]
23일, 국6-7-1대대는 계속진격하여 희천 시내가 바라보이는 유중참 마을에 접어들어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1시간 동안 교전 끝에 이들은 구현령을 넘어 희천북방 강계로 철수하게 된다. 이들은 북한군 제18사단의 일부였다. 대대는 T-34전차 20대와 의약품 및 보급품을 실은 화차 6량을 노획한다.
[국군 제8사단]
한편 국군 제8사단은 제6사단을 후속하여 10월 21일 성천으로 집결한 후 가창-북창-덕천을 경유하여 희천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23일 개천 동쪽 맹산을 점령하고 이어서 덕천을 점령한다.
[미 제1군단]
10월21일 청천강을 목표로 진출을 개시한다. 좌전방에 미 제24사단(영 27여단 배속) 우전방에 국군 제1사단이 진출하고 미 제1기병은 평양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 압록강으로 진격 ※ 한국전쟁 최초로 중공군 포로 획득, 중공군 1개사단이 온정리와 동림산 일대 대기 중이란 정부 획득보고, 그러나 군 수뇌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시기는 지났고 개입한다핻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진격
●10월 24일, 맥아더는 모든 부대에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지시한다. 10월 17일의 전진 제한선(맥아더 라인)은 적이 항복할 경우에 효율성이 있는 것이지 적이 항복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능한 한 유엔군은 국경선에서 철수해야 하고 한국군으로 대치해야 한단느 단서를 붙였다. 이에 따라 워커 제8군사령관은 10월 24일부로 북진 제한조치를 해제하고 일제히 공격 개시하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제2군단은 제6사단은 희천-온정리 축선으로 초산과 벽동으로 진출하고, 제8사단은 희천-강계 축선으로 진출하여 만포진과 중강진을 탈한하라 명령하였다.
● 초산-중강진 방향으로 진격작전
※ 1950년 10월 26일 14:15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가 한국전쟁 최초로 압록강 도착이다.
※ 1950. 10.25일, 제2연대는 벽동 진출간 동림산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26일 온정리 피탈, 철수
※ 1950. 10.26일, 국6-19연대, 국8-10연대 온정리 투입, 하지만 역시 중공군에 각개 격파당하여 각자 철수
10월 24~25일 국군 제6사단은 초산-벽동간의 국경선으로진출하기 위해 최초 목표로 회목도을 향해 24일 07:00시ㅐ에 작전을 개시한다. 사단의 우전방인 제7연대는 극성령을 넘어 10월 25일 오전 회목동에 도달한다. 진격 도중에 한국전쟁 최초로 중공군 포로 획득, 중공군 1개사단이 온정리와 동림산 일대 대기 중이란 정부 획득보고, 그러나 군 수뇌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시기는 지났고 개입한다핻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진격토록 한다.
10월 26일 국군 제6-7연대는 새벽에 눈이 내린 가운데 차량화하여 제1대대가 초산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초산지역에는 영천지역으로 들어왔던 북한군 제8사단(오백룡 소장)이 철수하여 연대규모로 저항한다.
초산읍 입구 애로지역에서 북한군의 저항에 차량에서 하차하여 1시간여의 격전으로 물리친 후 초산읍에 입성한다. 여기서 6km를 더 진출하면 압록강 신토장이다. 1950년 10월 26일 14:15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가 압록강 도착이다.
한편 제7연대가 초산으로 진격시 10월 25일 사단 좌측의 제2연대가 온정리에서 벽동으로 진출 중에 동림산 기슭에서 적과 조우하게 된다. 포로를 획득하여 진술을 청취하니 "그들이 10월 17일부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제2연대는 26일 온정리를 피탈당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태평방향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제8사단의 진격]
이 무렵 만포진-중강진으로 진출위해 진격하는 제8사단은 , 덕천과 영원에서 희천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묘향산(1,365) 좌우측 도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24일 덕천을 출발한 제16연대가 250여 명의 포로 획득
26일 제8-10연대 희천 도착, 국군 제6-19연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14:00시에 군단으로부터 공격중지하고 구장동으로 집결 명령이 내려오고, 희천에 진출한 제10연대는 온정리의 국군 제6-2연대를 지원하라는 긴급명령이 주어졌다.
온정리에 각개 격파당하는 제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국6-19연대와 국8-10연대가 온정리 진출 중 중공군에게 역시 각개 격파당하게 된다. 초산으로 진출한 제7연대는 철수하게 되지만 이미 퇴로가 차단되어 탈출하는 과정에 부대가 분산되어 각자 도생의 길을 걷게 된다.
11월 1일, 이에 제2군단은 미 제1군단의 예비로 있는 국군 제7사단을 배속받아 군의 동측방을 방호하기 우하여 11월 1일 구장동-덕천지역에 투입하게 되지만 이미 이곳도 중공군이 진출하고 있어서 국군 제2군단은 개천-원리 일대로 철수하게 된다.
● 신의주-수풍방향으로 진격작전
※ 1950년 10월 25일 운산에 돌입 포로1명 생포, 중공군으로 온정리와 희천에 각각 10,000명 잠입 진술
10월 24일 국군 제1사단 수풍리로 진출위해 안주에서 청천강 도하 운산향해 공격 개시, 사단 우익인 제15연대는 구룡강 동쪽에서 운산방향 공격하고, 좌익의 제12연대는 구룡강 서쪽에서 용산동을 탈환한 다음 운산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제15연대는 15:00에 영변에 도착하여 2일전 먼저 들어와 있던 국6-19-3대대와 합류, 제19-3대대는 희천으로 떠나감
10월 25일 제1사단의 운산공격이 시작된다. 11:00시에 운산에 돌입하게 되는데 시내는 아무도 없었다. 계속 진출 중에 포로를 1명 획득하여 진술을 받아보니 중공군으로 그들은 운산에 10,000명, 희천부근에 10,000명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26일 이들 포로가 미 제8군전방지휘소로 후송되었다.
[미 제1군단의 신의주 진출]
※ 27일 정주로 진격 중에 적 전차와 자주포를 동반한 공격을 받고 전폭기의 출격과 보전협동작전으로 T-34전차 10대와 자주포 2대 격파
※ 신의주 진격 선봉 부대는 오산 죽미령에 진출했던 미 제24-21연대 제1대대(현 싯점도 스미스 중령이 지휘) 였다
※ 정거동에서 방어임무 수행중에 적의 기습이 있었지만 적전차 7대 파괴, 적 100여 명 사살 / 미 제8군의 제1차 북진 작전시 마지막 전투
11월1일 신의주를 향해 진격, 33km 전방에서 정거동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1월 1일, 정거동에서 방어임무 수행중에 적의 기습이 있었지만 적전차 7대 파괴, 적 100여 명 사살 / 미 제8군의 제1차 북진 작전시 마지막 전투
10월 26일 한편 군단의 좌익 미 미제24사단은 신의주를 목표로 영국군 제27여단을 선두로 대령강 도하작전 완료, 27일 정주로 출발 중에 적 전차와 자주포를 동반한 공격을 받고 전폭기의 출격과 보전협동작전으로 T-34전차 10대와 자주포 2대 격파
10월 29~30일 적전차 3대를 격파하며 30일 영국군 제2대대가 정주시내 돌입, 정주시내에서 미 제21연대가 곽산으로 진출 중에 적 전차 5대와 자주포1대, 대전차포 7문 파괴한다.
[신의주 진격 선봉 부대는 오산 죽미령에 진출했던 미 제24-21연대 제1대대(현 싯점도 스미스 중령이 지휘) 였다]
11월1일 신의주를 향해 진격, 33km 전방에서 정거동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1월 1일, 정거동에서 방어임무 수행중에 적의 기습이 있었지만 적전차 7대 파괴, 적 100여 명 사살 / 미 제8군의 제1차 북진 작전시 마지막 전투
한편 미 제24사단 제5연대전투단은 태천-구성방향으로 진격하게 된다
●10월 28일 박천을 출발하여 태천으로 진출 중에 고부랑고개 일대에서 적과 조우 적 사살 100여 명,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격파, 89명 포로 생포
●10월 31일 태천에서 구성으로 진격 중에 북한군 300여 명 사살, 자주포 2대, 대전차포 6문 노획
11월 1일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에하부대에 뿌려졌다.
중공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23:00시경 박천-용산동-영변-운흥리 선으로 철수명령이 주어졌다.
나) 두만강으로 진격 ※ 한국전쟁 최초로
◆ 원산교두보 확보작전 ※국군 제1군단이 '50. 10. 10일 점령, 10월 17일에는 함흥.흥남까지 점령 "요요 작전,
원산교두보는 당초 미 제8군 주력이 38선을 돌파한 후 1주일 내에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승선도 하기 전에 10월 10일에 국군 제1군단이 점령하여, 국군 제1군단이 원산교두보를 확보하고 미 제10군단은 행정적 상륙을 하기로 한다.
국군 제1군단은 영흥선에서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전선을 정리하여, 10월 15일 제3사단이 우너산과 그 부근 일대를 경계하는 동시에 미 제10군단의 상륙을 지원하고, 수도사단은 영흥-정평-함흥-흥남 축선을 따라 진격하도록 하였다.
10월 17일 함흥과 흥남을 점령하여 원산 및 동한만 교두보가 확보될 무렵 북진한계선이 조정ㄷ되어 선천-성진 선을로 상향 조정되며 20일부터는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 영흥-함흥-성진 진격작전 ※북한군이 철수하며 무려 12,000명의 양민을 무자비하게 온갖 방법으로 학살
[수도사단]
10월 15일 수도사단(송요찬 준장)은 우너산경계를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15일 차량으로 함흥-흥남 진격작전을 전개한다. 당시 북한군은 적 제42사단 및 제249여단의 일부였다.
10월17일~18일 제18연대가 05:00시에 함흥, 제1연대가 흥남을 공격하였다. 18일에 함흥 입성식을 거행한다. 이 무렵 북한병 패잔병 적 제249부대 6,000여 명이 전차와 포를 이끌고 오노리를 경유하여 장진호 방향으로 , 제588연대와 마리훈련소 6,000여 명은 오노리에서 풍산방향으로, 흥남 동북쪽에 있던 적 598붇대는 나남으로, 흥원에 주둔하고 있던 제10여단은 갑산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0월 19일 제18연대는 오노리를 경유하여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하고, 제1연대는 동해안 축선을 따라 흥원까지 진출한다.
두만강을 향하여(장진호 진격로)
장진호 부전호
미7해병연 유담리
하갈우리(장진)
고토리 신흥리
사창리 진흥리
오노리
국3-26연 흥원국3-26연
함흥 미1해병
영흥
고원
동양리
원산 미3사
10월 20일 제18연대가 장진-부전호 방햐으로, 제1연대는 흥워북청-풍산으로 진격하고 기갑연대는 동해안 가도를 따라 진격
10월 22일 제1연대가 북청 점령후 북청-황수원호-풍산으로 진격 계속하는 가운데 북한군 제2사단 8,000여 명으로 편성된 12,000여 명이 저항하게 된다.
10월 24일~25일 , 유엔군의 총공격명령(추수감사절 공격)이 내리고, 제1기갑연대는 이원을 거쳐 25일 단천 점령
10월 26~27일 제1연대가 후치령을 점령하고, 제18연대가 백암산과 부전령을 점령
10월28일~29일 제1연대가 황수원에 이어 풍산을 점령하고, 기갑연대는 성진을 점령하고, 제18연대는 백암산 지역에 진지 구축
결국 10월 말까지 수도사단은 제1연대가 함경산맥을 넘어섰고, 제18연대가 개마고원 지대에, 제1기갑연대가 마천령산맥을 올라사 한만 국경선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원-혜산진 진격로
만 주 강
압 록
신갈파진 혜산진
삼수 백암
갑산
풍산 미7-17연
황수원리 미7-32연
부전호 수상리 미7-31연
이원 미7사(10.29~11.4)
북청
흥원 동해
[국군 제3사단] 원산-함흥지역 평정작전
'50.10.15일부로 원산을 중심으로 잔적을 소탕하고 일대를 경계하는 명령을 이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제222연대가 갈마비행장-고저-안변선에서 우너산 남부지역을, 제23연대가 영흥만의 북안인 호도반도-수달리선과 평원가도상의마전리선을 연결하는 원산항의 외곽 경계를, 제26연대는 북쪽 고원을 중심으로 문천-고원-영흥 지구를 경계하며 수도사단과 접촉을 유지하였다.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량이 제1군단 장병 전원에게 1계급 특진]
●10월 17일 제23연대가 호도반도에서 해안포 2문과 2200톤급 함정 1척 노획
●10월 24일 제23연대가 고원에서 적 105명 사살, 전차 15대, 기관차 8량, 화차 1량 노획
10월 25일 제26연대가 장진호 방향 상통리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 장진호 방향의 적과 대치 하고 , 제22연대만이 원산에 남아 미 제10군단 상륙을 기다렸다.
10월 25일, 제26연대는 장진호 남쪽 제1.제2발전소 부근에 도착하며 적군 1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중공군으로 중공군 4,000~5,000여 명이 전개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날 25일 같은 날에 서부전선에서도 국군 제1사단에 의해 중공군이 전개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10월 26일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자 국3-22연대는 미 제10군단에 인게하고 함흥으로 이동하여 함흥지역 평정작전 수행한다.
10월 29일 제3-26연대는 하갈우리에 못미쳐 수동 북쪽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돈좌되며 16명의 중공군과 60명의 북한군을 포로로하였다.
[미 제1군단장과 국군 제1군단장이 참석한 가운데 포로 심문]
"그들은 1년전에는 장개석 군대였으며, 10월16일에 압록강을 도하하여 만포진을 경유 장진 방면으로 남하한 중공군 제42군 124사단 제370연대 소속으로 사단 및 연대는 장진호 남단인 하갈우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진술
◆ 원산상륙작전
※3,000여개 기뢰 제거에 21척의 소해정이 참여하나 너무 많아서 10월 20일부터 무려 바다에 10여일 떠 있다가 10월 26일에야 상륙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미 제10군단은 10월 4일, 미 제1해병사단에게 원산의 상륙기지를 확보하고, 미 제7사단은 원산에 상륙한 다음 미 제8군고ㅓㅏ 연결하기 위해 서방으로 공격하라는 작전명령를 하달하였다.
그러나 10월 16일, 미 제1해병사단이 승선하여 원산으로 항진할 때는 이미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탈환(10월 10일)한 뒤였으며, 병력을 탑재한 함정들이 10월 19일 원산항의 영흥만에 도달했을 때는 수많은 기뢰가 있어 상당기간 소해작업을 해야만 입항이 가능하였다.
원래 소해작업은 영흥만에 기뢰가 있다는 정보에 10월 10일부터 미군 소해정 10척, 일본 소해정 8척, 국군 소해정 1척등 모두 21척이 기뢰재거작전을 실시했으나 3,000여 개의 기뢰가 부설되어 있어 , 10월 20일 상륙 당일에도 소해정 4척이 침몰되는 등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10월 25일 미 제1해병사단은 21척의 수송선과 15척의 ,LST가 원산항에 닻을 내리고 26일부터 상륙한다.
[10월 29일, 미 제7사단의 상륙과 진격로 바뀜 : 원산항이 아닌 이원항에 상륙, 서진에서 북진으로]
미 제7사단은 10월 19일 부산항을 출항하였으나 기뢰제거 작업으로 부산앞바디에 10일간 머물다가 29일에 이원항에 상륙한다. 상륙장속가 바뀐 것은 미 제10군단의 상륙이 평양탈환보다 늦어지면서 10월 19일 유엔사령부의 명령이 상륙후 연결작전 위한 서진이 아니라 북진으로 바뀐데 기인한다
● 전선정리
10월 29일 ~11월 2일 미 제1해병사단 제1해병연대는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와 원산남쪽 고지와 서쪽의 마전리 지역 경계 인수, 제5기병연대는 원산과 흥남 남쪽 연포비행장 및 군단의 서측방 경계, 제7해병연대는 함흥에서 장진호에 이르는 계곡에서 11월 2일 국군 제3사단 제26연대와 교대
이때 국군 해병 제1연대(-제2대대)도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하고, 11월 초에는 고성에 집결하여 간성-마점리 일원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는 패잔병 차단 및 차단작전 전개
한편 미 제7사단은 제17연대로 이원-북창-풍산-혜산진으로 진격하고, 제31연대는 이원에서 북청-함흥-오노리-신흥 축선을 따라부전호 신갈파진으로 진격하고 제32연대는 사단의 예비로 후방경계 임무
10월 29일~11월 2일 선두인 미 제7-17연대는 1,335M의 후치령을 넘어 풍산에 도착, 이때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 진지를 인수하고, 국군 제1연대는 동해안 성진으로 이동하여 제1기갑연대를 후속한다.
11월 3일 이원에 상륙한 미 제7-31연대는 풍산가도를 거쳐 부전호 방면으로 이동하여 이 부근에 있던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하며 제18연대는 성진방향으로 이동한다.
11월 4일 미 제7-32연대가 상륙하여 함흥으로 이동하여 차후작전 대비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개 군다은 마천령산맥을 중심으로 전선을 정리하여 미 제10군단이 이서지역인 함경남도에서, 국군 제1군단이 그 이동 지역인 함경북도에서 북진작전을 계속하게 된다.
◆ 장진호 . 혜산진 진격작전
※미 제7해병연대, 11월 2일 수동에서 국군 제3-26연대와 교대후 바로 중공군과 교전하여 700여 명 사살
(1) 수동-장진호 진격
두만강을 향하여(장진호 진격로)
장진호 부전호
미7해병연 유담리
하갈우리(장진)
고토리 신흥리
사창리 진흥리
오노리
국3-26연 흥원국3-26연
함흥 미1해병
영흥
11월 2일 수동에서 국군 제3-26연대와 교대후 바로 중공군과 교전하여 700여 명 사살하고, 수동-진흥리를 거쳐 황초령을 넘고 10일에는 고토리를 점령한다.
11월 9일 국군 제3-26연대가 미 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흥원에서 함흥을 거쳐 지경리에 도착하며, 그 후 마등령-중창령에 투입되어 해병부대 서측방 방호한다.
이 무렵 작전지역에는 대설이 내리고, 수은주가 영하 20~25도까지 내려가 혹한이 이어져 미군에게 큰 고통을 준다. 후방에서는 미 제3사단이 원산에 상륙한다.
이에 따라 미 제5해병연대가 제7해병연대에 후속하여 북항하여 고토리-진흥리간 주보급로 경게에 임하고, 제1해병연대는 원산을 미 제3사단에 넘기고 지경리에 집결한다.
한편 진격을 선도하는 제7기병연대는 11월 10일에 고토리, 11월 16일에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24일에는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를 탈취하였다. 여기서 생포된 중공군이 제89사단 제267연대며, 그들이 10일 전 압록강을 도하하였다고 진술한다
(2) 이원-혜산진 진격
※ 11월 21일 제17연대가 최초로 혜산진을 무혈입성한다. 당시 시내는 미 해군 함재기 폭격으로 페허가 되어 있었다.
이원-혜산진 진격로
만 주 강
압 록
신갈파진 혜산진
삼수 백암
갑산
풍산 미7-17연
황수원리 미7-32연
부전호 수상리 미7-31연
이원 미7사(10.29~11.4)
북청
흥원 동해
11월 2일 혜산진을 목표로 진격하는 미 제7사단은 11월 2일 풍산에서 국군 수도사단-제1연대와 교대한 제17연대
11월 8일 수도사단 제18연대와 부전로 부근에서 진지를 인수한 제31연대는 백산 동측에서 적 50여 명을 사살하는데 그 시체의 호주머니에서 중공군 제42군 제126사단 제376연대라는 주기 확인한다.
11월 12일 풍산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도착하여 미 제7사단에게 게속 북진을 명령하였다. 이에 사단은 제17연대를 갑산을 거쳐 국경도시 혜산진으로 진출토록 하였다.
11월 15일~16일, 제17연대는 웅이강을 도하하여 19일에 갑산을 탈취하였다. 16일에는 부전발전소 댐을 점령한다.
11월 21일 제17연대가 혜산진을 무혈입성한다. 당시 시내는 미 해군 함재기 폭격으로 페허가 되어 있었다.
당시 원산에 상륙한 미 제3사단은 9월에 일본에 도착한 후 8,500명의 카츄사를 보충받아, 1개 분대에 미군이 2명이고 카츄사가 8명이었다. 미 제3사단은 다시 해병으로부터 국군 제3-26연대를 배속받아 원산 원산일대를 경계한다
◆ 두만강으로 진격작전
길주-청진 진격전
만 주 압 부령 11.30
록 부거
강
연수 고성산 1756 국18연 기갑연
수도사
청진 11.25
대평산 2078 나북천 303
경성
회문
1연 어대진
어랑천 18연
봉강
만탑산2003 명간천
합수 명천
제덕
기갑연
길주
화대
성진
(1) 길주-청진 진격
※ 수도사단이 11.9~18일까지 어랑천 공방전을 10여 일간 벌여, 결국 19일에 탈환하고 24일에 나남까지 진입한다
수도사단이 미 제7사단에 부전호-풍산지역을 인계하고 동해안 축선의 성진으로 주력을 집결시켜 길주공격을 주비하고 있을 때에, 적은 장진호-부전호 선에서 중공군이 확인되고 있었고, 성진 북쪽에 적 제41사단 및 제507여단 등이 명천-어랑천 등지에서 축차적인 바어진를 구축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은 11월 1일 길주를 향해 공격하여 11월 5일 길주를 점령하였다. 사단은 제1기갑연대로 합수 방향의 적의 위협에 대비하고, 제1연대로 명천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동 주인 제18연대로 제1연대를 초월하여 봉강 및 어랑천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11월 8일 철도를 이용하여 명천에 집결한 제18연대가 다음날 어랑천 및 봉강일대를 공격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돈좌된다. 명간천을 두고 피아간에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수도사단의 진격이 어랑천 부근에서 저지되자, 합수방면으이 제1기갑연대를 제3사단과 교대하여 동해안축선으로 투입하게 된다.
11월 19일, 제18연대와 제1연대가 병행공격하여 용암동 일대에서 반격을 기도하던 적 1개 대대규모를 격멸시키면서 10여일간의 어랑천 일대 공방전을 승리로 끝냈다.
11월 24일~25일 수도사단 제18연대는 24일 나남을 점령하고, 25일에 청진을 점령한다.
(2) 길주-합수.백암 진격전
국군 제3사단은 원산-함흥 지역을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후 11월 8일까지호원.신포-신북청으로로 전진하여 군단의 후방경게를 담당한다. 다만 제26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지경리로 이동하고, 차후에는 다시 미제3사단에 배속된다.
이 당시 북한군은 합수지역에 1,000명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북쪽 백암에는 신편 노동여단 병력이 4,500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11월 22일, 제3사단은 제23연대로 성진-임명동-합수가도로 전진하고, 제22연대는 길주-합수가도로 전진하여 합수를 양익 포위하여 22일 점령한다.
11월 25일, 재23연대가 합수에 이어 25일에는 백암을 점령하고, 제22여대가 백암으로 진출하여 제23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백암 합수 경계작전을 수행한다. 제26연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다.
◆ 유엔군의 최종공세(크리스마스 공세)
유엔군은 '50.10.24일(추수감사절 공세) 총공세로 압록강.두만강까지의 진격이 목전에서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서부전선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10월 26일 초산에 입성하고, 미군의 일부가 신의주 남쪽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지만 이미 중공군이 내륙으로 진입하여 포위국면에 들게 되면서 더 이상 진출이 어렵게 되어 11월초에 신안주-원리에 이르는 청천강 교도보를 확보한 가운데 제8군사령관은 후방지역 작전 중인 미 제9군단을 작전 지역 중앙으로 투입하여 교두보를 강화하고 , 재 공격을 준비한다.
동부전선에서는 같은 시기에 미 제1해병사단 제7해병연대가 하갈우리 서쪽 유담리까지 진출하고, 1111월 21일에는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혜산진에 입성하고 동부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이 11월 25일 청진을, 좌측 제3사단이 합수.백암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이 압ㅈ록강을 도하하여 내륙 깊숙이 침투한 사실이 획득한 포로의 진술에서 확인되고 실제 격전이 일부 벌어지는 과정에 11월 7일부터 2주간에 걸쳐 중공군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압록강 상의 교량을 파괴하는 폭격과 국경지역의 중요 공장 통신수단 및 병참시설에 대한 대규모 전략폭격을 단행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서부전선에서 공격준비가 완료되고, 동부전선에서도 진출이 이루어지자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전략폭격으로 전장이 만주에 고립된 것으로 판단하여 만약 중공군이 대병력을 투입했더라도 공군력이 격파하리라 믿으며 최종공세를 결심하였다.
'50.11.24일 09:00시에 최공공세가 시작된다. 당시 북한군이 8만여 명, 중공군이 7만여 명으로 판단했으나 실제 중공군은 300,000만 명이었다.
이 당시에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서, 미 제9군단이 중앙, 국군 제2군단이 도에서 강계-희천의 적 에상 집결지를 주 목표로 공격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국군 제2군단이 덕천-영원에서 중공군에 강타당하며 돌파되며 전세는 급격히 반전되었다.
한편 미 제8군보다 3일 후에 11월 27일 최종공세로 들어간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이 당초의 북진계획에서 장진호에서 무평리로 진격하여만포진-강계-희천으로 이어지는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만포진을로 진출하고, 미 제7사단은 장진호 동쪽에서 해병대의 진격방햐인 압록강변 후창, 강구 방향으로 진격하며, 미 제3사단은 미 제8군과 연결을 이루도록 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제3사단이 두만강변 무산으로 진격하되, 제26연대는 혜산진으로 진출토록 하고, 수도사단은 최북단 회령과 웅기를 목표로 진격토록 하였다.
[당시 각 사단 상황]
●11월 29일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제1대대가 혜산진으로 진출, 미제7-17연대로부터 인수한다.
합수를 점령한 국군 제3사단은ㄴ 제23연대가 나남에서 무산방향으로,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제26연대는 단천-홍군-풍산으로 이동하여 장진호 동쪽으로 기동하는 미 제31연대 지역을 인수하여 갑산-삼수로 진격하고, 그 중 제1대대가 29일 혜산진으로 진출하여 미 제7-17연ㄷ대로부터 인수받게 된다.
●11월 30일 국군 수도사단 제18연대가 회령 방향으로 , 기갑연대가 웅기방향으로 진출하여 부령과 부거남쪽까지 진출하여 한만 국경선 회령까지는 40km, 웅기까지는 50km를 남겨둔다
●11월 28일 헤산진을 점령한 미 제7사단은 제32연대가 28일 신갈파진을 점령한다
●그러나 장진호 하갈우리에서 무평로 진출하는 미 제1해병사단은 공격 첫날부터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쳐 돈자 된다. 무려 중공군 8개 사단이 투입되어 포위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11월 28일 도쿄로 제8군사령관 워커와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를 불러 부대의 철수를 결심하고 11월 30일 철수를 시작한다. 38선 돌파작전 60일 만에 막을 내린다.
[소결론]
6.25전쟁은 유엔군의 최종공세(1차 10.24일 추수감사절 공세, 2차 11.24일 크리스마스 공세))시 중공군의 참전이 공식 확인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국 전쟁은 '50.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과 공모하여 작성된 선제타격 계획에 따라 자행되었다. 당시 군 지휘부의 무능과 오판에 따라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피탈되고 군 절반이 한강 이북에서 실종 또는 포로가 되는 극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한강대교의 조기 폭파로 수많은 우익인사들조차 남하하지 못하고 북한군과 지역내 자생하고 있던 좌익세력에 포록가 되어 죽음이나 북으로 끌려가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러나 한강 이나믕로 남하한 일부 병력이 7월 3일까지 한강방어선을 유지하여 미군의 한반도 진입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스미스 부대가 7월 5일 오산 죽미령까지 진출하여 북한군과 최초로 전투를 한다.
유엔은 곧바로 유엔군 편성을 결의하게 되고, 먼저 들어온 미 제24사단과 뒤이어 들어오는 미제25사단, 미 제1기병사단이 경부국도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며 전차를 앞세운 미 제3.4사단의 진출을 지연시키면서 낙동강선으로 전략적 후퇴를 실시하게 된다.
데한민국은 '50.7월14일에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여, 전쟁은 북한군 대 유엔군으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개전초기 전투력 비교]
당시 북한군은 전쟁 도발시 미군이 참전하지 않으리라 판단하였고, 만약 개입하더라도 개입이전에 승부를 내면된다는 속전속결을 위해 병력은 우리는 8개 사단 21개 연대 9만 6천명(육해공 총인원은 10만 5천명)인데 반해 북한군은 10개 사단 30개 연대 18만 3천명(육해공 총인원은 20만 1천명)으로 우리는 없는 전차부대, 모터시아클부대 등을 보유했다.
우리는 한 대도 없는 탱크여단을 창설하여 소련제 T-34전차를 258문 보유하였고, 자주포도 우리는 한 문도 없는데 76밀리 176문을 보유했다. 전투기 또한 우리는 연락기만 22대 보유하고 있었는데 북한은 소련재 YAK-9등 총 211대를 보유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8월부터 9월 15일까지 사황를 걸고 북한군의 진출을 막아냈고, 반면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남한을 공산화하려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고 부족한 인원은 남한에서 강제 징용하여 소년병으로 사지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 역전되면서 그들은 철수과정에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물러난다.
9월 16일부터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작전이 시작되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다. 내려갈 때는 1개월 반이고 올라올 때는 2주였다.
개전초기 10만대 20만의 병력수는 반격작전간에는 거꾸로 국군과 유엔군이 15만 북한군은 7만명 수준이었으며 한대도 없던 탱크가 유엔군(미군)이 200여대인 반면 북한군은 200여 대가 50여대 수준으로 전략하면서 썰물처럼 38선 이북으로 도주하게 된다.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면서 유엔군의 북진작전을 시작되고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4일은 청천강을 확보한 가운데 총공세를 펴게 된다.
[원산 앞바다에서 요요 작전]
이미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10월 25일 원산을 점령하고 주변 경계및 동해안로 및 동북 방향 함흥-오로리-장진호로 진출하는 중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이 10월26일에야 상륙하였다. 병력을 함정에 승선시킨 상태에서 원산 앞바다 기뢰 제거문제로 상륙을 못하고 10여 일을 바다에 떠있었고, 미 제7사단은 부산 앞바다에 떠있다가 10월 29일에 원산이 아닌 이원에 상륙하였다.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50.10.24일]
10월 26일 국군 선봉인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초산을 점령하여 바로 통일이 되는 순간이 왔다. 당시 동부 전선은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11월 21일 혜산진을 점령하고, 국군 수도사단이 동해안로를 따라 11월 25일 청진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10월 17일(본대는 19일)에 압록강을 도하하여 묘향산맥 기슭으로 은밀기동한 중공군이 휘천에서 온정리를 경유 회목정-초산으로 진격하는 국군 제6사단을 포위공격하고, 희천으로 진출하는 제8사단의 돌파구를 차단하게 된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11월 24일]
서부전선의 운산에서 벽동으로 진출하려는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들어온 미 제1기병사단이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미 제8군은 청천강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다시 총공세에 들어간다
이 당시에 동쪽의 미제1해병사다은 제7해병연대가 하갈우리를 지나 무평리로 진출하기 위해 11월 24일 유담리까지 진출하고, 그 동쪽의 미 제7-17연대가 혜산진을 11월 21일 점령후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에 인계하고, 서쪽으로 기동하여 11월 28일에 신갈파진을 점령하여미 해병사단과 연결작전을 하는 싯점에 11월 28일 중공군의 개입을 미 제8군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가 일본 도쿄에서 만나 확인하게 된다.
한편 국군 수도사단은 제18연대 선두가 11월 30일 부령, 기갑연대 선두가 부거를 진출한 상황에 철수명령이 내려온다
'50.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지 60일 만에 한만 국경지대에서 유엔군과 국군은 무자비한 중공군의 철수를 강요받아 다시 평양. 38선 . 수도서울 이남으로 철수한다. '51. 1.4후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