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요즘 각국 사람들을 우리나라 구석구석으로 안내하느라 바쁘다. 아리랑 국제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트래블 버그>.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진행되는 여행 정보 프로그램으로, 매일 오전 9시 50분부터 11시까지 위성과 지상파 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와 제주 FM,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다. 제니퍼는 이 프로그램의 단독 MC를 맡아 한국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를 발랄하게 소개한다.
서울 양재동의 아리랑국제방송국 녹음실에서 그를 만났다. 밝은 회갈색 눈동자에 반달형 눈매가 매력적인 그녀가 밝은 미소로 맞았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국적 외모가 눈길을 확 끄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면면이 튀어나왔다.
“친구들이 저더러 그래요. ‘너는 겉으로는 미국 애 같은데 알고 보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다’고. 제 성격이 한국사람 이상으로 보수적인데다 음식 취향도 지극히 한국적이거든요. 개고기랑 번데기 빼고 다 잘 먹어요. 떡볶이랑 낙지볶음 좋아하고, 서양 음식보다 한국 음식을 더 잘 만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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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얼큰한 라면 한 그릇 뚝딱 해치워 배가 두둑해야 잠이 잘 오고, 와인이나 양주보다 소주와 폭탄주를 즐긴다는 제니퍼 클라이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한국으로 건너온 후 성남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의 파슨스디자인스쿨을 마친 후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2학년에 편입, 이후 한국에 죽 눌러앉았다.
그가 방송계에 발을 디딘 건 홍대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이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부터다. 아리랑국제방송이 개국한 뒤 리포터로 활약하게 된 것. 방송계 데뷔 10년차인 제니퍼는 전방위로 활동 중이다. <트래블 버그> 진행 외에도 아리랑 TV의 온라인 게임 소개 프로그램
제니퍼는 영어교재 집필자로도 유명하다. 수능 영어교재는 물론, 기업에서 발간하는 영어교재까지 대략 꼽은 그의 저서가 일곱 권이 넘는다. 인터뷰 당일은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의뢰한 영어교재 집필을 마감하느라 전날 밤을 꼬박 샜단다.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에잇, 아직 젊잖아요” 하며 또 환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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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왼쪽부터 언니, 엄마, 친구, 제니퍼(위). EBS 영어강사 리사 켈리와(아래). |
‘제니퍼의 방송’이 된 <트래블 버그>가 전파를 타기 시작한 건 아리랑국제방송이 라디오를 개국한 2003년 9월부터. 청취자 반응에 따라 숱하게 개편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세계에서 <트래블 버그>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방송은 세계 각 대륙으로 전파돼 종종 국제적인 팬레터를 받는단다.
“얼마 전에는 인도의 60대 남자 분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어요. 제 방송을 열심히 듣고 계시다면서 ‘당신 방송 때문에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한국 드라마도 빌려 봤다, 한국이 참 따뜻한 나라인 것 같다,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 국적의 혼혈아 제니퍼 클라이드. 혼혈아라면 성장 과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정체성 혼란’도 그녀에겐 먼 나라 얘기 같다. 인터뷰 제의를 했을 때 그녀가 전화기 너머로 꺼낸 말은 “저는 한국에서 살면서 별 어려움 없었어요, 그런 거 물어보시면 전 할 말이 없는데요”였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는 내내 밝고 경쾌했다. 그저 한국이 편하고 한국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정체성 혼란’에 대한 질문 자체가 그에겐 별 의미 없는 듯 보였다.
서른 해 남짓한 그의 삶을 통틀어 미국에서 생활한 시간은 고작해야 6~7년에 지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 연애도 한국 남자하고만 했고, 결혼도 한국 남자와 할 것 같다는 제니퍼는 취미도 너무나 한국적이다. 한때 십자수에 푹 빠졌었고, 최근엔 온라인 고스톱 게임을 즐긴단다.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그이지만 ‘말로 먹고사는’ 방송인이다 보니 “정확한 말을 찾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쉰다. 한국말과 영어 중 뭐가 더 편하냐는 질문엔 “둘 다 편하다”고 답한다. 한국에 오래 살다 보니 영어를 잊어버릴 법도 한데 영어 방송을 하다 보니 잊어버릴 틈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영어와 한국어를 병행하고, 꿈을 꿀 때에도 2개 국어가 동시에 등장한단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엄마 자랑 좀 해도 돼요?” 하면서 눈을 반짝인다.
“엄마가 무지 똑똑한 분이세요. 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후 이화여대를 나와서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서 비즈니스를 공부하셨죠. 당시로선 보기 드문 여성 재원이셨대요. 거기서 사업하시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면서 공부를 그만두셨죠. 한국에 와서 미8군 사령관 비서로 30여 년을 일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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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방송국에서 <트래블 버그>를 진행 중인 제니퍼 클라이드. |
군인들과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니 어머니 성격도 ‘군인 스타일’이란다. 무뚝뚝하고 철두철미한데다가 원칙을 고수하는 스타일이라고. 서른이 넘은 딸에게 엄격한 통금시간을 적용해 평일엔 밤 12시, 주말엔 좀 풀어 줘 새벽 2시인데 이 시간을 넘기면 혼을 낸다고 한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제니퍼는 전공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했다.
“지금은 방송 일이 워낙 재미있고 좋지만, 언젠가는 꼭 전공을 살려서 일하고 싶어요. 요즘도 틈틈이 인테리어 책자를 보면서 ‘결혼하면 이렇게 꾸미고 살아야지’ 하고 구상을 하죠.”
그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욕심쟁이”라고 규정한다. 하고 싶은 게 많아 일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하다 보니 숨 돌릴 틈 없이 달려온 것 같다는 제니퍼. 요즘 가장 갖고 싶은 건 ‘아기’라며 만삭이 된 기자의 배를 보고 예쁘단다. “여자가 아기를 가졌을 때만큼 예쁜 때도 없는 것 같아요” 하면서.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도 비슷한 답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현모양처였어요. 좋은 사람 만나 예쁜 아이 낳고 예쁘게 사는 게 꿈이에요. 저는 한국이 좋아요. 한국에서 결혼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 예쁘게 예쁘게 살고 싶어요.”
첫댓글 인물이좋은것도 좋지만 요즈음은 목소리가 아름다운것이 더 매력적인것 같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상대방을 즐겁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