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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9일(수) 11시, '수산회(水山會)' 친구들은 3, 5호선 종로3가역 11번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늘은 4·19혁명 기념일로 날씨가 화창하였다. 대부분의 산우들은 11시에 집결, 종묘(宗廟) '외대문' 쪽으로 이동하였다.
홍 회장님은 미리 알아봤는지? 시간제 관람(시간맞춰 입장 후 문화재해설사 안내를 받으며, 관람하고 함께 퇴장)을 위해 11시 20분까지 통합관찰권을 발급 받아 입장을 하였다.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문화재해설사 안내를 받으며 종묘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종묘(宗廟)란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이다.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묘(廟)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종묘(宗廟)의 길은 여느 왕의 길과는 다르게 비스듬하다. 바닥에는 잰걸음에 시비를 거는 박석이 깔렸다. 부러 먼 길로 이끌거나 느닷없는 지름길이다. 길과 건축은 그리 사람의 걸음을 간섭한다. 그러므로 길의 물음에 걸음이 답한다. 종묘의 비밀스런 가르침이다.
종묘는 종(宗)의 묘(廟)라고 했다. 왕들의 잠든 혼을 모시는 사당으로써 조선의 시작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종묘는 조상에게, 사직단은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에 앞서 종묘와 사직단을 지었다.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인 유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왕가의 제의 성전이다.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묘현례(廟見禮)는 왕비나 세자빈이 왕실 혼례를 마친 후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를 알현하는 의례로, 조선시대 국가의례중 왕실 여성이 유일하게 참여한 의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2023년 종묘 묘현례"는 1703년에 행해진 인원왕후의 묘현례를 창작극과 의례재현을 결합한 새로운 공연 콘텐츠로 재구성하여 관람객들에게 선보인다고 한다. "2023년 종묘 묘현례"는 4. 28(금)~5. 1(월) 11:00~17:00 에 하는데, 공연은 1부(13시), 2부(16시)로 나눠서 행사를 한다고 하였다.
문화재해설사 자세한 안내로 종묘(宗廟)를 둘러본 후 점심식사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탐방하였다. 창덕궁(昌德宮, 후원 포함)과 창경궁(昌慶宮)을 탐방한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뒤풀이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나와 혜화역쪽으로 가 명륜로 2가 근처에 '동학(東學)'식당을 찾아 제육볶음에 막걸리를 한 잔씩 하였다. 또한 근처의 커피컨설팅 커피교실에서 커피를 한 잔하고 혜화역 등에서 헤어졌다.
◈ 월일/집결 : 2023년 4월 19일(수) / 3, 5호선 종로3가역 11번출구 (11시)
◈ 산책장소 : '종묘(宗廟)'와 '창덕궁(昌德宮)' 및 '창경궁(昌慶宮)'
◈ 참석자 : 12명 (종화, 김진, 진오, 형채, 승렬, 재웅, 삼환, 용복, 전작, 영훈, 양기, 황표)
◈ 뒤풀이 : '제육볶음'에 막걸리 / "동학(東學)" <종로구 창경궁로 31, 혜화역 근처 (02) 3675-2224>
◈ 기타 : 혜화동의 커피컨설팅(커피교실) 및 혜화동콩집에서 커피 한 잔을 함.
< '창덕궁(昌德宮)' 산책 >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의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랫동안 임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산 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들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에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의 하나이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으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후원인 비원까지 합해서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 문화재이다. 태종 초에 별궁으로 지었는데 계속하여 궐내에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선정전 · 소덕전 등 여러 전각과 돈화문을 세워 본궁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다른 궁과 함께 거의 불타 버리고 말았다.
1608년에 왕이 된 광해군은 1615년에 불타 버린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다시 지어 여기에 머물렀다. 이 때부터 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정궁 구실을 하였다.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궁도 인조 반정과 몇 차례의 화재로 헐고 다시 짓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위의 전각, 그리고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선재 등 중요한 전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비원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 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912년부터는 후원인 비원과 함께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광복 후에는 창덕궁과 후원을 공개하고 있다.
< '창경궁(昌慶宮)' 산책 >
창경궁(昌慶宮)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때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국보1점으로 '명정전'이 있고, 보물 7점(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칠층석탑)이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나 창덕궁(후원입구)에서 들어갔다. 조형미로 이름난 옥천교를 건넜다. 일직선상에 명정문과 명정전이다. 명정전 주위로 문정전과 경춘전과 환경전·통명전 등 창경궁 대부분의 전각이 자리한다. 이를 기준으로 남쪽에 동궁 터와 궐내각사 터가, 북쪽에 내전 터 일원과 춘당지·대온실 등이 있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효성 지극한 궁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비롯한 난리와 순조 때의 큰불로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대개 순조 임금이 중건한 것들이다.
'종묘'와 '창덕궁' 및 '창경궁'까지 차분하게 관람을 하다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우리는 창경궁 홍화문을 벗어나와 값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혜화역앞 큰 길옆의 조촐한 골목에 '동학(東學)'이란 허름한 막걸리집이 있었다. 우리는 제육볶음에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고, 늦은 점심식사로 허기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