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공 없는 사회
仁守/정 용하
금년 여름은 예상치 못한 특별한 계절이다.
우연히 교육방송(EBS)에서 작년부터 제작 방영중인 ‘세계테마기행’이란 시리즈 프로를 시청했기 때문이다.
약 85개국을 상대로 편당 35분 내외로 된 340편 가량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보고 느낀 것은 자연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며 가끔 꿈속에나 보이는 신비한 풍경은 뇌의 조작이 아니라 지구상에 실제 존재하는 경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집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세계관이 달라졌다는 것 외에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병든 사회인가를 자각했다는 것이다.
혼자보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주변의 지인에게도 권유하였더니 여행하면서 실제로 보는 것과 TV시청하는 것은 비교가 안 된다며 해당국을 여행하기 전에 참고사항 정도로만 생각하는 눈치이거나 처음부터 애당초 말도 안 된다는 표정들이다.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해외여행 특히 단체관광은 영리를 추구하는 여행사측의 기획 상품인데 반하여 본 프로는 사회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외국의 장소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육안으로는 살필 수 없는 부분까지도 카메라 특유의 기술적 정확성을 기할 수 있는데다 더욱이 항공촬영을 곁들었기에 입체적, 개략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지역의 관혼상제나 종교행사, 민속공연 등 행사장면은 물론 각 가정을 방문하여 주민의 생활실태와 음식문화까지도 밀착취재 방영하면서 상세한 소개까지 해주고 있어 피상적인 단체여행과 달리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도 호기심이 배가되었고 삶에 대한 성찰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우리주변에는 세상에 대한 한풀이 운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난에 대한 한과 못 배운 것에 대한 한,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개인의 삶에도 가정사에도 국가의 역사에도 빛과 그늘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뿐만 아니라 먼 미래에도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삶 그 자체가 본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승려들은 해탈 운운하는 것인가?
만약 한풀이를 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그것이 의심스럽다.
규범의 판단기준 중에 하나가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전체사회질서에도 바람직한가 여부이다.
이제 우리는 물욕에 초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이 가지는 반복적이며, 본능적 욕구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에 기본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 유지되면 하위욕구에 집착하지 말고 자아실현욕구 등 상위욕구로 나아가야하는데 작금의 우리네 상황을 보면 동물보다도 더 하위욕구에 집착하고 있다. 후세사람들은 앞 시대의 특정인물이 생존당시 재산이 얼마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인류사에 얼마나 공헌을 하였는지에만 호기심을 작동시킬 것이다.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여 자녀를 교육시켜 신분상승을 꽤하여 보지만 자녀의 인성교육이 잘못되면 반사회적인 인물만 배출한 꼴이 되고 만다. 삶은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용 중인 자동차로 그 사람의 인격을 파악한다거나 겉치레 해외여행을 하고 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하는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할 것이다. 자가용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어차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동일하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대화하고 사는 것이 더욱 인간다울 것인데 굳이 혼자서 외롭게 이동하는 모습이 과연 진정한 삶인지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낮에는 집을 비워두고, 밤이 되면 잠시 잠만 자고 가는 땅 좁은 나라에서 저택을 선호하는 내면적 이중구조도 조용히 성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는 모습이 예전에 비하여 상당히 호전되어,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는 해외유학이 일상화되고 세계도처에서 한류열풍이 일어나고 있긴 하나 선진외국 사람들의 깊숙한 내면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국회에서는 여전히 막말과 거친 행동이 오가고, 불과 몇 십 년 전만하더라도 선진국에서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주유소 아르바이트, 식당주방에서 허드레 일을 하고 국내에 와서는 해외유학파 행세를 하며 사회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도 국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습게보았던 우리네인데, 외국인 눈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이 꼭 긍정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더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세계 각국의 공통현상이다.
오륙백 년 된 건물들이 즐비하고 아직도 그곳에 실제거주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2,700년 전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이탈리아 로마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고 그것은 그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보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어떠한가? 이십년 된 건물도 재개발 운운한다. 한마디로 삶을 즐기기보다는 성급함이 앞서있고 건축공사도 그만큼 부실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건국이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실책중 하나가 대통령권한 행사에 걸림돌이 될까하는 우려에서인지 조선왕조의 왕가의 존재를 처절하게 말살시킨 점이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 대통령도 같은 전주이씨 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는 해에 침을 뱉은 형국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좇지 말아야 한다.
진주목걸이는 사람이 착용할 때 우아한 것이 되며, 돼지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이다. 주변을 배려하고 삶을 즐기면서 그렇게 살아가야할 것이다. 삶에 있어서 ‘조용한 혁명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와 전통을 부활시켜 삶을 지탱하는 동력인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다. 생활수준이 나아졌다고 하여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음을 경험으로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살아온 대표적 국가는 동남아시아의 작은 나라 ‘부탄’이다.
국가는 최소한의 개발만을 허용하여야 한다며 그들의 주거는 육백년 전부터 그들의 조상이 살아온 3층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도로에는 자동차 수량이 적은 관계로 교통사고가 없는 안전한 나라이다. 34세 된 국왕이 통치하는데 국왕의 사진을 가정집마다 벽에 걸어놓고 남녀노소가 존경을 표하고 있다. 국왕의 생일날 수도의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전국 각처에서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축하와 안녕을 기원하는 그들이며 국왕이 감기로 행사에 불참하여도 욕하거나 야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육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활에 큰 변화가 없는 나라이다.
성적(性的) 정체성을 정립해야한다.
우리사회에서 남성의 중성화 내지는 여성화 경향이 심각한 수준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육자의 대다수가 여성에 편중되어 있다. 남자 선생은 이제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고 있다 한다. 여성계에서는 정보화시대는 정보가 힘이기에, 농경사회나 산업화사회처럼 힘이 요구되는 시대가 아니라며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겉치레 명분일 뿐, 속마음은 남성에게 교직을 뺏기지 않으려는 독점의식으로 보인다. 필자의 생각은 자리다툼 문제가 아니라 동물이나 인간이나 수컷과 암컷은 기능상의 차이가 있어야한다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천안함, 연평도 포격사건, 휴전선 노크사건 등을 접할 때마다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남북 간 경제력의 차이를 인용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전망하나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는 속담은 개인 간에는 물론 국가 간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문명사회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전인가? 북한의 협박이 한층 고조될 때, 어느 30대 후반 남자가 TV와의 인터뷰 내용이 한마디로 가관이다. 전시에 자신의 승용차가 공출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차가 공출당하면 차량을 이용해서 전시에 피난 갈수 없다는 것이다. 전시에 제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포석이 깔린 말이다. 최근 북한이탈주민 중에서 국내방송에 출연하여 논객으로 명사대접을 받으며 북한실상을 폭로하는 인사들에 대해 북한에서 이들 가정에다 보기만 해도 끔직하고 죽음을 암시하는 혐오물품을 우송하거나 메일이나 전화를 통하여 암살하겠다는 협박을 일삼는 모양인데, 문제는 탈북인사가 아니라 소위 식자계층이라고 자부하는 TV방송 출연논객 중에는 자신이 북한당국으로 부터 테러 대상으로 지목될까 두려워 소위 북한의 최고권력의 존엄을 의식하고 깍듯이 존칭을 사용하는 한마디로 자존심도 없는 유약한 인사들을 볼 때 마다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기야 모방송국에서는 김정일 사망 때, 표시 날듯 말듯 ‘준 추모방송’을 한 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진작 웃기는 것은 연예인들이다.
상당수 연예인들은 이혼, 삼혼사실을 TV에 단체로 출연하여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그런데 외관상은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들도 알게 모르게 전통적 사고를 내심 지니고 있는지라 연예인만 유독 이혼하면 별종으로 낙인이 찍히기에 이혼풍토를 사회일반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이혼사실에 대한 수치심을 형해화(애매화)시키려는 속내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멀쩡한 남의 가정까지도 선동하여 망쳐버리겠다는 광대들의 ‘흙탕물놀이’라고나 할까?
한술 더 앞서가는 방송프로에서는 ‘남자 뭉개버리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일삼고 있다. 처음에는 다수의 여성을 출연시켜 ‘시금치’ 운운하면서 시집과 남자들을 헐뜯다가 여자들끼리 모여서 형이하학적인 천박한 우물가 이야기를 하면 시청자들로부터 신뢰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였는지 얼마 전부터는 몇몇 남자들도 함께 출연시켜 전체남자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일삼고 있는데, 직장에 일하러 가고 없는 사람들을 놓고 욕해대는 것은 이 나라 방송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운다고 욕하더니 남자가 같은 남자와 바람피우냐? 아니면 화성여자와 바람피우냐? 라며 논리적인 여론이 나돌자 할 말이 막혀 버렸는지, 이제는 마치 대다수의 남자들이 성폭력과 조직폭력싸움을 일삼아 여성인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조금은 덜 성숙된 것이라며 새파랗게 젊은 변호사라는 작자가 마치 자신이 공자라도 되는 양 인생의 경륜을 달관한 듯 철딱서니 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기도 하고, 어떤 남자 출연자는 “본 프로의 작가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라며 남성폄하 발언을 하지 않으면 자신은 이 프로에서 잘린다는 뉘앙스의 말도 살짝 비친다. 한마디로 남성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조금 이해해 달라는 뜻이다. 또 다른 남자 출연자는 자신이 생각해도 양심에 가책을 받았는지 어쩌다 남자를 대변하여 모처럼 말을 시작하면 그 옆에 앉아 있던 전생에 소박당한 여자로 보이는 못생기고 살찐 여자가 남자 출연자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와 남자 출연자의 말을 봉쇄해 버리는 토론의 원칙도 모르는 한심한 행동을 서슴없이 일삼고 있다. 옛 풍속에는 예민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면서도 1970년대 불량학생들이 사용했던 비속어를 죄의식 없이 마구 쏟아내는 그들이기도 하다.
어떤 젊은MC는 남자 하기가 싫은지, 아예 치마를 입고 파머머리가발에다 입술에 빨간 루즈까지 바르고 사회를 보는 친구도 있다. 생리도 하지 않으면서, 귀족이 되려는 염치없는 희귀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를 뭉개버리는 여자출연자들도 그렇고, 몇 푼 출연료와 자신의 인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남자 출연자들에게도 측은한 생각이 든다. 동남아 여러 국가 중에서 종교 활동이 제일 미약한 국가가 이 나라이다. 그들은 자신이 뱉은 말이 역사에 어떤 죄를 짓는 것이며,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고는 있을까?
책에선가 어느 문인께서 쓴 글이 생각난다.
“하루에 한 끼도 안 먹는 남자는 영식님이고, 한 끼 먹는 남자는 한식씨 이고, 두 끼 먹는 남자는 두식이 이고, 세끼 다 먹는 개새끼는 삼식이 놈이다.”라고...
남태평양 어느 모계사회에서도 남자들은 굶지 않는데, 앞 시대를 살다 가신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의 고생까지도 전기밥솥에 밥하는 여인들은 자기네가 한 고생이라고 착오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남자들에 대해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싶은 남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향후 걱정이 된다.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편견과 시기, 남의 탓, 핑계를 대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풍조는 여전하다. 죄짓고 검찰에 연행되거나 출석하는 사람 중에 “자기는 죄가 없다”라고 우선 못을 박는 말은 이제는 기본절차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일제식민지시대에 독립투사를 밀고하여 죽게 하거나 감옥가게한 사람도 일본인이 아니라 주로 한국 사람의 소행이다. 6․25당시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당국에 밀고하여 서로 죽게 만든 것도 먼 타인이 아니라 가까운 친인척이거나 친구, 지인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평소에는 신세를 지면서 알랑거리다가도 세상이 바뀌면 가차 없이 자신이 숨겨온 개인적인 복수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나라가 기울어져 회복 불가능한 경우, 적국에 동조한 자를 우리는 ‘매국노’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나라를 팔아먹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어떤 사안을 두고 논리에도 맞지 않는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을 종종 본다. 상식으로 통하는 법률적 판단과 동떨어진 판단을 한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내면적 정직성을 속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법시험에 부정합격 했다는 추측밖에 들지 않는다. 세상을 제 마음대로 흔들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적국과 동조를 하거나 이 땅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며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은 바로 세상을 어렵게 만든 장본인 그 사람들일 것이다. 황량한 겨울날, 들판의 허수아비가 할 수 있는 것은 화성의 여자와 바람피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