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한동안 히어로물에 빠져 만화책을 사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내 방 책꽂이 한 칸은 히어로 만화가 장악하고 있다. 만화를 보다보면 유명한 캐릭터보다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캐릭터가 더 많다. 그들 중 대부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적인 히어로의 이미지다. 악당을 제압하여 경찰에 넘기거나 사람들을 구출하는 코스튬 히어로. 하지만 만화에 등장하는 히어로는 너무 많고, 그 중에는 일반적인 히어로의 이미지를 벗어난 이들도 있다. 그런 히어로를 보통 안티 히어로라고 부른다.
악당 같은 일을 하는 영웅, 또는 영웅 같은 일을 하는 악당. 이런 이들을 안티 히어로라 부른다. 이들은 법과 도덕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한다. 마블의 퍼니셔, 데드풀, 베놈이나 DC의 로어셰크가 대표적인 안티 히어로다.
이들 중 퍼니셔와 로어셰크 같은 이들은 비교적 영웅다운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범죄자를 상대하고 민간인을 구한다. 다만 범죄자를 상대하는 방식에서 전통 히어로와 갈린다. 전통 히어로가 범죄자를 제압하는 선에서 일을 끝내는데 비해 이들은 악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폭력과 살인으로 악에 맞서는 거다. 퍼니셔와 로어셰크를 상징하는 대사는 각각 “죄가 있으면 넌 죽는다”와 “종말이 코앞이라도 결코 타협은 없어”이다. 두 캐릭터는 초능력 악당들이 가득한 세계관에서 활동하지만 초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어떤 히어로보다도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난 이 두 캐릭터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안티 히어로가 가진 어두운 매력을 좋아했다. 가차 없이 악당을 멸하는 모습. 그 모습이 멋지게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이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을 좋아할 때 난 퍼니셔를 좋아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이번 방학에 문득 히어로 만화책을 읽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책을 들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퍼니셔: 웰컴 백 프랭크>, <브이 포 벤데타>(히어로물이라고 하긴 애매하다), <왓치맨>이다. 모두 안티 히어로가 활약하는 책이다.
<퍼니셔: 웰컴 백 프랭크>의 서문에는 [퍼니셔를 옹호하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문은 먼저 ‘퍼니셔는 못해도 만 명 단위의 사람을 죽였으며, 퍼니셔를 옹호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 후 만화, 영화라는 매체의 의도가 볼거리임을 말하며, 이 만화 역시 다르지 않으니 양심의 거리낌 없이 즐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마음이 편하지…?”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퍼니셔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하지만 이는 만화 속 이야기다. 히어로 만화에서는 악당들을 잡아놔도 쉴 새 없이 탈옥하여 히어로와 갈등을 이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세계 속에서 공권력의 권위는 낮고 힘도 부족하다. 히어로를 위한 세계관이고, 때문에 다양한 히어로가 활약할 수 있다. 이런 히어로물은 현실과 분리된 다른 현실이다. 그렇기에 퍼니셔의 범죄를 그려내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실의 사람들이 종종 만화 속 퍼니셔를 찾는다는 거다. 가끔 현실에선 만화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범죄자들이 생각보다 부족한 벌을 받을 때, 사람들은 퍼니셔와 로어셰크를 찾는다.
지금 이 시점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에 부정적인 현상을 끼치는 이들에 대해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증오의 끝은 끝내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증오가 사회 전체에 퍼졌을 땐, 죽음을 안은 농담마저 환영받게 된다. 농담으로 죽음을 논한다니, 이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 그대로 퍼니셔가 된다. 물론 법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실제로 퍼니셔가 되긴 어렵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한 현대엔 인터넷이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인터넷 안에선 누구나 사람을 저격할 수 있다. 마스크 없이도 쉽게 정체를 감출 수 있고, 방 안에 숨어 손쉽게 퍼니셔 행세를 할 수 있다. 실제로 행동한 게 아니니 안전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지만 당하는 이에겐 어떨까.
이따금 아무 잘못이 없는 이들마저 사냥 당할 때가 있다. 온라인 퍼니셔들은 주관적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거짓 정보를 퍼트리고, 어떤 때는 있는 사실을 감춘다. 그렇게 악인을 창조하고 자신을 정의라고 속이며, 자신을 포장하고 타인을 공격한다. 대상이 죄가 있든 없든, 한 번 대상이 된 이상 수많은 퍼니셔들에게 쫓기는 걸 피할 순 없다.
<퍼니셔: 웰컴 백 프랭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오른다. ‘바질런티 스쿼드’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 이들은 퍼니셔를 모방하여 범죄자를 죽이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퍼니셔와 다른 점은 살인의 대상이 자신의 혐오 대상으로 고정되고,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음을 쉽게 적용하며, 자신들에게 모순점이 존재하지만 그 부분은 덮어 둔다는 거다. 이들은 한데 모여 퍼니셔에게 리더가 되어 달라 부탁하지만 퍼니셔는 가차 없이 이들을 죽인다.
누구나 퍼니셔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쉽게 할 수 있다면, 안전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자격 없는 이들도 마음껏 죽음을 논할 수 있으며, 그 위력 또한 가해자들의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퍼니셔가 현실로 나온다면, 온 세상에 가득한 가짜 퍼니셔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바질런티 스쿼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범죄자와 가짜 처형자 둘 다 처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퍼니셔가 현실에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의 유일한 처벌법, 죽음을 누구에게 먼저 적용할 것인가?
첫댓글 1. 나는 왜 어릴 때부터 만화를 수준 낮은 거리로 여겼을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넘쳐나는데. 초등학교가 끝나는 동시에 그나마 기억에도 없던 만화 보기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내 인생 사전에서 지워버렸다. 이후로 아이들에게서 들어온 수많은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아, 그것들 다 보고 싶건만. 언제 보지?!ㅎ 아니면 언제고 한번 히어로물들을 섭렵해보고 싶구먼.
2. 잘 다듬으면 훌륭한 시사 칼럼이 될 수 있는 이야기거리다. 전체적인 흐름도 대체로 적절하다. 더욱 치밀하게 글을 다듬는다면 그대로 칼럼으로 훌륭하겠다. 더 잘 다듬었다가 이 글이 세상에 나와야 할 타이밍이 언젤지 지켜보렴.
3. 나 혼자 생각.
이야기 속 히어로들은 자신이 영웅이 되고
이야기 속 안티 히어로들은 영웅이 되든 말든 죽이고 보고(내가 그런 이야기를잘 못 봐서 틀릴 수도 있음)
성경의 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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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히어로로 만든다.
이 글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무언갈 생각하게 하면서 쑥쑥 읽히는 글이다. 글은 관심있는 주제로 쓸 때 잘 써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