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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0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8,9-18
복 음 : 요한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담화’를 계속해서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곧 수난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잠시는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해산을 앞둔 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금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묘사하시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의미까지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존재나 마음을 다하여 애착하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여정일 때,
반드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이 주는 ‘기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여야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영적 시쁨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믿을 때 생기는 은총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만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얼마의 알을 낳을까요?
모든 환경이 만족스러운 상태이기에 자연 상태의 금붕어보다 더 많이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6~70%나 적은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합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고, 적당한 온도와 먹이도 풍부한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다.
그런데도 알은 오히려 적게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인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연의 삶,
즉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를 원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금붕어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까?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는 그 순간은 괴롭고 힘들 수 있겠지만, 고통을 통해서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두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관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고통을 극복하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이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하느님의 잘못된 행동이라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다면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에게
성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너무나도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온갖 근심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쁨의 원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슬픔은 얼마 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맛 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고달픈 생활입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봄에 애써 씨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거둘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는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적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현실적 안락함을 추구하면 내적인 기쁨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랑의 향기를 내는 신앙인의 소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결코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스스로가 그 기쁨을 놓아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승리’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의 말·샘 기도>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 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보 길에 새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새들은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분주한 것은 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애벌레들이 느리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벌레들에게는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산보를 가는 사람이 무심코 밟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새들에게 아침 식사가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don't just hope for easy resolutions;
instead, strive to make yourself stronger."
어떤 나비도 애벌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거친 애벌레들은 마침내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입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시 애벌레의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산보길에 보는 애벌레들이 무사히 나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님은 위암이 생겼고, 암은 여섯 군데의 장기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3개월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암을 극복해서 살고 싶은 의지가 강했습니다.
몸에 많은 의료장비를 달고 있으면서도 산보를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형님은 직업을 포기하고 동생을 위해서 이사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형제님을 찾아가서 고백성사를 드렸고,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건강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드렸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나자로가 무덤을 덮었던 돌을 치우자, 무덤에서 나왔던 것처럼
형제님의 갈망, 형님의 돌봄, 신부님의 기도가 함께하니 형제님을 덮었던 암이 치워졌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형제님도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었습니다.
3년 동안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형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3년 동안 힘든 일을 참아 주었던 아내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환시를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상의 기쁨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는 데 있다.
세상의 기쁨은 곧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이요, 참혹함과 비통함이다.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아부친 세상이 승리에 취해 기뻐하는 가운데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고통과 좌절을 맛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세기의 대역전극이 벌어질 것이다.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은 머지않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제자들이 기뻐하게 되면, 반대로 세상은 슬퍼하게 될 것이 뻔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호자시며 진리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고,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9-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의 걱정과 고통에 비유하신다.(21절)
하느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는 것은
예언 문학에도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호세 13,13; 이사 27,17-18; 예레 6,24 참조)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산모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듯이
제자들의 고통과 슬픔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의 때와 기쁨의 이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2절)
부활의 기쁨은 산모의 기쁨에 비유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모의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기쁨에 넘치게 할 것인즉,
부활은 새로운 생명에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이 생명과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때가 오면 더 이상 의문도 질문도 없을 것이다.(23절)
그러나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슬퍼하거나 울고 있는 자는 부활의 좋은 증인이 될 수 없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자만이 참다운 부활의 증인이 된다.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고 기뻐했던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잘못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그 기쁨을 알 수도 없다.
결국 세상의 기쁨과 상대적인 제자들의 슬픔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시 동안이겠지만,
대역전극이 벌어진 후에 맞이할 세상의 슬픔과 제자들의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기쁨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쁨이란 인간의 기본 정서 중의 하나로서 슬픔과 대비되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가지거나,
어떤 분위기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의 감정은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슬픔, 두려움, 쾌감, 불쾌감 등과 같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표현은 외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내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 표현되거나 내적으로 머물게 되는 기쁨의 다음 단계가 더 중요하다.
기쁨은 마음의 현상이나 상태이기 때문에, 필시 다음 단계의 동작을 유발시킨다.
즉 기쁨을 맛보거나 누리는 主體는 일반적으로 자랑 또는 교만을 표현하거나,
아니면 감사의 행동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대학 진학을 원하는 고등학생에게
응시한 대학의 경쟁이 심할수록 합격했을 때의 기쁨이 커지는 것이다.
이때 고등학생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자랑, 아니면 감사를 유발시킨다.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죽여 제거한 세상의 기쁨도
다음 단계로 자랑과 교만과 자만에 가득 차 우쭐 댈 것이다.
이럴 때의 기쁨은 오히려 육체가 성취한 쾌락에 가깝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된 제자들의 기쁨은
다음 단계로 감사의 情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때의 기쁨은 정신적인 쾌감이다.
우리 자신도 늘 그렇다.
따라서 기쁨이 있을 때 자만과 교만에 빠지지 말고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기쁨은 분명히 그 이상으로 커질 것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과연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 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이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전삼용 요셉 신부
저는 어렸을 때 잠을 참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고 못 일어나고 나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존재이니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과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 ‘준비’하고 사는 삶입니다.
저는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온종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잠이 두렵지 않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까를 궁리했습니다.
이것이 잠을 이길 수 없는 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온종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어도 많이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커피를 마시지 말고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올 사건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지 밝히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은 아기를 낳은 기쁨으로 잊어버립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가치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음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의
‘하늘 나라 첫 동네’에서 ‘전과 20범’ 환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 명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였는데
위암 말기로 가망이 없어서 성모 꽃마을에 맡긴 것입니다.
처음 들어올 때는 마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몸집도 큰 데다가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 도합 5단이나 되는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암 말기라고는 하나 그 살기가 대단하였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정을 망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어렸을 때부터 어긋나서 술만 마시면 싸움질이었습니다. 워낙 싸움을 잘했습니다.
몇 년씩 여섯 여자와 살았는데, 그중 한 여자가
이제 다른 남자와 살겠다고 그 남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화가 난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한 대씩 때렸는데 둘 다 사망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또 싸움하다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가밀로 신부님은 그 사람이 불쌍하여 수소문한 끝에 그의 동생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고 하고
형도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밀로 신부님의 부탁으로 서로 좋은 말만 하기로 하여 만났습니다.
처음엔 형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거기서 끝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해서
조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못난 형을 둬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죽는 거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 출혈로 각혈을 하게 되자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죽음이 두렵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도 형과 조금 더 있다가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며 조금씩 화해하였습니다.
형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잠도 이기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 뒤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니!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은 공짜로 주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무언가 준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끝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도 기쁠 수 있는 무언가를 낳아야 합니다.
위 사람은 가밀로 신부님 말대로 용서라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교만으로 자신이 죽음 뒤에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맙시다.
그러면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는 피를 흘리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대신 그 순간이 오면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주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 선교의 열매를 준비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