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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Scene 12. The Divine /신성/
컨웨이 성의 커다란 중앙 홀은 환자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신음소리나
울음소리가 넘쳐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홀 안의 환자들은 마치 신전
예배당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조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성녀(聖女)
'가 그들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호는 일행들과 함께 홀 한 구석에서 에반제린 여사제가 환자들을 위
해 기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넘어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서 예전의 짧은 갈색 머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
가 무릎을 굽히고 환자의 손을 잡을 때마다, 그녀의 은발은 바닥에 흐
트러지며 반짝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차마 그녀의 머리카락을 밟을까
조심하면서 환자들의 수발을 돕기위해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그녀의 손에서 부드러운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지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지호가 보기에는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보다는 그녀가 더 환자처럼 보였다. 아직은 무리라고 얘기했지
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청해서
그녀의 일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사제 에반제린으로부터 솟아난 빛의 기둥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
꿔버렸다. 아이리스는 그것이 '신의 현현(顯現)' 이라고 말했지만, 지
호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빛의 기둥은 공포스럽게 솟아오르던 '물의
용'들을 잠재웠고, 광기와 공포에 지배되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다친 사람들은, 비록 상처가 완전히 낫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확실
히 상태가 호전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회복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되었
다고 할까. 그러나 그런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 다
시 살아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에반제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녀가 깨
어나기 전부터 그녀와 지호의 곁에 둥그렇게, 혹은 서서, 혹은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리고 눈물 흘렸다. 여사제 에반
제린은 귀까지 얼굴이 빨개지며 허둥댔지만,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
다.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살아있는 성녀(聖女)였으니까.
지호가 만류했지만, 여사제는 정신을 차리자 마자 자신의 일을 시작했
다. 그녀의 뜻에 따라 살아남은 환자들은 전부 컨웨이 성 중앙 홀로
옮겨졌고, 부두 옆 창고에선 죽은 사람들을 위한 장례가 치러졌다. 그
리고 그 장례를 마치자마자, 그녀는 이곳 중앙 홀로 돌아와 직접 환자
들을 위해 기도하며 수발을 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도 늘 하던 일들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녀의 주위
에 많은 사람들이 지극한 공경을 보이며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누구도 거역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려 하지 않았다. 부두
에서 빛의 기둥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발 앞에 고개를 숙였
다. 그럴때마다 여사제 에반제린의 볼이 빨개지며 몸둘바를 몰랐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마치 살아있는 신(神)처럼 대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엘런이 중얼거리자 일레인이 조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거지. 아니, 더 나빠졌어. 배
는 전부 전복되어 버렸고, 성을 지키던 경비대는 거의 몰살 당해 버렸
잖아. 거기다 성 밖에는 저 독립 기사단이 건재하고. 그런데도 사람들
은 무슨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저 여사제만 따라다니고 있으니……"
"이봐. 스피, 아니 일레인. 그렇게 얘기할 것 까진 없잖아. 그래도 성
녀님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는데 그래."
확실히 감동받은 듯한 표정을 하며 여사제를 지켜보고 있던 덩치가 한
마디 했지만, 일레인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너까지 성녀님이야? 이 기회에 신앙이라도 가질껀가 보지?"
"야, 너!"
덩치의 얼굴이 구겨지며 큰소리가 나오려는데, 아이리스가 조용하게
말했다.
"저분은, 충분히 성녀라고 불리울 만 해요. 신의 현현이라는 이런 기
적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예요. 그게 저 사제를 통해 일
어났어요. 아마도, 제국 중앙 대신전에서 이 일을 안다면 당장 저분을
성녀로 추대하고도 남을거예요."
"그래도 우리 사정이 더 나빠졌다는 건 변함 없어요."
아이리스의 말에 일레인이 한마디를 더 던졌지만, 아이리스는 신경쓰
지 않았다. 그보다 아이리스는 여사제를 계속 주시하며 뭔가 다른 생
각에 골몰해 있었다.
"저, 저기 그 현현이라는게 뭐야?"
덩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덩치에게 대답한 것은 당연히 엘런이었다.
"현현은, 신이 이 땅에 나타나는 거야."
"그, 그럼, 그 빛 기둥 같은게 하나님이야?"
엘런의 눈이 찌푸러졌지만, 곧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하긴, 그 쪽은 나도 잘 모르니까. 어쨌든 그 빛 기둥이 하나님은 아
냐. 아마 단계가 높은 기적 같은 걸 거야."
"기적하곤 좀 틀리지."
갑자기 들려온 지호의 목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지호에게 향했다. 지호
는 갑작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기적은 신의 힘이 그의 사제들을 통해 발휘되는 거지만 현현(顯現)은
신의 본질에 속한 성품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야. 신의 본질이 이 땅에
임한다는 점에서 현현은 기적이라기 보다는 강림(降臨)에 더 가깝지."
"우와. 지호, 너 사제 수업이라도 받았던 거야? 대단한데?"
덩치의 감탄이 아니더라도, 일행의 눈빛은 확실히 의외라는 쪽이었다.
지호는 머쓱한지 한번 더 헛기침을 하고는 슬며시 말을 맺었다.
"그냥, 제국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게 기억난 것 뿐이야."
하지만 덩치가 지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덩치는 눈을 빛내며 물었
다.
"그럼 강림은 뭐야? 더 쎈거야?"
지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강림은 신이 이 땅에 임하는 거야. 신화시대에 한번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인데다, 신이 강림한 곳은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해. 대륙 서부
의 사막지역이 신의 강림 때문에 생겼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엥? 뭐야. 나쁜 신이 강림한거였어?"
"그게 아니라……"
지호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대답했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이 세계가 견뎌내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신
이 강림하면 뭐든지 일단 소멸이야. 그건 작아서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는 거랑 같아. 아무리 옷을 아끼는 마음이 있더라도 그랬다간 옷이
찢어지고 말지. 더 이상은 나도 몰라. 그 이상 배우지도 않았고."
"아아."
그제서야 덩치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아이리
스가 지호를 불렀다.
"지호."
지호의 눈이 살짝 찌푸러졌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말은 지호가 생각하
던 신학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사제님에게, 우리와 동행해 달라고 부탁해 볼 수 있겠어요?"
지호가 어리둥절해 하자, 아이리스는 눈을 빛내며 지호를 바라보았다.
"성녀라는 이름은, 때로는 황제보다도 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지호는 아이리스의 눈을 피했다. 그의 눈은 또 다른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고 있는 여사제를 향했다. 그녀가 잡은 손에서 은은한 금빛
이 흘러나왔고, 길고 가늘게 반짝이는 은발은 그녀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사람인 것 같은 신비감을 주었다. 그러나 지호는 아직도 시골
소년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구원의 손길은 의외로 빨리 왔다. 저녁 나절에 망루를 지키던 병사가
강 건너편에서 보내는 수기신호를 관측했던 것이다. 성벽을 지키던 젊
은 장교는 한달음에 성녀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수도에서 보낸 기사단
의 선발대가 강 건너편에 도착한 것이다. 어느새 컨웨이 성내의 모든
사람들은 성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이것이 성녀의 또 다른 기적이라도 되는 것
처럼 감격스러워 했다. 여사제는 더욱 몸둘바를 몰라 했지만, 컨웨이
성에서 뻗어나온 빛의 기둥을 목격한 선발대가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
라니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쪽의 소식을 전달받은 선발대측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배
를 구하고 있었고, 제국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새벽 동틀 무렵에 일제
히 컨웨이 강을 건너기로 했다.
문제는 밤 사이에 제국군이 기습이라도 시도하는 경우였다. 지금 그들
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컨웨이 성의 회색빛 성벽 뿐이었다. 그들이 공
격을 시작한다면 채 몇시간이 못되어 성문이 열리고 말 것이었다.
제국군은 낮의 위치에서 꽤 후퇴하여 진을 치고 있었고, 아직까지 이
상한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습은 언제나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새 해가 지고 컨웨이 성내의 사
람들에게 가장 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저, 저기. 저는…… 떠날 수 없어요."
여사제 에반제린은 조금 더듬거리면서도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일레
인이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 뿐인가요? 이 전쟁을 막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거예요. 장례식이나 치뤄주고, 상처나 돌봐준
다고 다가 아니란 말이예요."
일레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일
레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성녀님에게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레인은 그들의 눈빛을 접하고도 전
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 그래도 숫자로 그런 걸 따질 수는 없어요."
사람들의 매서운 눈빛에도 꼼짝하지 않던 일레인이 할 말을 잃었다.
뒤에서 조용히 듣고있던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네. 성녀님의 말씀은 저희도 인정해요."
"저, 저기 그 서, 성녀님이라는 말은…… 전 견습사제일 뿐이예요."
여사제의 얼굴이 금새 붉어지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때 부두의
사건 이후, 그녀의 조금은 날카롭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부끄러워 말을 더듬는, 지호 표현대로 순박한 시골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아이리스가 살짝 미소짓고는 말을 이
었다.
"하지만, 기도를 해 보실 수는 있겠죠? 하나님께서 사제, 아니 견습사
제님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예요. 그분께서 견습사제님께 이
런 신성력을 주실 때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
까요?"
아이리스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여사제 에반제린은 가만히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곧 몸을 돌렸
다. 아직도 그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때, 지호의
목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견습사제님."
"네, 네?"
그녀는 갑자기 지호를 대하는게 서툴러졌다. 약간은 차갑던 예전 그녀
의 반응을 생각하며 지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나시는 대로 제게 들러주세요. 시침(施鍼)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절대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아, 네. 그, 그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오늘내로 시간이 난다
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여사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아이리스는 일행에게 말했다.
"일레인, 지금 성내에 남아있는 사람들하고 환자들 상황을 대충 파악
해 볼 수 있겠어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할 수 있어요. 왜요?"
일레인의 대답에 아이리스가 말했다.
"내일 새벽에 배가 온다지만 충분한 숫자가 오리라고 보기는 힘들어
요. 환자와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을 먼저 태우겠죠. 누가 뭐래도 성
녀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실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가장 나
중에나 차례가 돌아올 거예요.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그 안에 독립
기사단이 공격을 시작하기라도 한다면 현재로선 속수무책이예요. 이대
로 주저 앉아서 마냥 기다릴 수 만은 없지 않겠어요?"
아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덩치와 엘런을 불렀다.
"덩치님, 엘런님. 현재 성의 방어상태가 어떤지 조사해주세요. 만약
독립 기사단이 공격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최
대한 버티기 위한 방법들도 찾아주세요. 성문에서 부두로 통하는 도로
들도 점검하셔야 해요."
"알았어요."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성의 지도를 얻을 수 있을지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성녀님께 부
탁하면 경비대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호."
지호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이리스에 대한 신뢰가
떠올라 있었다. 아이리스는 말했다.
"독립 기사단의 움직임을 조사해 줘요. 위험하겠지만, 지호 밖엔 없어
요."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아요.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절대 무리해선 안돼요. 조심해요."
아이리스는 다시 한번 당부했지만 지호는 그저 미소로 응답했을 뿐이
다.
"살아서 컨웨이 강을 건너는 게, 이기는 거예요. 다들 조심해요."
아이리스의 말에 모두들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
자 맡은 바를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허억!"
렌은 신음을 삼키며 번쩍 눈을 떴다. 땀을 흘렸는지 온 몸이 축축했
다. 렌은 자신이 독립 기사단 막사 안에 누워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욱!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한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마치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고 머리는 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
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혹시라도 자신이
잠결에 비명이라도 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무의식중에서라
도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여선 결코 안되었다.
조금 지나자 고통이 조금씩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하게 시전
한 마법이었다. 만일 그대로 마법이 지속되었다면 결코 이 정도의 고
통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의 기둥이 그녀
의 마법을 강제로 안정시켜 버린 것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녀를 도와
준 셈이 되었다.
"후우-"
깊게 한번 숨을 내쉬고 나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그녀
는 간단한 갑옷을 입고 있는 채였다.
그녀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 쉬고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갑옷을 벗
고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검은색 전투용 로브를
걸치고는 막사 밖으로 나섰다. 막사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두명
의 기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경례를 했지만, 그녀는 눈도 돌리지 않
았다.
바깥은 한밤중이었다. 얇게 깔린 구름에 가려 희미해진 달빛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있어서인지 한창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렇게 덥진 않았지만 축축한 공기가 거슬렸다. 그녀는 조용히 강 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응?
어디선가 조그맣게 노랫소리 같은 것이 살짝 들려왔다. 지호는 그렇지
않아도 몸을 숨길 곳이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멀리 보이는 독립 기사단 숙
영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쪽은 아직까지 별 움직임은 없는 것 같은데……
야간 정찰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초원은 몸을 숨길 곳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지호는 땅바닥에 거의 붙어서야 간신히 몸을 숨길 수가 있었
다.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것이 전혀 없어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독립 기사단의 숙영지의 모습을 잘 관찰할 수가 있었다.
막사들과 세워둔 방패들 때문에 숙영지 중심부의 사정은 잘 파악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오늘밤의 습격은 없다고 여겨도 좋을 듯 했다. 그래
도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지호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매복에 신
경을 쓰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던 터 였다.
이 소리는, 강쪽인가?
아마도 지호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소리는 작았다.
그나마 한줄기 강바람이 실어다 주지 않았으면 지호도 알아채지 못했
을 것이다. 설마 강쪽으로 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확
인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좋아.
마음을 굳힌 지호가 한순간 몸을 날렸다. 낮에 내린 비에 아직도 젖어
있는 풀들이 미끄러웠지만 지호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문제였지만, 강쪽에는 꽤 키가 큰 풀들이 자라나
있어서 강쪽으로 다가갈수록 발견될 위험은 적었다. 순식간에 지호의
모습은 강쪽으로 사라져 갔다.
하늘은 닫히고 땅에는 슬픔이 가득해요.
남은 자들의 만가가 회색빛으로 물들어갈 때,
그대, 나를 위해 노래해 주세요.
나의 생명, 나의 사랑, 나의 운명인 그대,
나를 위해 노래해 주세요.
부드럽고 슬픈 노래를.
그대, 나의 사랑이여.
지호는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도 간신히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지호
에게 등을 돌린 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기로 불어난 강물이 바
로 가까이에서 흐르고 있었고, 한밤의 물소리는 생각보다 컸지만, 노
래하는 목소리가 여자라는 것 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은
로브를 보고 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독립 기사단에 소속된 마법사인가?
혹은 기사단에 소속된 사제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습격을 하기 위한
매복은 아닌게 분명해 보였다. 몸을 낮추고 풀숲에 숨어있던 지호는
그만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노랫 소리
가 끊겼다. 지금 막 일어서려던 지호는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바스락-
노래를 부르던 여자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지만 허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한순간 자신의 부주의함을 후회했지만 잠시 뿐이
었다. 그녀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그러나 강
하게 말했다.
"거기 누구냐!"
지호는 망설였다. 상대는 마법사일 확률이 높았고 지호가 숨어있는 위
치를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지호는 상대를
향해 힘껏 몸을 날렸다.
파아악-
지호가 풀 숲을 벗어나는 순간, 달빛이 구름을 헤치고 그 얼굴을 드러
내며 부드러운 빛을 강변에 뿌렸다. 그리고 달빛 아래 검고 긴 머리를
가진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호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키며 발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몸을 숙인 채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던 여자의 얼
굴에도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 앞에는 긴 상처가 인상적인 갈색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지호 티에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국의 독립 기사단 단장 레이디 렌 남작, 렌 마이야였다.
"지호 티에라……"
렌의 얼굴에 떠올랐던 경악의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렌은 갑작스런
지호의 출현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듯 했다.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지호는 당황했다. 독립 기사단 단장이 렌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녀를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 컨웨이 성에 있는 건가요? 어떻게 가문의 후계자가 제국을 벗
어난거죠? 그럼 설마, 지난 3년동안 제국 바깥에 있었다는 말이예요?"
렌은 웃음까지 흘렸다.
"훗. 지난 3년간 당신을 찾겠다고 온 제국을 돌아다닌 내가 정말 바보
같군요. 당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예요."
"지금 우리가 그런 얘기를 나눌 땐가요?"
지호의 음성은 싸늘했다. 렌은 잠깐 놀란 듯 했지만, 다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으면요? 지금 절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저는 비명이라도
지르며 도망가야 하구요? 아니면, 당신이 도망갈 건가요?"
"후우-"
지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맥이 빠지는군요."
지호의 말에 렌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웬지 슬퍼보
였다.
"이 밤에 강변에는 무슨 일이죠? 정찰인가요?"
렌의 말에 지호가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이죠? 이 밤에 혼자서, 거기다 노래까지……"
렌은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강바람이 불며 렌의 길고 검은 머
리를 뒤로 날렸다. 렌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강바람이, 너무 시원했어요."
그녀는 말없이 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앞을 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서 지금이라도 다
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지호도 그녀의 시선을 좇아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낮에는 탁하게 일
렁이던 컨웨이 강도, 부서지는 물결이 달빛아래 반짝이며 보석처럼 아
름답게 보였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부서지는 물
소리만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이제, 가세요."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지호가 고개를 돌리자 렌
은 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
다.
"기사단은,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움직일 거예요. 그전에, 피하도록
하세요."
지호가 물었다.
"함께 갈 수는, 없나요?"
렌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걸렸다. 강바람이 불어 그녀의 검은 머리를
날렸지만, 렌은 날리는 머리를 쓸어넘기지도 않고 그대로 지호를 바라
보며 말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건가요? 나는 당신의 원수이고, 게다가…… 마
녀인데도?"
약간 놀라는 지호을 보고 렌은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도 귀는 있어요. 심지어 기사단원들마저 수군거리죠. 하지만, 어
쩔 수 없어요. 나도, 내가 한 짓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요. 아마도 전, 용서받을 수 없을 거예요."
"렌……"
지호는 뭔가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을 뻗고 싶
었지만, 얼마 안되는 그녀와의 거리는 너무 멀어보였다. 렌은 다시 고
개를 돌려 지호를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세요. 그리고, 이제 다시는 당신과 만나지 않길 바래요."
그 말을 끝으로 렌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서 지호
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거예요. 렌."
하지만 나는 포기했어요. 아니, 애초에 그럴 자격도 없었던거예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렌은 조용히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서 지호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렌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지호는 자리에 없었다.
"우욱!"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꺾었다. 그녀의 입 가엔, 피
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여사제 에반제린의 도움으로, 아이리스는 얼마 남지않은 경비대원들을
밤새도록 지휘하며 방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부상
자와 아이들을 모두 부두에 옮기는 한편, 다치지 않은 사람들을 분류
하여 임시로 무기를 지급하고 경비대에 편성했다.
습격에 대비해서 성벽 위에는 횃불을 밝히고 버틸만한 것들을 가져다
가 중앙 성문을 단단히 막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국군의 습격은
없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강 건너편에서 배들이 건너오
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의 지휘 아래, 경비대원들은 빠르고 질서정연하게 사람들을
수송했다. 그리고 첫 배들이 부두를 떠나기 시작할 때, 지호는 여사제
에반제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제님은?"
지호의 말에 덩치가 대답했다.
"아, 성녀님이라면 아까 창고 쪽으로 가시던데? 아직 안 오셨나?"
지호는 창고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여사제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호는 그녀가 기도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밤을 샌 건가.
성내로 돌아온 지호가 혹시나 해서 여사제를 찾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들 뿐만 아니라 성내의 거의 모든 사
람들이 그녀를 필요로 했고, 그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사양
하지 않았다.
지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데, 어느새 기도가 끝났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창고 저편에서 여사제의 모습이 나
타났다.
"아, 지, 지호님."
"배가 떠나고 있어요. 가시죠."
여사제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저, 저기. 저는…… 마, 마지막 배를 탈 거예요. 여러분과 같이……"
지호의 눈이 커졌다. 여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겠어요."
지호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사제, 아니 견습사제님은 어쩌면 이용만 당할지도 모릅니다. 정치나
외교 같은 건, 복마전(伏魔殿)이예요. 그곳은, 견습사제님 같은 분이
있기에는……"
여사제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는 말했다.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제 걱정은 않으셔도 되요. 어차피 제 목숨은
그때 부두에서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지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순박한 시골 소년 같은 그녀가 버
텨나갈 수 있을 정도로 정치와 외교라는 싸움터가 만만한 곳은 아니었
다. 여사제가 지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
가 말했다.
"가시죠."
여사제는 발걸음을 옮겨 부두로 향했다. 가만히 서 있는 지호를 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그때 부두에선, 정말 고마왔어요."
그녀가 부두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작아졌지만, 지호는 굳은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런 사람까지 끌어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지호는 착찹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첫댓글 감사^*
즐독하였습니다
즐독하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