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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18,23-28
복 음 : 요한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할머니를 말씀하시면서, 이 할머니는 신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훌륭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할머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할머니께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주셨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실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성모님은 (할머니는 자기 집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교황님은 할머니께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성모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대답에 교황님께서는 감탄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 가리키신 것이 성모님의 삶이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언제나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보다 세상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논리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즉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주 흔들리면서 세상의 뜻을 따르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그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즉,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쫓아야 합니다.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알아듣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용기 있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역경,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일 맞이할 더 큰 기쁨을 생각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기쁨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동시에 헌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처음에는 근심이었지만, 나중에는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가 안고 가는 십자가도 수고와 인내의 근원이지만,
언젠가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송봉모).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 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드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97세의 어머니는 노환이 심해져서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타주에 있던 아들은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1달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무입니다.
보름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점차 나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곡기를 끊으신 어머니는 정말 많이 야위었습니다. 아들은 한 번 더 전화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호흡이 가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미사시간이 아직 2시간이 남았기에 기꺼이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시고,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고, 어머니는 1달 동안 3번의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둘째 아들 부부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도 말없이 묵묵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냉담하다가 다시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매주 점심 준비를 해 주는 구역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 100% 보장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죽음이 초래할 세상의 기쁨과 제자들의 슬픔이
부활이라는 뜻밖의 사건으로 완전히 뒤 바뀌어 질 대역전극이 예고된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올 제자들의 기쁨은 성령의 강림으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되었다.
성령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속성을 보장해 주실 분이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에
성령께서 보호자로서, 그리고 진리를 일깨워 주시는 자로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청함’과 ‘얻음’에 대하여 하신 말씀으로 시작된다.
청함과 얻음에 대한 말씀은 2차 고별사 중에 이미 한 번 있었다.
처음은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마무리하시던 즈음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고 하신 말씀이다.(15,16)
정말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면, 간청하면, 다 받아들여지는 것인가?
딱 잘라 말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청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데는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바로 세상에 나가 섞지 않고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 것,
즉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며,(13,34; 15,16-17)
동시에 그 행동으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수용되는 조건은 곧 구체적인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며,
나아가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곧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 直航路가 개설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길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바로 그 직항로의 길이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시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신다.
그러나 세상의 배경에 비가시적으로 머물러 계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하느님, 그리고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더 밝아졌고, 따뜻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명확해졌으며,
보호자이시고 진리이신 성령의 약속도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의 충만한 기쁨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구하는 모든 것 안에 경험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장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의 그무엇보다도 높은 이름이 되었다.
이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은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셨으며,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께는 기쁨과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된다.
그 안에서 우리의 기쁨도 충만히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人間性을 수용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자신의 居處를 마련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궁전을 마련하셨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肉化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지려 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그분 자체가 되시는 것과 같다.
이제 인간의 모든 정신과 영혼과 육체의 원동력은 하느님 성령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신비스러운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나아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릴리안 수녀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우리의 삶 또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과 같지 않을까?
모태에서 열 달을 품고 태어나온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곳에 잠시 나와 세월이 흐르고 각자의 때가 되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 원천인 그곳으로 아버지를 뵈러 가는 여정길인 것이다.
‘귀천’이라는 노래에서 이 지상에서의 삶이 ‘소풍’이라고 했던 노래가사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소풍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아버지께 가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상상도 해본다.
아버지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자비스러운 눈빛으로 기특하게 바라보시지 않으실까?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