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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제1독서 : 사도 1,1-11
제2독서 : 에페 1,17-23
복 음 : 마르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오늘 복음과 독서는 각각 마르코 복음서의 마무리와 사도행전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책 전체를 요약하는 결정적 부분들을 배치하여,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복음)이 곧 교회의 시작(독서)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 교회의 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 생활 동안 갈릴래아나 예루살렘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하심으로써 그 어떤 시공간에도 매이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이는 복음에서도 분명히 선언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 당신께서 행하시던 일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독서를 포함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전하여 주는 동시에,
그 교회가 걸은 여정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현존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과 연결되고, 떠남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현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떠남이나 멀어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인간과 더 깊은 유대와 공존의 관계를 맺으려는 도약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현존과 구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계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났다가 애플이 망할 즈음 다시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그가 맨 처음 시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제품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제품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개에 달하던 애플 제품을 전문가용, 일반인용, 최고 사양, 적정 사양으로 분류해서
단 4가지 상품으로 압축했습니다. 이 결정이 다 죽어가던 애플을 살렸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필요한 것이 참 많아 보입니다.
쇼핑몰에 들어가면 정말로 다양한 제품이 있고,
이 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유를 늘릴수록 나의 삶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 아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 갖고 싶은 욕심, 남보다 많은 것을 가져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에 오히려 소홀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어떤 것과 대치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다른 세상 것을 제거하지 못해서 주님을 맨 뒷자리에 놓습니다.
점점 주님과 멀어지면서 자기와 아무런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필요를 분명히 알고 열심히 기도하며
각종 신앙생활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서 주님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남길 정도로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에게 큰 선물을 표징으로 주실 것입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고
이제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그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주님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생명,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와 죽음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랐는데 믿는 이들의 대표격인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았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서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으면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을 흉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잡고 험담하는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르코복음 8,33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사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말,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눈을 뜬 만큼, 귀가 열리면 열린 만큼 새로운 언어로 듣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혹 거리가 많고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해를 입히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 다양한 여건들이 상처를 주고받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아무리 우리를 해치는 말을 들어도,
또 유혹하는 말이나 행동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나 독을 마시지 않으려고 외부 환경을 고칠 것이 아니라,
그런 독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손으로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새기며 실천하고,
미사 안에서 영성체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말합니다.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영적인 병을 앓는 것입니다.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고,
육적으로는 환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치유하는 명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는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보약 중의 보약입니다.
이 보약은 어떤 중병도 치유합니다. 이 보약을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천상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전례는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답송>은 승리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호소리 드높은 가운데 성전에 오르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백성 너희는 손뼉을 쳐라.
기쁜 소리 드높이 주님 부르라.
~ 노래하라, 노래하라, 하느님께 노래하라.
고를 타며 우리 왕께 노래를 불러라.” (시편 46,2-7)
이처럼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만,
영광을 입으시어 왕으로서 성부 곁에 좌정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이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승천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승천을 암시해줍니다.
이에 관해 레오 교종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를 위한 고양이요,
앞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리하신 거기에는 그 지체인 우리를 위한 희망이 있다.
~ 오늘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확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간 것이다.”
(예수 승천 강론)
이에 관해서 <본기도>도 다음과 같이 경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우리의 성장이 촉진되며,
또한 머리이시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올라가신 그곳으로 지체인 우리 희망도 따르오니,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에 용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게 하소서.”
또한 이를 <감사송>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되신 주 예수, 죄와 죽음의 승리자로 개선하시어~
우리의 으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어, 앞서가시면서 당신 지체들인 우리도
당신이 가신 데로 따라가게 하셨나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광 중에 천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한편 <제1독서>는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이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에페 18-23)
그리고 <복음>의 첫째 장면은 '복음 전파'의 사명과 그에 따른 표징을,
둘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셋째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의 복음 전파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단지 복음 선포의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따르게 될 표징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는 새 창조로서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사물들의 질서 전체를 전복시키는 힘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게 되고,
창조의 구조 자체를 새로운 관계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쪽에 앉으심으로써 취하신 왕권과 권능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통치와 권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 1,20-22)
셋째 장면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명령에 순명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특별히 승천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의 참된 목적이
바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능을 복음 선포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실현시키게 됩니다.
이처럼 승천은 주님께서 멀리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때와 시간의 제약 없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바로 그분의 동행으로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번 성지순례 갈 때입니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할 체크에 미리 사인을 해 놓았습니다.
사무장님이 30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사제관에는 보름정도 자리를 비우니 빨래를 미리 해 놓았습니다. 쓰레기도 모두 치웠습니다.
사제관 청소를 하는 날은 부주임 신부님께 문을 열어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도 대충 정리했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출장을 갈 때면 비슷하게 준비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사무실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체크에 사인하고, 서류 결재하고, 원고 교정보고, 냉장고도 정리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도, 출장도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없어도 직원들이 성당과 사무실을 잘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메일이나 문자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없을 때, 오히려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가능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를 믿고 휴가를 가셨기 때문입니다.
평일미사 2번과 주일미사 4번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오시면 기뻤습니다.
업무가 줄어서가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절망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고야 믿겠다는
토마 사도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 해 주셨을 때 가슴이 떨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고 ‘승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보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없을 때,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키고, 일을 했던 것처럼,
제가 본당 신부님이 안 계실 때, 자리를 잘 지켰던 것처럼,
제자들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렇습니다. 직원들에게 제가 성지순례를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출장 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곧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존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안에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과 승천을 분리해서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과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죽은 이들이 가는 땅속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된 우주였습니다.
그런 우주관을 전제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돌아가셔서 땅속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곧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루카복음서의 저자가 그 후편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저자는 루카복음서의 말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고
그들은 베다니아로 데리고 나가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40일 후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같은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해 이렇게 다른 기록을 남겼을 때는
승천의 일시와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흗날에 부활하셨다는 말은 돌아가시고 72시간 후 부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사흘은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결정적인 날에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40일은 사람이 자세를 결정적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세월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친 것으로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쳤던 제자들이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전향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르치기 시작하기까지는 어떤 기간을 필요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온 세상에 가서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가셔서 그분과 함께 계신다는
제자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듣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인류는 하늘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하늘에 빌고, 하늘을 우러러 반성하고,
푸르고 넓은 하늘을 보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살아왔습니다.
오늘 대도시에 사는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삶의 일상 쳇바퀴에 갇혀서 삽니다.
넓고 푸른 하늘,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 삶에서 사라진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도 우리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우리 삶에 숙연함을 주는 체험이 사라졌습니다.
넘쳐나는 인간 생산품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보 매체들이 전하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우리는 모두 분주하게 또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삶이 인간 운명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승천축일은 하늘이 우리 삶에 의미하는 바가 있듯이,
우리가 묻혀서 사는 일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 삶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넓고 푸른 하늘,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하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하늘입니다.
그런 하늘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넓고 신선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병사들을 고쳐서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이들을 용서하여 하느님의 넓으신 자비를 체험하게 하여,
흔연하고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무질이 풍요로워야 행복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 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에 얽매이지 말고 푸른 하늘과 같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언도를 내린 유대인 최고 회의와,
그 언도를 확인하고 집행한 빌라도는 이 세상의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패자로 죽어가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사람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그들의 박수갈채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실패의 공간에서도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덤의 공간을 넘어 하늘은 우러러 사는 신앙인들이 나타나면서 그들 안에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무덤으로 끝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것을 넘어 사람들 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그리스도 안에 새로움을 체험한 바울로 사도의 외침입니다.
할 일을 다하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하는
마음의 허허한 공간에 하느님이 열어주시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 새로움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지키고 바치면서 강자에게 붙어살 듯이, 하느님 앞에서도 지키고 바쳐
자기 한 사람 잘되어 보겠다던 우리의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가난하고 울어도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라는 승천이 아닙니다.
하늘이 있고, 그것을 우러르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예수님과 하느님을 빙자하여
높다고 행세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비록 문화는 달라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모든 사람들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삶의 허무한 공간을 넘어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하늘과 예수님은 겹쳐서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빌 듯이 예수님께 빌고,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예수님을 우러러 봅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곁을 떠나 당신이 취하신 인성이 함께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승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바로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왕권과 권능을 가지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구원의 충만성은 이제 교회의 선교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되고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선교사명”을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구원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삶으로 증거가 돼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심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20절).
예수님 부활의 참된 목적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통치권이 드러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승리자이심을 실제로 드러내야 한다(2코린 2,14).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즉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내는 축제는 기쁨과 기다림의 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우리들의 고양(高揚)을 당신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닮음으로써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 16,7)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따를 수 있는 온갖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박 마리 피앗 수녀
+. 온 세상, 모든 피조물
세상 마지막 말씀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라 명령하셨다.
바로 곁에 있는 한 사람도 소통이 어려운데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하라!
마지막 유언을 받드는 효성스러운 자녀가 되어
긴 시간 켜켜이 쌓인 공덕은 아니라도
또 한걸음
꼭 한 걸음씩만…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