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껴간 평화
박말이 (2006.1.12.)
우리집에 병아리 한쌍을 키웠다.
내가 소녀적 일이다 두어달이 지나자 알~알 하면서 알자리를 본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든 어느 날 한 쪽 외양간 앞에 집 단이 헡어져 있는 곳에 암닭이 알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장닭이 두 날개를 부채처럼 펼쳐서 암닭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고오고 하면서 위로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하도 귀이했어 한참을 지켜 보았다. 암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 꼬꼬댁하면서 나오자 장닭이 모이를 쪼아 꼬꼬 하면서 주었다. 암닭이 그것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그 장면을 그냥 귀이하다고만 여기고 잊어 버렸다.
많은 병아리가 한 닭장에서 자란 닭들은 닭싸움을 자주 하게 된다. 무리 중에서 대항하고 이겨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날뛰는 것에 민감하다 보면 자연스레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이런 것들은 무리중에서 살아 남는데 몸짓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 병아리 한쌍은 자유롭게 살면서 정을 쌓고 소중함을 알고 위할 줄 아는 정서가 자랐든 것이다
나의 남펀의 머리카락 밑에는 머리카락 하나 흉터 하나였다.
그것은 어릴때 떼를 쓰느라고 돌밭에 넘어져 생긴 흉터라고 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화를 참지 못하고 변득이 심하고 계산적이 었다. 이런 행동은 일곱살 사내아이의 떼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 같으면 매라도 때려서 고쳐 보겠지만가장이라는데 무척 안타까웠다. 한 낱 날 짐승인 닭이 위하고사랑하며 사는가 하면 사람이 닭처럼 삼십칠년간을 싸우면서 살아온 가정이 나에게 있었다. "평화는 어디로 비껴같는지,..........?
집값의 반을 빚을 내어 이십평짜리 아파트를 샀을 때에는 내 나이 사 십 중반이었다.
그 빛을 갚는데 십 년이 걸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내 평생 한 번 뿐인 도박이 었다. 배를 타려간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현지에서 재 계약을 한 번 만 더 하면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그 편지를 받고는 되려 하선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왠 돈으로 집을 샀는지 궁금하여 하선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런데 빚을 내어 집을 샀다고 머리가 울리도록 차고 때렸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무리는 하는 것이 아니었다
뜻을 맞추지 않으려는 남편 때문에 다시 한 번 기가 푸욱 죽어 지냈다
집안이 더 어려워 지자 큰 아들이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고 나는 핫도거 구르마 장사를 했다. 장사가 끝나고 아이들 먹을 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 오는 발 걸음은 터들 터들 무거워도 마음만은 행복했다. 내손으로 벌어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 뿌듯한 일인지 그 때 알았다. 남편은 술집에서 술이 취하면 돈을 이마에 붙이고 춤을 추다가 돈을 입으로 씹어 뱉아 버리기도 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웃어 좋고 본인은 즐거워서 좋은데 나는 슬퍼졌다
이런 삶이 정리 되는 날이 오고 말았다
나이에 밀려 외양선을 접고 지방배를 타면서 술은 먹지 않았지만 성격은 더 민감해 졌다. 그 때 부터 나를 더욱 군림하려 들었다 술을 먹지 않고 열심히 벌어다 주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냐?는 말이었다. 무엇이든 비위에 안 맞으면 말 그대로 난리가 일어 났다, 남편이 없는 사이 짧은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 주먹까지 받아야 했다. 한 번은 친정 어머니가 내 턱 밑을 보고 "너 앙조가리(말댓구)다가 멍들었지 했다. 어머니도 내 속은 모르는 것이 었다, 턱밑을 지워 밖히는 일도 뺨맞는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다. 나를 얼마나 오래 참는지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내 아닌 어느 누구도 속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 오 년을 삐꺽거렸지만 일상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손에 통장이 생겼다 그 때는 학생이 있고 딸도 자라고 돈쓸일이 여기 저기라 그 통장을 딸 방 장판밑에 감추웠다. 그 날 시장에 갔다 오는데 대문은 열려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판밑에 감줘 둔 통장을 남편이 들고 며느리 한테로 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뒤적이는 솜씨는 귀신도 못말리는 것이 었다, 방구석 농구석 지갑 다 뒤져서 맘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자가 아는 사람에게 다 갔다 주는 것이 었다,
남편의 기질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평생동안 그 한 번 속인 통장 때문에 밤중에 자다가 쫒기어 나와 딸방에서 자면 생전에 들어 보지도 못한 악담을 퍼 붙다 문을 열고 자는 나를 드르럭 끌어냈다 잡히는 손등에 뼈가 튀어 오르고 손목마다 검은 바둑알처럼 멍이 들었다 아이엠에프라고 일년동안 생활비를 내어 놓지 않고 밀린 봉급 계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보고는 하늘만 쳐다 보고 있지 말고 벌어서 쓰라고 했다 그렇게 똑똑한 년이 왜 돈을 못 버느나?고 비아양 거렸다. 육십을 바라보면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기술이 없으니 밑바닥 일이라도 하겠지만 나이가 많다고 써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들이 충정도 어느 석산에 주방일을 하도록 데려다 주었다. 충청도 가는 차안에서 그렇게 눈물이 나왔다
8개월이 지나 아들이 나를 데리려 왔다
그 때부터 남편은 집을 나가고 없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든 손으로 집을 팔고 은수저까지 챙겨 떠난지가 8년이 되어 간다 생활고에 시달려도 폭탄이 사라진듯 평화롭고 자유롭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느낀것이 딱 한가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내 사정을 알고 하나 같이 국립학교나 창학금을 받고 안되면 아르바이트를 하여 부잣집 아이들의 절반도 안되는 학비로 대학을 마칠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어머니로 살아 남았다. 아이들에게 지은 내 죄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다,
흔해 빠진 메이크 신발 한켈레 사 신겨 본적없고 셋방살이 이십년에 눈치도 많이 받았다.
한참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에 학비 걱정 하면서 자랐다 아이들에게 지은 내 죄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다. 요즈음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면서 생각나는 것이 내 아이들 어릴적이다. 마음 구석이 아려 온다 반 평생을 싸워서 지켜온 이 가정을 떠난 그 길에 비껴간 평화를 기꺼이 만나 참되게 황혼녘을 보냈으면 한다.
2022.12.13.
정말 오래된 글입니다. 읽어 주셨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삶의 애환이 스며든 글밭에 머뭅니다.
비껴간 평화와의 재회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파이팅~!^^*~
고맙습니다^^청송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행전선생님^^
참담 하기까지한 그시절 아픈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좋은 일만 가득 하시기 바랍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너울 선생님~~^^
글을 읽는 저도 분합니다. 시부모가 그렇더니 남편까지 그리 모질었군요.
도무지 무엇 때문에 그런 비정상적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살까요.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니 잊으시고 남은 여생이나마 편하게 지내시옵소서.
고맙고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정암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