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의 양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로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여름의 침묵
그 여름철 혼자 미주의 서북쪽을 여행하면서
다코다 주에 들어선 것을 알자마자 길을 잃었다.
길은 있었지만 사람이나 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낮의 하늘 아래 메밀밭만 천지를 덮고 있었다.
메밀밭 시야의 마지막에 잘 익은 뭉게구름이 있었다.
구름이 메밀을 키우고 있었던 건지, 그냥 동거를 했던 것인지.
사방이 너무 조용해 몸도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전말같이 무엇에 홀려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소리 없이 나를 친 바람 한 줄을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오랫동안 침묵한 공기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무도 없이 무게만 쌓인 드넓은 곳은 무서움이라는 것,
그래도 모든 풍경은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라는 것,
그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남자냐고 메밀이 물었다.
그날 간신히 말없는 벌판을 아무렇게나 헤집고 떠나온 후
구름은 다음 날 밤에도 메밀밭을 껴안고 잠들었던 것인지,
잠자는 한여름의 극진한 사랑은 침묵만 지켜내는 것인지,
나중에 여러 곳에서 늙어버린 메밀을 만나 공손히 물어도
그 여름의 황홀한 뭉게구름도,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면벽한 고행 속에 그 흔한 약속만 매만지고 있었다.
디아스포라의 황혼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가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라지만
강물도 하루 종일 떠나기만 하고
물살의 혼처럼 물새 몇 마리
내 눈에 그림자를 남겨줍니다.
한평생이라는 것이
길고 지루하기만 한 것인지,
덧없이 짧기만 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고개까지 왔습니다.
그대를 지켜만 보며, 기다리며
나는 어느 변방에서 산 것입니까.
착하고 정직한 것만이
마지막 감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젊고 싱싱한 날들은 멀리 가고
노을이 색을 바꾸며 졸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포옹만 믿겠습니다.
내 노래는 그대를 만나서야, 드디어
벗은 몸의 황활한 화음을 탔습니다.
주위의 풍경이 눈치 보며 소리 죽이고
감은 눈의 부드러움만 내게 남는 것이
이 나이 되어서야 새삼 눈물겹네요.
국경은 메마르다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너와 한 몸이
되고 싶어 했는지
나라와 나라 사이,
너와 나 사이,
마지막 거부의
칼날 빛 차가운 철책.
어색한 술수와 조직으로
국경은 푸른 산을 가로지르고
물살 센 강물도 만 개로 자른다.
그렇다, 국경의 피부는
거칠다.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더 가까이 다가가
네 몸을 비벼댔는지,
광야의 비바람을 가리고
설레는 입술을 잡고 말았는지.
국경은 메마르다 2
1
도시도 아니고 나라마저 확실치 않은
미확인 보도만 바람에 휘날린다.
국경을 넘을 때는 이름표를 감춘
작은 벌레까지 표정이 굳어진다.
국경 근처에서는 들풀도 엎드려 산다.
흙먼지에 날리는 꽃은 반란의 얼굴들
양심도 가책도 국경선을 지우지 못한다.
나도 더 이상 그대에게 기대지 않겠다.
2
남미에서는 높은 산 눈 더미 속
능선을 따라 국경이 가쁜 숨을 쉬고
희박한 산소가 나라를 가르고 있었다.
알젠팅 탱고가 스며드는 다른 쪽 강가에
가난한 나라 하나 또 국경을 치고 돈을 받았다
폭포가 끝나는 곳에도 소용돌이 소음의 경계.
뜨거운 중앙 아메리카에도 국경은 넘쳐났다.
가는 정글마다 기관단총을 든 군인들이
국경을 짓밟고 서서 불개미들를 죽였다.
세 시간을 헤매면 한 정글이 끝나고
정글이 끝난 곳을 살피면 딴 표정의 푯말.
국경을 지나면 새 국가가 탄생하고
두 시간을 더 가면 그 국가가 죽어버렸다.
돈 몇 푼이면 아래위로 보는 척하다가
아무나 건너가고 땀 닦고 건너오는 줄,
고무줄보다 허술한 것이 늘어져 있었다.
3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두꺼운 국경은
같은 민족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왜 하필 여기에 있을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철책을 넘어도 다른 막강의 문이 막아서고
지뢰는 수만 개씩 터질 준비로 들썩거리고
서로 겨눈 총들의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그 뒤에 탱크와 오만 가지 무기가 부동자세로 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 국경.
국경의 빈 하늘 위에는 새 몇 마리 생각에 잠겨
병신들, 병신들 하며 아무 데나 날아다녔다.
체념의 머리 위에도 곧 국경이 생기겠지.
병신들, 소리가 삭발한 초소 쪽으로 퍼져갔다.
바람 부는 날
새들은 바람 부는 날을 골라
둥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둥지가 바람에 부서지지 말라고
알이나 새끼가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ㅡ
바람 센 날에만 부산하게
새들은 둥지의 큰 틀을 만든다.
늘 바람 오는 쪽의 벽을 더 두텁게 하고
큰 가지로 다시 단단히 막고 싸고
가지와 가지 사이를 세밀하게 엮는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떠나버린
텅 빈 내 집이 천천히 한쪽으로 기운다.
크고 작은 바람을 튼튼히 막아주던 집이
새끼들이 다 떠나자 기울기 시작한다.
무게중심이 달라져서 위험해진 집,
두꺼운 벽 쪽이 지는 해를 따라 쓰러져간다.
은퇴를 하고 눈 오는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눈 여겨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새 집,
나는 떠나지 못하고 날개의 힘만 탓하는데
영리한 새들은 불길 같은 예감을 퍼뜨리고 있다.
폐가가 되어버린 일회용 욕망,
빛바랜 바람만 사는 내 집.
동백을 보내며
1. 봄
봄이 뒤뜰에서 잠자는 동안
붉은 입술만 가지고 와서
처음부터 나를 떨게 하던 꽃.
긴 잠 깨어 찬비 맞는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여움에
퍽, 퍽 소리 내며 땅에 지던 꽃.
떠나지 마라.
그림자만 가득한 큰 눈,
왜 이제야 왔느냐고
늦은 원망도 하지 마라.
덧니를 감춘 열띤 방언은
젖은 향만 여기저기 뿌려대면서
목도리도 외투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다가오는
봄의 가슴들.
2. 버클리대학 겹동백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모두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서
동백은 고창의 선운사 뒷길, 아니면
부산이나 마산 쪽에서 하나씩 시작해
초순경에 내 방을 올려다보는 눈,
버클리대학 겹동백의 붉은 꽃잎이 되거나
대학 교정을 종일 싸도는 노란 꽃술이 되거나.
언제라도 지도 없이도
나는 간단히 네게 갈 수가 있다.
사십 년 이상 닳도록 넘나든 태평양,
그 거리와 폭음과 시차를 다 돌려주고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정갈한 슬픔과
겹동백의 침묵만 싸들고 돌아가겠다.
완전한 것은 이승에는 없다.
동백, 당신이 내 속에 깊이 있어
내가 겨우 연명할 뿐이다. 그뿐이다.
* 2009년 제54회 現大文學賞 수상시집,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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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자
마종기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조용한 개선』『두 번째 겨울』『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이슬의 눈』『그 나라 하늘빛』『새들의 꿈에스는 나무 냄새가 난다』『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등의 시집과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심사평>
마종기 시인의 경우 그의 직업(의사)이나 예술 분야에 대한 교양이 줄곧 작품의 토양이 되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이후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게 된 데서 만들어진 시적 촉각도 있을 터이다. 말하자면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촉각. 이번 수상작품에서 「파타고니아의 양」「디아스포라의 황혼」「국경은 메마르다」같은 작품들은 경계인으로서의 촉각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들이지만 다른 작품들 역시 그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정서에 물들어 있다. ㅡ 정현종(시인)
「파타고니아의 양」이 비극적 생의 장엄함을 말하고 있다면 「디아스포라의 황혼」은 덧없음의 장엄함, 「여름의 침묵」은 광활한 침묵 속에서의 두려움과 고독을 말한다. 오랫동안 이국에 살며 이국의 이국으로, 변방에서 변방의 변방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며 잊을 수 없는 모국어로 씌어진 글들ㅡ회한과 측은지심과 뒤늦게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들, 무위無爲의 진술처럼 장식 없는 말에는 귀한 말의 느낌이 있고 슬픔에는 슬픔에 저항하는 슬픔의 표면장력이 있다. ㅡ 최승호(시인)
첫댓글 수고하며 올린 귀중한 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