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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3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19,1-8
복 음 : 요한 16,29-33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29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탈리아에 가게 되면 꼭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수도원으로 알려진 ‘수비아코’입니다.
해발 800미터 정도의 산꼭대기에 30미터는 족히 될듯한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첩첩산중 수비아코의 두 평 남짓한 동굴에서
기나긴 은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 참회와 기도 생활을 하며 서양 수도원의 체계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6세기 만든 수도회 규칙은 그 후 모든 수도회 규칙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에게 요구한 첫 번째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가 ‘Ora et labora’(기도하고 노동하라)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여라.’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잘 지내겠는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하느님과도 또 동료인 인간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었지만,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이를 통해 더 큰 문제를 낳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더 많이 화를 내는 등 부정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는 사람은
가장 힘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큰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만나는 이웃에게도 너그러운 사랑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련과 고통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몇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힘차게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없이는 자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특히 세상 안에서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것이 승리라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이지만 속을 보면 오히려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였고 수난과 죽음, 부활의 사건을 겪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일깨워 주시기까지 그들의 믿음은 다져지지 못하였습니다.
굳센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슬픔에 관해 말씀하시며 세상의 환난을 겪어내기를 기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겠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는 곧 제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승리를 받아들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있었던 제자들도 믿음이 온전히 영글기까지
오랜 시간과 시련의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말씀을 믿고 가슴에 새기고 때를 기다리며 살면 어느새 성장한 나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10,38)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필리3,21).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굴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애타게 부르고 마침내 그분 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생각하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빌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빌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만나 뵙게 되길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가문이 오래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한 농부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오래된 가구며 유물을 다 팔아 버리고 병풍 하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도 엿장수가 자꾸 팔아 버리라고 조르는 바람에 십만 원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나중에 그것이 시가 천오백만 원을 웃도는 병풍임을 알고 후회하며 가슴을 쳤답니다.
그 농부가 좀 더 지혜로워 그 병풍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죄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의 고별사를 끝내면서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겨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저희는~ 믿습니다.”(요한 16,30)
아마 이 고백은 정직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고백이 확실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금방 예수님을 부인해 버렸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데는 자신할지 모르지만,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 있어서는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약해질 때를 훤히 아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의혹과 좌절과 혼동에 빠지고, 흩어져 제 갈 길을 가버릴 제자들에게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기에 주시는 평화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바로 그러한 처지에서도,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평화’란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평화’는 믿음의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이는 평화가 '그분 안에서' 얻어지는 평화임을 말합니다.
곧 '그분 안에 머물 때' 얻어지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입술로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의 행동으로 ‘그분 안에 살게 될 때’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곧 평화는 다른 그 어떤 것이나, 좋은 환경이나, 혹은 자기 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 안에서'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깁니다.
그분이 주신 평화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필립 4,13)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91년에 운전을 배웠습니다.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차는 ‘신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간 감각이 부족한 편이라서 길 찾는 것이 늘 숙제였습니다.
눈앞에 목적지가 있는데도 빙글빙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지도’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지도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멀리 휴가를 갈 때면 지도를 길게 이어서 다녔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다니지만 길이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건물이 생기기도 하기에 가끔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희소식’이 생겼습니다.
내비게이션입니다. 이것은 신통하게도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저처럼 ‘길치’인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생겼습니다.
“어머니의 말, 아내의 말,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으면 삶이 편하다.”
내비게이션은 다양한 기능으로 운전자를 도와줍니다.
교통감시 카메라가 있는 곳도 알려주고, 속도제한도 알려주고,
교통상황도 알려주고, 빠른 길도 알려줍니다. 길을 놓치면 새롭게 길 안내를 해 줍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면서 이제는 차에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걸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수도복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큰일 났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은 돈보스코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신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녀의 축입니다.
사는 게 너무 바빠 하루 단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수두룩한데,
마자렐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는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마자렐로의 말씀에 얼마나 부끄럽던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하루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자렐로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매일의 의무에 충실했습니다.
예삿일을 예사롭지 않게, 평범함속에서 비범함을 찾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화의 길을 개척해 나간 것입니다.
토리노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야 나오는,
모르네제의 시골 소녀 마자렐로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모르네제 본당 사제였던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하에
또래 동정녀들과 의기투합해서 복음 선포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자렐로는 돈 보스코 못지않게 모르네제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미래에 대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자렐로는 한 위대한 인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돈 보스코가 오라토리오 청소년들과 함께 모르네제로 소풍을 온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그와의 첫 대면을 통해 즉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분은 성인이시다! 안심하고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될 분이다!”
내면 가득히 신뢰로 가득 찬 마자렐로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와 한배를 타게 됩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즉시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짓습니다.
오라토리오를 열어 소녀들을 기쁨과 행복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레시오 수녀회는 살레시오회와 더불어 신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가 창설되고 마자렐로는 초대 총장에 임명됩니다.
하느님의 방식을 늘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요, 전 인류의 어머니로 들어 높이셨듯이,
모르네제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자렐로를 같은 방식으로 성덕의 정상에로 높이 들어 올리신 것입니다.
소녀시절 마자렐로의 강렬한 성체 신심은 정말이지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던 발포나스카 농장에서 마자렐로 본당까지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한 시간 남짓,
우거진 잡풀 사이로 난 지름길을 이용하면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마자렐로는 성체를 모셔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새벽,
별이 총총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 길을 오갔습니다.
본당에 도착해 보면 성당 문이 닫혀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막중한 임무의 봉사직을 수행하던 마자렐로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원장 수녀님!” 하고 동료 수녀들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원장 수녀가 아니라 부원장 수녀입니다. 우리의 원장은 성모님이십니다.”
이렇게 그녀는 언제나 성모님을 수녀회 장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표시로 저녁마다 수녀원 대문 열쇠를 성모님의 발치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령 하느님 : 진리이며 협조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1차 교별사(13-14장)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 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되며,
이 주제들은 2차 고별사에서 더욱 심화 된다고 했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2차 고별사의 시작 부분에서
단순히 상호 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확충되었다.
이는 부활 제5주간 중반부터 봉독된 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이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입증되었다.(15,1-17)
농부이신 아버지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가지들인 제자들은
모두 같은 하나의 사랑으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머문다.
그것은 比喩가 어떤 논리적 귀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간에 원하시는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셨고,
그 비유를 ‘아버지-아들-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정립하셨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문제는 理論이 아니라 實際와 現實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아주 출중한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현실적으로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만 실제에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제자들이 우선은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하여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을 방해하는 변수는 바로 세상 그 자체이다.
세상은 열매를 맺으려는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심지어는 죽음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은 늘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不信을 내포하는 양면성의 변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변수,
즉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는 한편(15,18-25),
변수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 주신다.
그 방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發하시는 성령이시다.(26절)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맞이할 고난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협좌’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곧 제자들의 믿음(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다.
여기서 ‘믿음(fides)’이란 그 ‘내용(fides quae; contents)’과 그 ‘행위(fides qua; act)’를 함께 뜻한다.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가’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하는 行爲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며,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장담(요한 13,36-38)과
실제로 스승을 거듭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요한 18,15-18. 25-27)을 보라.
또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메시아 고백이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하는 장면(마태 16,13-23)을 보라.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27절) 세상을 향해 ‘무엇을’ 證言해야 할지를,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진리의 성령’께서 일러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할 때(2절)
‘협조자’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 끝까지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이는 비단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의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이시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삼아 건설된 교회가 현존하는 세상 끝 날까지 활동하실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조욱현 토마 신부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절)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그들은 그분을 떠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를 갖는다.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
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지만
‘이미 이긴’ 싸움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으로써 세상을 이기시고 구원을 주셨다.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싸움에 동참한다.
하느님께서 제자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실 때
고난을 겪는 제자의 마음 안에는 세상을 이기는 희망이 함께 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아는 데에서 오는 희망,
하느님께서는 모든 고난 속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고
당신의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 분임을 믿는 데에서 오는 희망,
하느님께서는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통해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하심을 아는 데에서 오는 희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희망하는 사람들이며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으로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미 얻은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며
모든 고통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희망으로 변모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