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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84
남의 나라의 산물인 차를 자국에 편하게 가져가기 위해 벌어진 아편전쟁의 속내를 더 들여다 봅니다. 광동제독 관천배 가 29척의 전함을 이끌고 위풍도 당당 하게 출정한 이 전투를 일러, -제1차 천비해전 -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까지 영국 군함은 2척이었으니,관천배는 숫 자로 밀어 붙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서양을 전혀 모르는,무지의 소치였으니 그의 잘못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을 한 장정 두 명을, 장식만 요란한 옷을 입은 29명의 노인 들이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 1차 천비 해전의 모양새가 꼭, 그 지 경이었습니다 . 숫자는 숫자인지라 2척의 영국 군함은 전략이고 전술이고 쓸 필요도없이,그저 모든 포문을 열고 중국 전함을 향해 무조건 쏴대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추풍낙엽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모양새처럼 중국 군 함들은 포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하고, 영국 군함의 폭격으로 맥 없이 바다속으 로 추락했습니다.
전함이란 말 뿐이지,낡고 오래된 전함들은 제대로 된 포 하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멸이었습니다. 청국 군함 도 포를 쏘기는 했으나, 영국 군함 근처 에도 가지 못 하고 파도 속에 묻혀 버릴 뿐이었지요. 29척의 군함 중에 단 세 척만 겨우 모양을 유지한 채, 시체들이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서 흔들거리는 모습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영국 군함은 있는 포를 다 소진하고 유 유히 키를 돌렸으나 아무도 그 뒤를 쫒지 못했습니다. 그 거대한 나라 청의 부패와 관료들의 태만,어리석은 중국 제일주의가 빚어낸, 믿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중국 군함은 단 한 척 도 쓸만한 포를 장착한 배가 없었으니, 두고 두고 치욕스런 역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수치스런 결과에 임칙서 는 누구보다 격분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이고 영국 군함이 물러갔기에 황제에 겐 승리했다라는 조서를 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임칙서는 한 번도 서양에 가보지는 않았으나,학문을 통해 유럽을 꾸준히 연구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서양 무력의 강력 함을 체험하고 난 그는 절치부심 , 두 번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 호문을 비롯한 요 새에 방벽을 늘리고 포르투칼에서 들여 온 대포 200문을 배치했습니다. 정예병 1300명으로 오문을 방비하고, 서양 군함을 한 척 사들여 샅샅이 연구 분석해서 일반 선박 중에 튼튼한 배 60 여척을 골라 군함으로 개조했지요. 그 뿐 아니라 100척의 소화선을 만들어 언제라도 불을 붙여 적함에 투입되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준비했지만 임 칙서는 청의 무력으로는 결코 영국을 이기지 못 한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단 두 척으로도 어이없이 절딴난 군력이 자신의 조국의 한계인 것을, 누구보다 알고 있는 임칙서는 자신의 힘으로 할수 있는 방비를 다 하고 무력의 열세를 애국심과 지리적인 우세로 메꾸고자 했습니다.
아무리 부정부패에 찌든 청이라 할지라 도 그래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무력을 가졌다고 해서, 지리적인 거리와 풍토를 유럽인이 극복하기는 힘들 것이 라고 직감했지요. 그의 직감은 옳았고 실제 전쟁으로 죽은 군인보다, 중국의 풍토를 견디지 못해 죽은 영국 군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의 위 험성과 영국의 야비한 술수를 백성에게 호소했고 민심을 단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임칙서는 무엇보다도 영국인들이 얼마나 발칙하고 나쁜 인종 들인지 백성들에게 주지시키는 한 편, 서양인을 죽이면 상금을 준다고 공표했 습니다. 이미 전시였기에 모든 서양인 들을 원수 취급했고, 무엇보다 서양인에 게 빌붙어 정보를 파는 자국인을 경계했 습니다. 비록 군비는 불리했으나 여러 가지 전략을 세워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마지막엔 항구를 불태워버리고 항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임칙서가 할수있 는 모든 것을 다해 전쟁에 대비할 때, 영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중국 땅에서 고전하고 있는 자국민들의 무력 출동 요청으로,서로 쌈박질하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그 당시 영국 의회는 양당 정치였는데 토리당과 휘그당이었 습니다. 영국 정부를 이끈 파머스턴 내각은 휘그당이었고, 국익을 위해 중국 무역의 안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출정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토 리당과 휘그당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근대 산업혁명의 발원지가 영국인 것처럼,현재의 정당 제도의 모태 도 영국 토리당과 휘그당입니다. 앤여 왕까지는 왕이 직접 국가를 통치했으나, 그녀의 서거 이후 하노버가로 왕권이 넘어갔고, 웃기게도 조지 1세와 2세는 영어를 전혀 몰라서 자연스럽게 국정이 내각으로 넘어 갔습니다. 이후 유명한 통치 원칙이 탄생했는데,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 후 영국의 모든 왕은 이 원칙대로 군림하여 오늘날까지 가장 탄탄한 왕족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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