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아름다운 풍광에 흉칙한 생활 하수를 흘려 보내는 망동을 한껀 더 할려 한다.
이짓 해 놓으면 얼마나 밉상일까?
이쁜 뇨자들만 보면 눈돌아 가는 머저리, 그러나 이쁜 뇨자들이 당최 곁을 안주니 온 세상의 여성들 가슴에 불을 지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찌질한 복수를 하고자 한다. 음! 하하하~
청마 유치환은 1908년 우리 마누라와 같은 달, 같은 날에 통영에서 태어났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은 바로 그의 맏형이다.
이하 그의 약력은 어디서 좀 퍼온것이다. 한번 읽어 보시도록...
1908년 통영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
1931년 그는 "문예월간"지 제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중앙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였으며,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간행하고 이듬해 3월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이 되었다.
1945년 귀국하여 그의 아내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에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새 조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 하면서 그는 교육계에 투신하게 되었
는데 그러면서도 문화활동과 시작을 의욕적으로 병행하였다.
청마 유치환은 해방후 20여년간 교직에 있으면서도 열심히 시를 쓰고 의욕적인 문화활동을 하였으나
1967년 2월 1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니 향년이 60세였다.
시집은 "청마시초'(1939). "생명의 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선"(1957). "트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
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6)등이 있으며, 수상집으로는 "에루살렘의 닭"(1953).
"동방의 느티"(1959)."나는 고독하지 않다"(1963)등이 있고자작시 해설집 "구름에그린다"(1959)가 있다.
수상기록으로는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1947). "제2회 서울특별시 문화상"(1950). "제1회
경상북도 문화상"(1956). "제5회 자유문학상"(1957)."제7회 예술원상"(1961). "부산시 문화상"(1964)등
을 수상하였다.
근데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의 여성 편력에 관한 것이다.
청마의 부친은 한의원을 경영해 비교적 유복한 편이였고 당시 일반인들은 꿈꿀수도 없었던 고등교육도 받을 수 있었고 제때에 일찍 양갓집 규수와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청마의 부인 권희재여사는 전형적인 동양미인으로 요즈음의 기준으로 보아도 빼어 난 미인이다.
청마는 통영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그뒤 만주로 건너 가 농장 관리인 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또 다시 교직에 종사 하였는데 당시엔 교사의 교육수준이 높지않았으므로 청마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승진을 하여 대구, 울릉도, 경주, 통영, 부산등지의 여러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60세가 되던해 교통사고로 타계하였다.
군수 집안의 딸로 태어나 교사와 대학교수를 역임한 이영도여사와의 만남은 이영도 여사가 스물아홉 청마가 서른 여섯살 때 였는데 청마는 서른 아홉살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연서를 쓰기 시작하여 1967년 죽기직전까지 매일 일기 쓰듯이 써서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여도 여사가 받은 편지는 무려 5,000통에 달해 커다란 박스로 세박스가 넘었다 한다.
우리나라 대표적 시조시인인 이호우 시인의 여동생이기도 한 이영도 여사는 청마 사후 한달만에 그 편지 중 200편을 추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제목으로 급하게 출간을 했고 이 책은 당시로서는 공전의 히트인 25,000부나 팔려 나가게 되어 젊은이의 연애필수서로 자리잡게 되었다. .
청마 사후 3년뒤엔 청마가 사랑한 또 다른 여인 반희정 여사가 '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1970. 현암사)란 제목으로 청마의 편지글을 추려 내 놓았는데 청마는 이영도 여사와 매일 연애 편지를 쓰는 와중에 반희정 여사에게 열열히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반희정 여사는 당시 대구 모 여고의 보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청마가 보낸 편지를 반여사는 350통이나 보관하고 있었다 한다.
자 생각 좀 해보자.
아름다운 마누라를 두고도 혈기 방장한 젊을때니까 잠깐 딴 여인에게 연정을 품을 수는 있다고 하자.
허나 청마는 40이 넘어서도 죽을때까지 매일 이영도여사에게 연서를 보냈으며 동시에 반희정 여사에게도 연서를 썻다니 자길두고 딴 여인에게 또다른 연서를 쓴다는 사실을 이영도 여사나 반희정 여사가 알았다면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그리고 조강지처 권희재 여사는 자기 남편에게 시심을 샘 솟게 해 준 두여인을 보며 얼마나 고마워 했을까?
황토방 횐님들, 당신의 옆지기가 시인인데 옆지기에게 멋진 두명의 애인이 있고 옆지기가 매일 구구절절한 연예편지를 두 앤들에게 보낸다고 생각해 보면 과연 내가 짝 하나는 잘 얻었구나 하며 시심을 샘 솟게 하는 두 애인들에게 고마워하고 온 세상 사람이 다 달려드는 멋진 옆지기를 두었다는 자부심으로 한평생 짝꿍을 이해하고 품고 살았을까요?
이걸 플라토닉한 사랑이랑 이라고 억지로 우기고 예술가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무슨 지고지순한 순애보라도 되는지 미화하고, 미화하고, 미화하여 거제와 통영에는 청마가 부친 편지통을 만들어 기념하고 이영도 여사와 청마와의 20년에 걸친 로맨스를 세기의 순수한 사랑인양 칭송하고 ㅎㅎㅎㅎ
반희정 여사와의 연애는 상대적으로 쪼그라 들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반여사가 질투는 않했을려나?
청마는 생겨먹은게 그렇다 치더라도 청마의 여인들은 부인 권희재여사에 죄책감 같은 건 없었을까?
후배 문학인들은 그런 저런 사정은 아예 생각지 않고 고결한 사랑의 전범으로 청마의 편지를 지금도 거론하고 있지요.
여인을 좋아 하면서도 스스로 이런 저런 경계를 두고 철조망 밖으로 몸을 뺄 용기가 없는 머저리가 이런 소릴 하면 이 양반 되게 이율배반적이네 하고 욕하겠지만 지는 인간적인 약점은 누구나 있으니까 그건 그대로 보아주자는 생각은 갖고 있어 청마의 연애는 인정 하거등요.
시인들 옆에는 항상 연모하는 여인들이 몇명은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 연애를 나무라는게 아니라 그걸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슨 세기의 순애보인양 부풀려 떠 받드는 문학인들의 왜곡된 그 미화 행태가 나쁘다는 깁니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했노라'란 시나 한편 올려 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행복
청마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첫댓글 아이고~ 왕님 왜 이리 사랑타령이시래요? 난 그사람을 모르지만 그사람은 받는 것 보다 주는것이 더 좋다며 그냥 글재주가 많으니 맨날 취미로 쓴 것이 아닐까요? 하나의 습관이나 버릇처럼...맨날 그런 글만 받는 다면 내 입장에서는 행복은 츰에는 모를까 시시해 질 것 같고 무덤덤했을 듯 허요.사랑이란 그냥 눈빛으로 맴으로
주고 받으며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 보는게 더 진하지 않을까요? 맨날 종이에 써 서 붙이고 것도 나이 들어서 까지 아이 낯 간지러워라. 참 재주가 많은 것은 사실같구만이라
괜히 질투나서 물 흐리고 있는 깁니다.
무책임한 여인 편력이 용서되고 심지어 추앙까지 받는 아이러니에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한번 긁어 보는 기지요
아 근데 지도 인자 다 되었나? 양기가 손구락으로 올라오고있나?
왜 이리 자판에 사랑 타령만 허고 있나?
밖으로 나가야 눈 삔 뇨자라도 얻어 걸릴텐데....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 쿠사는 이순간을 놓칠새라 ~~ 열심히 사랑하겠습니다 ㅎㅎ ^^
그려 그려요,
청마도 사실 연애 편지만 쓴 게 아니라 무슨 일로 이영도 시인집을 방문한 어떤 문인이 그 집에서 청마와 마주쳐 무척 어색했노라고... ㅎㅎ
제가 학창시절부터 제일 좋아했던 시가 유치환님의 행복이란 시였는데 그분에게 그런 사연들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언젠가 저도 예쁜 사랑 시집 한 권 내었으면 하는 게 소망이었거든요.
말도 못했던 짝사랑의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글로서만 풀어낸 적이 있었거든요.
저라는 걸 밝히지도 못한 채 매일 한 편의 시를 써서 보냈던 때가 있었더랬어요. 그게 22살 시절이었는데 아련한 추억입니다.^^*
그리고 그후 전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요.
짝사랑...
외 사랑은 깊은 고뇌에 빠지고
사계절과 보이는것들이 ...
나로 말미암아 있는것 같은 착각속에
시인이 되는것 같습니다.
감성을 엿 볼 수 있어 좋으네요.
청마는 짝사랑을 한게 아닙니다 ㅎㅎ
부인 권여사와 주일학교에서 만나 연서를 쉽없이 발송한 결과 연애로 발전되었고 결혼 후엔 가사선생이던 과부 이영도 시인을 연서로 무던히 유혹했지요.
그 와중에서도 14년 연하의 직장 동료 반선생과의 연서도 사망시까지 8년동안 350통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왕성했고 또 강릉의 모 여인. 또 어디의 모 여인등 연서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만도 부인 빼고 4명 입니다
그는 동시다발적 멀티적 능력을 가진 여성 마음을 훔치는덴 프로급의 킬러였어요 ㅎㅎ
그러나 청마의 자유분망한 연애는 누구도 거론치않고 여전히 그 냥반은 순정파 시인으로 남아 있어요 ㅎㅎ
@이레 계절의 바뀜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을 보며 때로는 저의 상상 속에서
글이 되어 풀어질 때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왕 머저리 네 그분은 짝사랑이 아니죠.
사람들은 열렬히 연서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그분을 부러워하면서 순정파 시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분이 8년 동안 350통이라...
전 일 년도 안 되어서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을 노래하며 시를 200편이 넘게 썼는 걸요. 뭐 시라고 하기보다 끄적거렸다는 게 맞겠지만요...
현재 제가 사랑하는 건 하늘이고, 바다고, 산이고, 나무고, 꽃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아니하고 가정파괴범도 되지 아니하고요...
사랑하다가 한쪽의 마음만 정리하면 되는 사랑을 하잖아요.^^*
지난 봄 전 제가 키우는 수선화를 사랑했더랬어요. 근데 수선화가 시들자, 저도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 신세까지 졌어요.
그런 부작용도 있었지만, 뭐 그래도 사랑하며 살래요.^^* 제가 사랑하던 수선화의 팔팔했을 때의 모습 사진으로 공개합니다.
그대는 갔습니다. 사랑하는 그대는 갔지만,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아름다운 마음 입니다.
사물을 어여쁘게 보고
느끼고 사랑 함은 감성 또한
아름답고 맑고...
다시 말 하면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행복한 여인 입니다.
@이레 마음 한 자락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영혼에 참 많은 것을 전해주며 떠났던 수선화였습니다.
그 후로는... 너무 마음 주지는 말아야지 싶었지요.
청초하고 너무나 강한 느낌을 주며 다가왔던 꽃이라
봄이 되면 다시 키우고도 싶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그 꽃에게 말을 걸었던 때를 생각하며 썼던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꽃에게 말을 걸다'로 시작해서...
예쁘게 봐 주셔요. 감사합니다. 늘 행복한 날들 되세요~
비꽃님 마음이 고요하고 착하군요
아름답고 순수합니다
괜히 지난 시간의 사람들을 거론하며 왈가왈부하는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새로운 사실을 알아서 좋습니다. 제가 학창시절부터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분의 시였거든요,
그분의 자유분망한 사랑은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전 시 한 편만 기억할래요.
다른 걸 떠나서 그냥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며 살아갑시다요. 마음으로만요...
또 다른 이야기들 언제든 풀어놓아 주세요. 문학의 또 다른 면을 알 수 있는 공부의 장이 되잖아요.
감사합니다.
청마에게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이었겠지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예전에 짝사랑하면서 많이 써먹었는데
그게 이영도 시인에게 3년간이나 일방적으로 끈질기게 연서를 보내던 시절에 답답한 외사랑의 한을 그렇게 표현했던 파도란시 이지요 그 3년이 지난 후 그녀도 드디어 마음을 열고 이후 십몇년간 서로 5000 통의 연서를 주고 받았지요.부인 권여사가 운영하던 유치원을 지나면 우체국이 있었는데 부인과 함께 있다가 연서를 부치러 매일 나갔던 저 남성의 이야길 숭고한 플라토닉 러브라고 받들고 우체통 옆에 기념물을 세워 행복이란 시를 새겨넣고...
연서의 대상 인물도 밝혀진 인물만 넷인데
솔직히 일반인이 했으면 그 행동이 용서가 될까요? ㅎㅎ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청마와 똑같지 않을까요
다만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청마는 행동으로 옮겼고....
청마가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본인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일조를 했겠죠
왕님도 여기까지는 이해를 하신다구요 ㅎㅎㅎ
어차피 유명한 예술가들은 미화하기 마련인것 같습니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음악도 미술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왕님,
청마의 연서 사건이 순수와는 거리가 먼 변종 바람둥이 연애란 건 많은 문인들이 알고 있죠
근데 그들은 굳이 그걸 들춰내서 청마를 깍아 내리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의 주위에도 자기를 해바라기 하는 연인들이 많으니까...
설사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시인에 대한 아름다운 전설이 어렵게 시인이란 계관을 쓴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주는 보조장치 일 수도 있는데 굳이 파헤치고 바로잡을 필요는 못 느끼겠지요
근데 엉뚱한데서 청마의 위상을 깍아내리는 일이 발생했지요
청마가 만주로 간 것은 일제강점하의 질곡으로부터 벗어 나려한 몸부림이였다고 생각하고 청마의 멀티연예에는 애써 눈감고 청마가 수천통의 편지를 보냈던
통영중앙우쳬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자고 지역 문인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추진하여 거의 성사단계에 왔는데 우연히 당시 경남 소재 지방 신문에 청마가 기고한 글이 발견되었어요.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자' 뭐 이런 류의 글이였는데 일제의 강압으로 억지로 쓴 글이 겠지요.
그 글 발견 후 청마의 다중 연애사건을 낭만 가득한 사건으로 띄워주던 사람들이 매섭게 변했죠
현재 통영은 청마를 친일 문인으로 찍어 청마우체국 개명 건은 물 건너 가려고 하고있고 다른 청마 추모 사업도 제동이 걸리는 상태입니다
좌든 우든 이념에 걸리면 국물도 없읍니다 ㅎㅎ
거기다 이젠 청마의 여성편력도 재해석 될지 모릅니다ㅎㅎㅎ
@왕 머저리 하하하하 읽어 보니 무지 잼나네요~~~ㅋㅋㅋ 난 시에는 (문학) 도통 깡통이라 관심 없고 개뿔도 모르고 다만, 그 시인 아자씨가 과부, 한참아래 유부녀등 뇨자를 홀리는데 시를 활용하여 엄청 도술을 잘 부린다는데 10표 줍니다.. 하하하하.
유부남이 과부 홀리는 것은 참말로 쉽지가 않은 일인디 ~~ 글구 진짜 찐한 성인 남,녀간의 사랑은 운우지정 - 즉 쎅스가 동반되어야 멋진 사랑이라고 책에서 읽었는디 ㅋㅋㅋ 그 아자씨 심도 쎄구먼~~~~
문학적, 예술적 이바구는 잠시 접어두고..^^
전 청마를 생각하면 언뜻 바람꾼이 생각나네요ㅋ
그시절엔 일부다처가 허용됐던 시절이긴 했어도
본처에겐 꽤나 속 썩었을수도~ㅋ
요즘같았다면 어땟을까 디게궁금하고 ,
유명한 시인이라는 이유로 그 사랑(그언어가 지니는 개념이 타락해서 부득이 순수한이란단어를 사용해서)이 용서되어버리는 아이러니컬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예술적 문학적으로만 보면 되는데도 말입니다 ~~^^
차라리 남편이 한,두번 바람피우다 돌아오는게 낫지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평생을 연애 편지를 써 보내고 답장을 받고 하는 꼴을 보는 게 낫겠읍니까?
청마가 일방적으로 보낸 게 아니라 편지 내용들을 보면 서로 주고 받았다는 게 분명하다는데 매일 집으로 이 년,저 년, 요 지집애 조 지집년이 편지를 보내오고 매일 답신을 쓰는 꼬라지를 평생을 본 부인 권희재 여사 맘은 어땟을까요?
그녀도 당시엔 상당한 인테리 신식 여성이였는데...
청마는 낭만시인이 아니라 마누라를 평생 고문한 잔인한 놈이라고도 볼 수 있는거지요
차라리 바람 피우다 돌아 온 탕자같은 남자가 훨씬 인간적 입니다
@왕 머저리 하하하하 마눌님이 그 서방을 아예 지 마음에서 제명 하였겠지요. 너는 나에게 그냥 호적상 서류상 서방이고 ,,, 그 당시 여러 주변 사회 환경에서 이혼서류 도장 찍기는 그레도 명분이 있는 교육자 나리인데 이름있는 명사라 쪽 팔리니 그레 니 팔자는 유부녀 꼬시고 과부 홀리는게 니 일이니 니 맘데로 살다 가라고 ~ 아 예 포기하지 않았을까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네유. 지금의 잣대로 30,40,50년대 배꼽아래 사항을 자세히 깊히 알 수가 없으니
ㅋㅋ<< 이거 또 괸사리 시비꺼리 되는거 아닌가 몰러 이미 망자가 된 고인에 대하여 뭐 명예가 어떠니 , 저떠니 그양반 가족, 친척들이 보면 기분 나뿔 텐데유 ...에고 골아퍼 이상 끝
사랑이 뭔지 왜..집에 부인을 두고 한눈을 파는지 원.....
정력이 남아도나.ㅎㅎㅎ
시절을 잘 만나서 그랬을지도.. 요즘같으면 바로그냥 이혼이 아닐까요.ㅎㅎㅎ
하기사...남의말 할것도 없구먼유...우리집 옆지기도 한때는 바람많이 피웠는데..
그래도 버리지못하고 살아요.ㅎㅎㅎ
ㅎㅎ 이옥자님이 심덕이 크시구먼유.
그때 뻥~~찻으몬 지금 매일 석고대죄하면서 용서를 빌텐디유
ㅎㅎ
옛날엔 여인들이 남정네의 과실에 대해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너그럽고 인내심이 강했지요
@왕 머저리 그때 바로 알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저도 알수없지요
다 정리하고 난다음 한참 뒤에야 알았으니 어쩌겠어요 지난일인데.ㅎㅎㅎ
지은죄가있으니 요즘은 내 눈치만 보고 그러누만요...
남자들은 늙으면 기가 죽나봐요... 어떨땐 축은하기까지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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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정운..'. '당신의 마'
이런식으로 편지글의 서두와 끝말이 ... 내용도 참 그렇고...
반 여사는 아예 '청하'라고 호를 지어주고 '나의 사랑 청하' 운운하며 편지가 시작 되었지요
그리고 청마는 편지만주고 받은게 아니라 그 여인 집에도 빈번히 찾아 갔읍니다
그건 이제 누가 새삼 뭐라 할 사항은 아니지만 실상을 애써 외면하고 전설로 승격시킨 걸 한번 시비 걸어 보았읍니다
실로 무익하고 웃기는 시비입죠
이성에 대한 관심은 본능인데 보통은 그걸 드러내지 않죠.
그 행위가 자랑스러운건 아닐테고 보통은 부인과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랫으면 시빗거리가 될 수 없을텐데...
그게 낭만의 전범은 절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