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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드림 고린도전서 9장 3-14절 /김병삼 목사 ➤“3. 나를 시험하는 자들에 대한 내 대답은 이것이니라. 4.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느냐? 5.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6. 나와 바나바만은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느냐? 7.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 8. 내가 사람으로서 이것들을 말하느냐? 율법도 같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10.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그것을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 12. 다른 이들이 너희에 대한 이 권리에 참여하거든 하물며 우리는 더 그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로막지 아니하려 함이라. 13.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 속한 것들로 사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함께 헌물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고전 9:3-14 KJV) ✚로이드 존스라는 사람이 헌금과 두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농부는 행복하고 기쁨에 차서 아내와 가족에게 가장 좋은 암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고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한 마리는 붉고, 한 마리는 흰 송아지였다. “여보, 당신도 생각했겠지만 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소. 우리 이 두 마리를 길러서 그 중 한 마리를 때가 되면 팔아서 주님을 위해 헌금합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주께 바치겠다고 하는 송아지가 어떤 것이냐고 질문하였다.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요. 우리는 두 마리를 같이 길렀다가 때가 되면 우리가 말한 대로합시다.” 몇 개월이 지났다. 남편이 매우 거북한 얼굴로 들어왔다. “난 당신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겠소.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어떤 것이 주님의 것이냐는 결정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는 “아니, 나는 사실 언제나 흰 놈을 드리려고 하였단 말이야. 그런데 흰 놈이 죽었다니까. 그러니 주님의 송아지가 죽은 것이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주님의 송아지만 죽는다. 언제나 죽는 것은 주님의 송아지라는 말이다. 돈이 없어 곤란을 겪을 때 우리가 삭감하는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 일에 바칠 헌금이다. 언제나 맨 처음 깎이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헌금이다. 돈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이유는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번갈라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주의 사역자들이 일하고 받을 삯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구약의 십일조와 주의 일하는 자의 삯에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5절에 “5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곧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사도들은 일하지 않고 베드로도 부인을 대동하고 다녔고 ➤6절에 “7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 주의 일하면서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은 물질을 사용함에 대하여 특히 돈을 구별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지난주에 예배가 우리의 삶을 교정하여 드리는 것이었다면, 헌금의 문제는 구별된 사람이 어떻게 돈을 거룩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선이냐? 악이냐?"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돈은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돈의 본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고, 성경이 돈에 대하여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돈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가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돈 앞에서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돈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신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헌금에 대한 결단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를 시작하면서 장로님들과 사역자들에게 말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 많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종종 “우리가 이만큼 헌금을 했으니 응당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만일 헌금이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회비를 내는 것이고, 우리가 회원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라면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헌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하는 활동 중에 먹는 것을 신청하는 것, 그 활동을 하면서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은 우리가 찾아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됩니다. 목회의 많은 부분을 결정해야 하는 제가 이 헌금을 사용하면서 올바를 결정을 내려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헌금이 사용되어야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소중한 것만큼의 가치와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목사님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돕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끔 신천지에서 ‘무료 성경공부’라고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그 안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나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료라고 홍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오히려 모든 성경공부는 대가를 지불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교재, 그리고 공부하면서 먹는 간식, 이 모든 것을 지불하고 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내가 헌금했으니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구별된 헌금입니까? 제가 못된 목사입니까? 우리 교인의 모든 활동에 무료는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린 구별된 예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온전히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첫 것을 구별하는 신앙 가끔 십일조와 후원금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역자나 성도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십일조에 관한 것이고 고린도후서 9장은 연보(捐補)라고도 하고 이웃돕기 성금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재물을 내어서 이웃을 살리는 물질이 연보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허락하신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구약부터 첫 것입니다. 교정된 시각 바람직한 “구별”을 알기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구별을 먼저 짚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7절에 보면, “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바,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그 누가 하는 것도 아닌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정한 대로” 그런데 그 마음을 정하는 데 있어서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헌금은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한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하여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분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헌금을 얼마나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인가요? 참 신기한 것은 똑같은 수입을 가지고도 온전한 십일조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이 헌금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가지 않는 믿음으로 드리는 액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액수를 가지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과부의 동전 두 렙돈을 바리새인들의 많은 헌금과 구제보다 귀하게 여기셨던 것은 마음과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행해 왔던 잘못된 우리의 헌금과 구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인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조건적인 헌금 “제가 크게 한번 헌금할 테니, 이번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태도는 투기적인 행위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헌금은 흥정이나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인들의 가장 잘못된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인데, 복을 받기 위한 선행조건이나 불행을 방지하기 위한 주술적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미리십일조를 하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일억 십일조 하는 복을 받을 사람은 일억을 자기네 기도원에 하면 축복해준다고 하는 광고인데 그것을 믿고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서 접하는 “하나님 나에게 얼마의 소득과 축복을 주시면 그 중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태도는 아주 잘못된 모습입니다. 준비가 안 된 헌금 “오늘은 미처 헌금을 준비하지 못했군. 한 주정도 헌금을 안 할 수도 있지 뭐” 헌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신앙적인 응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즉 헌금 그 자체가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준비하지 못함이란 예배자로서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기분대로 하는 헌금 “오늘은 목사님의 말씀이 별로 은혜가 안 되는군.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걸?” 헌금이 개인적인 감정의 기복에 따라 드려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성도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러 왔으나 사람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감사와 은혜의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것임에도 사람 때문에 좌우된다면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헌금 “부정하게 번 돈이면 어때?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했으니 상관없을 거야.”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돈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선하게 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울을 속이는 것을(아모스 9:15)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소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적은 소득이라도 정직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남은 돈으로 드리는 헌금 “이번 달에 학교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십일조는 무슨 돈으로 드리지?” 돈에 대한 첫 시간에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섬기는 자는 주인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물질이 주인이 될 때, 우리는 올바른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면 분명한 우선순위가 서게 됩니다. “모든 염려를 주님께,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께.” 이제 이런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함에 대한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별” 나의 계산과 확신이 아니다 교정된 시각을 통해 우리가 확신하건대, 물질의 구별은 내가 하는 것이되,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나의 기쁨을 위해서도 아니요, 하나님 중심적인 구별임을 알았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기에, 때로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데는 먼저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변화된 심령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돈 이야기를 하기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돈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힘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관한 한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믿은 자에게 따르는 회심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의 회심이요, 다른 하나는 가슴의 회심, 또 다른 하나는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왜 돈 문제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돈 문제에 대하여 거론하실 때, 구원의 문제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눅 19:8)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무나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눅 19:9)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기준을 돈에 두고 계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닙니까? 돈이 구별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계산법은 upside down kingdom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절대로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거나 자신의 확신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군함 한 척이 어두운 밤에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면에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군함 정면에 나타난 불빛을 보고 함장은 무전으로 신호를 보냈다. “괴소척 방향을 서쪽으로 10도 돌리기 바람. 이상!” 상대가 답신을 보냈다. “귀소가 방향을 동쪽으로 10도 돌리기 바람. 이상!” 화가 난 함장은 다시 신호를 보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방향을 돌려라. 이상!” 상대가 다시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해군 일병이다. 그쪽에서 방향을 돌려라. 이상!” 화가 끝까지 난 해군 함장은 최후의 신호를 보냈다. “이 배는 전함이다. 절대 진로를 바꿀 수 없다. 이상!” 그러자 상대도 마지막 신호를 보냈다. “여기는 등대다. 그쪽 맘대로 해봐라. 이상!” 진리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지는 사람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입니다. 돈을 구별하는 문제에서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기준이 되도록 하십시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만나 교회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매촌 동신 상가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송파의 예배당을 옮겨와야 하는 상황에서 건축 헌금은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고, 제가 잠시 맡고 있었던 분당 예배당의 성도들도 건축에 동참하겠다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성도 중의 한 분이 건축 헌금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의 형편에 그 헌금이 과한 것 같았습니다. 당시 29살의 젊은 목사인 저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교인을 불러서 다시 생각하고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주신 음성이 있었습니다. “왜 그의 복을 네가 가로막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한 복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18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권사님으로 있는 그분의 삶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헌금했으면 분명히 문제가 생겼어야 하는 그분의 삶이 지금 복된 삶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헌금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8절을 보세요. “8.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가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을 풍성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 멋진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그리고 그 은혜로 인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헌금은 그런 것입니다. 계산이 아닙니다. 계산하면 절대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경험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라 첫 것의 생명이다! 이제 가장 민감하고 여러분이 힘들어하는 “십일조”에 대한 문제를 조금 다루어 보겠습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기원은 이집트에서 행방되어 나올 때 마지막 날, 주의 천사들이 첫째를 죽이실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첫째를 살려주셨고. 사막에서 성막에 봉사할 첫째들을 불러 모았더니 2만 명쯤 되었는데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서 돌려보내면서 대신 레위지파가 비슷한 숫자를 가지고 있으니 대신 모든 지파의 장자로 삼아서 성막에서 봉사하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하여 첫째의 본분을 하게 하라고 정하셨습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11-16절에 “11. ¶ {창조주}께서 너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족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12. 너는 태를 여는 모든 것과 네가 소유한 짐승에게서 나오는 모든 첫 새끼를 구별하여 {창조주}께 돌리라. 수컷은 {창조주}의 것이 되리라. 13. 너는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것을 대속하지 아니하려거든 그것의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자손들 가운데 사람에게서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14. ¶ 이후에 네 아들이 네게 물어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니까?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창조주}께서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이집트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오셨느니라. 15. 그때에 파라오가 우리를 가게 하려 하지 아니하매 {창조주}께서 이집트 땅의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처음 난자든지 짐승에게서 처음 난 것이든지 다 죽이셨으므로 수컷으로서 태를 여는 모든 것은 내가 {창조주}께 희생물로 드리되 내 자손들 중의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하나니 16. 너는 그것을 네 손 위의 표와 네 눈 사이의 표로 삼으라. {창조주}께서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느니라. 할지니라.” ✚민수기 3장 38-51절에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업무를 공식개시 시키기 전에 레위인 구별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레위인의 총 수(數)와 전 이스라엘 장자(長子)의 수(數)의 차이분에 대한 속전(贖錢)을 받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장자의 총수가 레위인의 총수보다 273명이 더 많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장자의 총수 중 22,000명의 장자는 레위인으로 대신 받았지만 나머지 273명은 속전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3명까지 계산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김동호목사님의 책 “깨끗한 부자”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교인을 특전대원과 같은 교인 그리고 방위 같은 교인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견해에 따르면, 정직한 십일조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돈을 지배하고 다스릴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주 공감이 가는 내용인데요. 모두 군인이지만, 특전대원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훈련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공수 훈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훈련에는 예비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바로 “막타오”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지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인 11m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에 성공한 사람은 비행기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십일조가 신앙의 특전대원을 만드는 훈련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액수가 십일조라는 말입니다.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신앙인은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점프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뛰어내린 신앙인은 결국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교인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직 방공호 속을 뛰쳐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훈련을 받을 때, “신병”에게는 어려운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인정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병사가, 오래된 교인이, 오래된 중직들이 십일조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권사의 직분을 세울 때, 장로의 직분을 주려고 할 때 십일조를 보는 이유는 돈의 액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훈련이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교인은 교회를 나약한 공동체로 만듭니다. 돈에 대한 올바른 몫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십일조가 믿음의 훈련인 것은 하나님의 몫을 온전하게 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온전한 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어느 정도 액수의 십일조를 얼마나 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상 이러한 기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만 하세요. 더 하고 싶다면 다른 작은 교회에 목회자에게 보내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십일조입니다. 십의 몇조 하는 것은 자랑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정한 것만 하시고 다른 명목이든지 하시든지 작은 교회 목회자에게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일정액수 이상의 십일조는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늘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실업인 선교회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성공한 기업인들이 많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제가 조용기 목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인데 순복음 교회에는 호남사람이 거의 60-70%를 차지한답니다. 대조동에 천막을 치고 시작하던 개척교회에 잠잘 곳이 없어서 몰려들었던 사람들, 전쟁 이후에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실패한 인생들을 보면서 결심한 것이 그들의 삶이 복받지 못하면 어떻게 영적인 복을 선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철저한 신앙과 십일조를 강조하며 오늘날 복받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에게도 동일한 꿈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물질적인 가치를 최고를 삼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 정하신 것을 드리고 주 앞에 정직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셔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정직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십일조와 헌금을 신앙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돈에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언약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목회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혹시, 실제적인 문제일 텐데 헌금 문제를 가지고 부부간에 이견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헌금 문제가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이 적은 사람의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이 적은 자의 편에 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십일조는 돈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믿음이 많은 쪽을 따라가십시오. 신앙에 훨씬 유익합니다. 하나님은 돈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구별할 것과 다른 것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11.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들을 거둔다 해도 그것이 큰일이냐? 12. 다른 이들이 너희에 대한 이 권리에 참여하거든 하물며 우리는 더 그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로막지 아니하려 함이라. 13.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 속한 것들로 사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함께 헌물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 것을 정하셨느니라.” 구분을 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첫 것과 이웃에게 주어야할 물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연보는 모아서 불우한 이웃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헛갈리면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9장으로 다시 가서 9장 5-7절에 ➤“4. 혹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가 (우리는 너희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같이 확신 있게 자랑한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노라. 5. 그러므로 그 형제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후한 선물 곧 전에 너희가 통보 받은 적이 있는 그 후한 선물을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내가 생각하였나니 그리하여야 바로 그 일이 후한 선물답게 준비되고 탐욕에서 난 것 같지 아니하리라. 6. 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니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것이라. 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구별한다!” “준비한다!”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헌금을 구별합니다. 3년 넘게 가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모금을 하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전해주려고 가는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모금을 끝내 놓아라하고 호소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돈을 주는데, 헌 돈을 받을 때, 그리고 새 돈을 받을 때 언제 기분이 좋습니까? 제가 청년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새로운 결혼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주례할 때, 주례비를 주는 것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주례하는 목회자에게 정성스럽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귀한 마음이다.” 그리고 혹시 한국적인 상황에서 주례비를 주는 것이 마음에 편하다면 정성껏 많이 주라고 말입니다. 저는 주례비를 모으는 통장이 따로 있고, 그 돈은 온전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특히 무료를 결혼식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자존심 상하는 것은 제가 돈으로 평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정성으로 받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도 사례비를 받을 때 “헌 돈”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액수에 좌우되겠지만, 저는 돈에 가치를 둔 사람이 아니라 목회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에 의해 좌우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시는 분이지, 여러분에게 사용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받으시므로 좌우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보시며 누구에게 돈을 맡길까를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구별이 무엇입니까? 세뱃돈을 줘도 새 돈으로 준비하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이웃돕기라고 해도 ➤“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절)라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형식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면서 인색함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감사하며 드림 잠언 8장17절입니다.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 어떤 분이 저에게 좋은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라는 제목의 짧은 묵상 글입니다.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돈을 사랑합니까, 안 합니까?” “사랑합니다!” “돈이 여러분을 사랑해 주던가요, 안 해 주던가요?” “아니요!” “사랑해주지 않는 것을 무얼 그리 죽자 살자 하고 사랑합니까?” 그리고 이런 대답이 있었습니다. “짝사랑이지요. 뭘.” 짝사랑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가슴이 아프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허망하지요. 얻는 것이 없지요. 하나님을 위해 구별할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의 구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별을 받은 자들은 절대로 후회함이 없습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설교하면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담임목사에게 꼭 기도를 받으라는 이유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첫 열매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들이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적어도 세상에 살면서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돈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이 있어도 정직하게 살아가며, 형통함의 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돈 앞에서 양심과 신앙을 팔고,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직한 자의 형통함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함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 돈에 대한, 아니 헌금에 대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8절에 진리는 명확하고 간단합니다. ➤“8.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가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을 풍성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받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은혜를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예물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외적 표현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씀은 물질 자체보다 드리는 마음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젊은 청년 하나가 십일조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십일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한 달 월급인 만 원의 십 분의 일인 천 원을 드렸습니다. 천 원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 달 월급이 10만 원이 되었습니다. 십 분의 일인 만 원은 조금 힘들다고 느꼈지만, 드렸습니다. 이제 한 달 월급이 100만 원이 되었습니다. 10만 원을 내려고 하니 아까웠습니다. 이를 악물고 10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한 달에 1,000만 원을 벌게 되었습니다. 100만 원을 드려야 하는데, 아까운 마음에 도저히 낼 수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가서 십일조 서약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십일조의 서약을 어기지 않고 쉽게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기뻐 놀라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형제가 옛날처럼 한 달에 십일조를 천 원만 드리도록 기도해 드렸지요.” 여러분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내는 돈을 아까워하십니까? 아니면 더 많이 얻게 된 돈 때문에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은 돈으로 여러분을 시험하십니다. 어떤 이에게 이 시험이 “test”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이 시험이 “temptation 템프테이션”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망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의 “시험”에서 통과하면 특공대원과 같은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격전지에서 바로 여러분을 파트너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템프테이션]이 된다면 여러분은 영적 전투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분명하고 선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도적질하지 말라.(말라기 3장)고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제사하는 것을 그만하고 돈 벌려고 나가니까 하나님이 노하셔서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지워버리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여러분이 분명한 특공대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할 줄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별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첫 것과 이웃에 주어야할 것을 구별하므로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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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
말씀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님이시여 안녕하세요?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성일을 준비하는 복된 하루 되시고 좋은 주말 되소서 ... ...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24장6절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