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이른바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로 불리는 ‘검은 그림’ 연작 중 하나. 페테르 루벤스의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에서 사투르누스가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추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을 하고 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난파선’. 성난 파도에 삼켜지고 마는 배들의 모습은 숭고미를 자아내는 사례로 거론된다.
■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예술은 곳곳에 있다. 예술은 여전히 전문 예술가를 통해 성취되기도 하지만, 또한 여러 맥락 속에 널리 퍼져 있다. 무대의 배경에서, 유튜버의 연출에서, 블로거가 만드는 한 페이지의 디자인 속에서 예술적인 것은 빛난다. 그러므로 지금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담겨 있는 환경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환경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그렇게 우리의 운명에 개입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테크닉’이다. 대뜸 이런 거친 정의를 내놓는 데 대해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기술 없이 이뤄지는 예술이란 없다. 예술은 테크닉 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조립식 책상을 만들 듯 이미 정해져 있는 제작법에 따라 널빤지에 책상다리를 붙이는 일과는 다르다.
예술의 테크닉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만,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것이 등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창조’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다. 이 테크닉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인의 말 ‘테크네(techne)’에서 유래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그리스 말 테크네를,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이라고 정의한다. 없던 것을 있도록,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도록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테크네이다.
예술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청동과 석재를 건축을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한다. 건물의 실용성을 위해 석재는 계단을 위한 재료가 되며, 청동은 대문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다. 색깔 역시 실용적 목적에 동원된다. 아이들 방의 벽은 정서적 안정을 위해 따뜻한 색깔로 칠해진다. 색들은 정서의 안정이라는 실용적 목적에 맞게 선택되고 또 버려진다. 이때는 건물의 실용성에 기여할 수 있는 재료가 있는 것이지, 청동과 석재, 색깔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예술 작품 속에서 그것들은 비로소 그 자체로 출현한다. 조각품은 청동과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이 청동으로서, 그리고 돌 자체로서 나타나도록 해준다. 회화 속에서 색깔들은 비로소 어떤 실용적 용도에도 기여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출현할 수 있게 된다.
말(言)도 마찬가지다. 말만큼 실용성에 철저히 지배받는 것도 없다. 말은 의미의 전달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동원된다. 청중이나 학생 앞에서 분명히 의미 전달을 하지 못하는 연설가나 교사는 비난받는다. 같은 내용을 길게 반복해 말하며 강의 시간을 낭비하는 교수 역시 비난받는다. 말한다는 것은 철저히 경제적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우회 없이, 시간의 낭비 없이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할 것.
그러나 예술 속에서 빛나는 말, 즉 시와 노래의 언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시와 노래에서 말은 의미 전달이라는 실용적 기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시와 노래는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정보로 요약되지 않는다. 시와 노래는 후렴구가 그렇듯 말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데, 말의 반복은 말의 낭비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존중받는다.
요컨대 시와 노래의 말은 의미 전달이라는 기능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로서 빛날 뿐이다. 장폴 사르트르처럼 표현하자면, 시와 노래의 말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다.
음악의 경우도 화음과 선율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작곡가가 정보의 전달을 의도해 잡다하게 표제를 붙이더라도 그렇다. 가령 1941년 나치가 침공한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쓴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 1악장 주제들은 파시스트 군대의 행진을 표현하는가, 이에 맞선 소비에트 군대를 의미하는가? 우리는 정확히 확정 지을 수 없다.
구스타프 말러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5번 4악장은 부인 알마를 향한 연애편지이지만,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곡을 일종의 레퀴엠으로 생각해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음악이 정해진 어떤 의미의 전달에 사용되지 않는 까닭이다. 요컨대 선율은 정보 전달의 기능을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빛날 뿐이다.
이렇게 예술 작품은 사물(우리가 예로 든 청동이나 석재나 말이나 선율 등)이 그 자체로 출현하도록 해준다. 글씨가 의미 전달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글씨 그 자체로 출현하는 서예 작품, 물을 담는 기능에서 벗어나 그 자체 어떤 용도 없이 빛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항아리 등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사물을 용도로부터 해방해 그 자체로 나타나게 한다.
이렇게 어떤 용도에도 종속되지 않기에 예술을 ‘자율적’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런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어떤 시대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 ‘순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뒤에 보겠지만, 예술의 자율성은 실은 ‘예술의 사회성’이다. 예술은 자율적이기에 비로소 사회적 또는 정치적일 수 있다.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의미 있는 강조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산업이란 기존의 체제에 예술을 종속시키는 방식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술에 실용성을 부여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알고 있다.
단적인 예로 사람들은, 수험생에게 머리를 좀 식히기 위해서 음악을 들으며 휴식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또 작업장에 음악을 틀어놓으면 일의 능률이 더 잘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술에 실용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인데, 바로 그 기능이란 기존 체제의 질서에 순응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예술을 기존 체제의 질서에 종속된 기능으로서 관리하는 일을 통칭해 문화산업이라 일컫는다.
예술이 기존 체제에 의해 관리되고 체제의 한 기능이 되는 일을 피하는 길은 바로 우리가 앞서 본 예술 고유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일이며, 이 자율성이 바로 예술이 기존의 질서와 부딪칠 수 있는 힘, 예술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이런 예술 고유의 자율성을 예술의 순수성이라 칭한다면, 겉보기에 상반되는 듯한 순수 예술과 사회적 예술은 결국 서로 연결되는 통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도르노는 ‘미학이론’에서 말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예술, 모두가 원하는 형식의 해방 속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해방이 감춰져 있다. … 해방된 형식은 기존 상황에 대해 역겨운 것으로 여겨진다.”(홍승용 역)
예술은 기존의 체제와 스스로 단절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기존 체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은 낯선 것이며, ‘낯설게 만들기’라는 예술가의 기본적 소명이 생겨난다. 저 문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술이 기존 질서에 대해 낯설게 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역겨움’, 즉 추(醜)함이라는 점이다.
‘미의 한 범주로서 추함’이란 무엇인가? ‘미’와 ‘추’를 한데 묶어도 되는가? 전통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미적 체험이 이야기돼왔다. 그리스 시대의 디오니시우스 롱기누스부터 근대의 에드먼드 버크, 이마누엘 칸트에 이르기까지 미적 체험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이었다.
아름다움은 조화로운 형식으로부터 체험된다. 네 잎이 균형 잡힌 클로버(자연)나 황금비를 지닌 조각상(예술)이 아름다움의 예일 것이다. ‘숭고함’은 우리의 능력을 초과해 우리가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대상, 즉 조화로운 형식이 아니라 형식이 없는 것으로부터 체험된다. 폭풍우 치는 바다, 전쟁터, 거대한 산맥들 등에서 말이다.
예술에서는 무형의 안개 바다 앞에 선 방랑자를 그린 프리드리히의 그림이나 난파선들이 흩어진 무서운 바다를 그린 윌리엄 터너의 그림들이 여기 속할 것이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웅장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몰두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바로 이 숭고미의 현대적 계승자다.
추함이란 ‘아름다움도 아니고 숭고함도 아닌’ 독특한 미적 자리를 가지고 있다. 의도적으로 추함을 작품 안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현대 예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성을 들여 프레데터 같은 추한 외계인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일에 현대 예술은 골몰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나 제임스 앙소르 같은 화가들의 그림 거의 전부, 머리가 떨어져 나간 채 피를 쏟는 여인의 시체를 묘사하고 있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순교의 여인’), 불협화음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 음악들, 악녀의 속임수와 잭 더 리퍼의 엽기 살해로 이뤄진 오페라(알반 베르크의 ‘룰루’) 등등.
추함이란 과거에는 조잡한 작품, 즉 예술 작품의 완성을 향한 도정에서 실패한 부산물의 성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추함은 예술이 기존 체제와 단절하고 자율적으로 되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질 들뢰즈는 추한 것(악마, 괴물)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물-되기가 … 악마에 의해 상상 속에서 야기된 괴물들의 형태를 띠는 이유는, 동물-되기가 … 확립됐거나 확립되길 원하는 중앙 제도들과의 단절을 동반하기 때문이다.”(김재인 역) 예술이 이루려는 것 역시 추한 것을 동원해 고유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중심 제도들과 단절’하는 것이다.
이런 예술 고유의 추함이 기존의 제도에 맞서 정치적 힘으로 표현되는 좋은 예 하나를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다. 랭보의 시 ‘대장장이’는 프랑스대혁명의 민중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날, 인민들은 왕을 둘러싸고 버릇없이 몸을 뒤틀면서, 금박으로 장식한 궁전 이곳저곳으로, 더러워진 웃옷을 끌며 돌아다녔다. … 악질적인 졸개놈들은 아주 경멸적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저런 천치바보 같으니라고’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이준오 역)
더러운 옷과 천치바보, ‘이 추한 것들’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제도와 왕궁의 시대를 가볍게 무너뜨린다. 예술의 개성이 사회의 한복판에서 폭발하는 순간이다.
서강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문화일보
■ 용어설명
세 가지 미적 체험… 아름다움, 숭고함, 추함
고대 이래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미적 체험의 두 가지 큰 종류다. 이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두 개념에 대한 이론은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숭고함은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오늘날의 사회를 특징짓는 체험으로 분석하는 등 현대적 사유에 많은 영감을 줬다.
보다 새로운 현대의 미적 체험은 ‘추함’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 보듯 현대 음악, 미술, 문학을 꿰뚫는 이 개념을 통해 현대 예술은 사회·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