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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7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25,13ㄴ-21
복 음 : 요한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낱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호의적 감정과 끌림을 뜻하는 ‘필로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는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가 쓰이는데,
이 동사를 통하여 ‘너를 희생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필레오’(‘필로스’의 동사형)를 통하여,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만,
아직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사랑인지를 묻는 예수님의 물음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두 번 되풀이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 라고 옮긴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아가파오’) 물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할(‘필레오’) 뿐임을 고백하자,
세 번째로 당신을 인간적으로는 사랑하는지(‘필레오’) 고쳐 물으신 것인데,
이 상황이 슬픈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필로스’)에서 참된 사랑(‘아가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서에서 묘사된 바오로처럼, 베드로 또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가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등….
맞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건축에 온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우디는 하루의 건축 일을 마치면 오후 5~6시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전차와 부딪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 73세. 그런데 형색이 초라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꽤 긴 시간을 사고 장소에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지나가던 택시 기사 한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입원 처리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후 3일이 지나고서야 그의 인부들이 병원에서 그를 찾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라서
수술하고 3일이 지난 뒤에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너무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행색이 형편없다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외면한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 물음을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답변에 곧바로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이웃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또 단죄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들은 화려하고 멋진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역시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 없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지켜지지 못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결심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 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 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긴장 때문에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유명한 맛집을 한 번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제가 주로 가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대박집, 금성가든, 제주도, 곱창이야기, 병천순대, 나주곰탕’을 자주 갔습니다.
자주 가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되면 특별한 서비스를 주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성지도 많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복음을 선포한 곳이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고,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10번 이상은 다녀왔습니다.
저는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하였습니다.
매년 공동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제가 함께했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할 때입니다. 매년, 신문사 주최로 성지순례가 있었고, 저는 함께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성지가 있지만 저는 그중에도 ‘갈릴래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배 모양의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행복선언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여라. 나도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3번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3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확신에 차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년에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번 넘게 ‘그리스도의 식탁’을 찾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인들 사이에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옛날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거듭 던지고 계십니다.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정성껏 파스카 성제에 참여하고 몰입할 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인류 구원 사업의 전체적인 여정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풀톤 쉰 대주교님(1895~1979)의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묵주기도가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성체성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미사와 기도의 핵심 정신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될 때,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고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절)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제쳐 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도들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같은 곳) 하고 대답하였다.
십자가의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태 26,69-75 참조) 분을
세 번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한 것이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6.17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주님의 양 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보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낙인(烙印)이 찍힌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게 하려고 사목자들의 머리이신 분이 베드로를 사목자로 만드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양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신 양들이므로
베드로도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숭배하도록 가르쳤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19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처음에는 그들을 가르치시려 부르신 것이고, 지금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이제 순교는 하느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을 겪는 이에게 영예이며 영광이다.
주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사랑 고백에 관한 요한복음의 아주 유명한 부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차례 물음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미사 초입의 입당송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라고 문을 열고 있네요.
복음에 나올 베드로의 사랑 고백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임을 일깨우며
미사를 시작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에 제1독서를 먼저 훑어봅니다.
카이사리아의 신임 총독 페스투스의 눈에 비친 사도 바오로 관련 이야기로
그의 말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사도 25,19)
제3자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문제가 딱 그 정도입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그의 보고에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온기도 물기도 배제된 견해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아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면
페스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르게 이 사안을 보고 또 서술했겠지요.
복음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독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밤새 헛그물질로 지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음식으로
아침을 막 들고 나서의 대화이니 이미 애정과 충만한 만족감, 감사가 넘치는 중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세 번의 물음이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의 과오를
기워 갚도록 하신 배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이 베드로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리하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추궁이나 보속의 부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단순하고 담백한 질문에 비해 베드로의 대답은 좀 복잡합니다.
그냥, "예, 사랑합니다 주님!" 하면 좋겠는데 자꾸 앞뒤로 부연 내용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지 않느냐며 길어지는 대답은 즉각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자칫 말대꾸 같이 느껴질 위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보다 "알다"라는 동사에 더 강세가 부여되어 힘도 좀 빠집니다.
또 "사랑하느냐"(love)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좋아한다"(like)로만 응답을 합니다.
두 번째도 똑같이 응답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강도를 낮추어
"좋아하니"(like)로 물으시어 베드로의 자신 없는 사랑 고백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왜 그렇게 자신 없어 했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죄 중에 있을 때,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때,
죄의식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원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눈을 피해 공간적으로 숨지는 못하지만,
변명과 딴청과 실없는 말로 숨어버린 경험이 있다면,
즉답을 피해 빙빙 말을 돌려본 적이 있다면 지금 베드로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짜안~ 하고요. 하지만 사랑 여부를 묻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온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고 연대가 있지요. 이미 유형 무형으로 맺어진 끈끈한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3자나 관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이라면
상대의 사랑스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의 몇 초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답답하고 긴장되는 초조한 순간인지를 잘 알 겁니다.
사랑을 묻는 이의 진심에는 기대가 묻어 있고,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구걸에 가까운 바람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시는 이 순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사랑을 기대하고 청하고 더 나아가 구걸하기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순간입니다.
구약의 역사 내내 당신과의 사랑에서 등을 돌린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하다가,
사랑이라는 본성상 제풀에 꺾여 다시 그들을 품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당신 아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믿고 아꼈지만,
당신을 부인했던 수석 제자에게 다시 겸손히 사랑을 물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사롭고 감미로운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세 번 "사랑"을 물으시고, 세 번 어징쩡한 "응답"을 들으시고, 세 번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당신 양들을 위한 사랑으로 옮아가야 함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양들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은 멈춤 없이 고이지 않게 흘러야 하고 번져나가야 하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이처럼 완전의 숫자 3만큼의 횟수로 세 차례씩 질문과 응답과 당부가 오고 간 뒤
비로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베드로에게 부여될 "직무"에서 베드로 "개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맡기는 내 양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 당부 명령에는 사명과 책임이 깔리기 마련이라,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 인격과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옅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야 "따름"을 언급하신 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서 그랬을 겁니다.
질문과 응답과 당부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본질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시선은 "양"에서 "베드로"의 인격으로 옮아갑니다.
주님과 그는 "나"와 "너", 즉 "I"와 "You"의 관계로 마주하며, 진정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직 현장, 사목 현장, 봉사 현장에서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정신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당부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양들의 안위가 우선이어도
주님 앞에 머무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양들과 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단계로 그쳐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성과와 양들의 칭송이 쏟아져도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의 단계일 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전부 바쳐드리는 자기 증여와,
앞서가신 그분의 운명을 나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과, 나를 비워낸 자리에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담겠다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안에 담고 물들어 갑니다.
결국 그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사랑 질문과, 부족한 응답과, 주님의 당부를 거쳐
따름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일치의 여정이지요. 우리 꼴을 다 아시고도 사랑을 구걸하시고
따름이라는 곁자리를 내주시는 주님께 빙 돌리지 말고
주저 없이 사랑을 외쳐 고백하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아가페적인 사랑이 못되고 "당신이 참 좋아요"라는 우정의 고백이어도 상관없으니까요.
모든 좋은 것은 삼세번인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요한복음 17장이 보도하는 “대사제의 기도”를 미사 전례의 복음으로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의 一致를 얼마나 원하시고 또 강조하고 계신가를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고별의 밤을 生涯의 어느 밤보다 길게 보내시면서,
그 밤의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셨다.
제자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가운데,
곧 들이닥칠 수난과 죽음의 재난을 내다보시며 바치시는 기도이기에
이 기도는 더욱더 간절함과 애절함을 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이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가 모든 일치의 원리이며 원칙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일치에는 조건이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바램이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떤 흠이 된다거나 ‘玉에 티’가 아니라 바로 위반이며 범죄이다.
긴 고별담화(요한 13-16장)와 고별기도(요한 17장)를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원로들의 손에 넘어가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수제자 베드로는 예언대로 세 번이나 스승을 배반하였다.(마태 26,69-70; 요한 18,15-18. 25-27)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자, 스승을 팔아넘긴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마태 27,3-5)
다른 모든 제자들도 스승을 버린 채 도망치고 흩어진 가운데(마태 26,56; 마르 14,50)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오직 한 제자의 눈앞에서(요한 19,25-27)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복음 선포의 마지막 지상 사명을 내리시고 승천하셨다.(마태 28,16-20; 루카 24,51)
이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파견과 강림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의 마지막 추가편집 부분인 21장의 내용 중
“베드로와 예수의 관계 회복과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21,15-19)에 관한 내용을 듣는다.
죽음 직전에 공동체의 일치를 그렇게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21,14),
베드로 사도를 따로 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고, 그에게 주님의 양 떼를 맡기심으로써
베드로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아울 베드로의 남은 삶이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신다.
무대는 티베리아 호숫가, 베드로가 제자로 불림을 받기 전에
本業으로 고기를 잡던 갈릴래아 호수다.(마태 4,18-20)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제자들이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을 때,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153마리의 고기를 한꺼번에 낚았다.
그리고 뭍에 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조반을 함께 나누었다.
조반이 끝나자, 예수님께서는 단독으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다.
예수님의 의도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 그리고 이 마지막 발현에서 시몬 베드로를 따로 세워
아주 중요한 것을 맡기려 하심이 분명하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누구인가?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 뵙고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하자 둘이 함께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시몬을 알아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하시며 불렀던 이름이다.(요한 1,41-42)
이 이름을 오늘 다시 부르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가 부름을 받기 전의 이름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함으로써(요한 18,15-18. 25-27) 제자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에
召命 이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제자의 자격이란 한 번의 소명으로, 한 번의 축성으로 주어지고
또 그렇게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있는 그 순간이 바로 “제자로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사랑을 다짐받는다.
이는 처절하리만큼 잔인한 과정을 통하여 얻어내는 다짐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세 번씩이나 던지는 스승의 질문에
스승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베드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만다.
스승을 배반하고 흘렸던 그때와 같은 눈물일까?(마태 26,75)
아니다.
이는 배반했기 때문에 흘리는 痛恨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歡喜와 간절함과 다짐의 눈물이다. 이제 베드로는 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주님의 양 떼를 잘 “돌보는 것”임을,
이들을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양 데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19절)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