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I see you”의 의미성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의 인사
“I see you”는
“나는 너를 봅니다”라는 간단한 말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볼 때,
너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 너를 보지 않는다.
또 보지 못한다.
내 욕심에 따라 보고 내 주관에 맞추어 보고
내 선입관과 고정관념으로 본다.
예를 들어보자.
의사가 환자를 볼 때,
환자라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
환자의 상처를 본다.
교사가 학생을 볼 때,
학생을 보지 않는다.
학생의 성적을 본다.
기업체의 면접에서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회사에서 써먹을 수 있는 가치를 본다.
시장가치로서 그 사람을 본다.
정치인들은 사람을
표로 본다.
또 맞선을 볼 때는 어떨까?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
또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명품을 보고
그 사람의 수입을 보고
그 사람의 학벌을 보고
그 사람의 직장을 보지만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를 볼 때,
너라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와 욕구충족의 연장선상에서
그 부분만을 보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전략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를 보지 못한다.
부모는 ‘내가 부모이니까’를 전제로 자식을 본다.
자식도 ‘내가 자식이니까’를 전제로 부모를 본다.
또 ‘내 자식’ ‘내 부모’라는
애목과 집착을 바탕에 깔고 본다.
사랑하는 남녀 간애는 나는 너를 보는 것일까?
서로가 갈구하는 바가 맞아떨어지고 서로의
취향이 상합하고 서로의 애욕이 투합한다고 해서
너를 보는 것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
너라는 생명의 그 바탕을 본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너’만을 본 것일 뿐이다.
어쩌면 내 속의 너를 볼 뿐이다.
나를 넘어서 너를 보지 못한다.
이점 하나 이야기 해두자.
근대문명이란 것 자체가
‘너를 볼 수 없는’ 문명이다.
근대문명이란 것,
그 동력은 인간의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적 개발이었다.
생산수단이든 통신수단이든 무기이든 간에.
그래서 도구적 개발은 비약적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간마저도 도구화 했다는 것이
근대문명의 비극이고 거기서
근대문명은 침몰 할 수밖에 없다.
왜인가?
도구적 관점에서는
나와 너는 공존할 수 없다.
너는 나의 도구일 뿐이고
나의 욕망실현의 수단일 뿐이므로.
거기에서 자연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다.
인간과 인간도 공존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에서 나는 너를 볼 수 없다.
나와 똑 같은 인간으로
너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내쪼 대로’ 보고
내 필요에 따라 보고
내 기분에 따라 보고
내 주관에 따라서 보기 때문이다.
너를 볼 수 없는,
너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장벽이
너무나 두텁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고
잘 보고 있다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배영순 (영남대 국사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