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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Scene 14. The Chaser /추적자/
지크힐트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걸리며 웃음 소리가 새어나오
기 시작했다.
"크크큭. 그래, 그래야지. 다름아닌 제국 총 기사단장의 뒤통수를 친
사람이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
지크힐트의 입에서 웃음이 멈추자 검은 그림자들이 지호를 중심으로
조금씩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지호를 둘러싼 것은 다섯. 그러나 넷
이 그 다섯 뒤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섀도우 블레이더(Shadow Blader) 다섯을 혼자서 버텨낸 것은 칭찬해
주지. 그러나,"
지크힐트의 입가에 걸려있던 비릿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홉은 어떨까?"
'팟'하고 짧은 바람소리가 나며 세 곳에서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이 지
호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호는 검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
려 눈을 반쯤 감은 채 마치 명상이라도 하듯 고요히 서 있었다. 그러
나 검날은 무자비하게 지호를 향해 짓쳐들었다.
파삭-
그림자들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지호의 몸이 순간 흔들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들의 공격 중심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핏-
세사람의 검이 머뭇거림 없이 지호를 향해 다시 휘둘러졌다. 그러나
이미 지호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지호가 사라지고 난 빈자리를 세개
의 검이 훑는 동시에, 다른 두개의 검이 지호가 움직이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채앵-
그림자들의 검이 서로 부딪히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지
호는 여전히 그곳에 없었다. 지호는 자신을 공격하던 그림자의 뒤에
서 있었다.
파밧-
뒤를 잡힌 그림자가 옆으로 빠르게 물러서고, 새로운 세개의 검이 지
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금 피하고 있는 동료의 생사를 거의 도외
시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역시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
버렸다. 지호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까.
뒤이은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호는 언제나 근처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마치 지호가 그들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뜻!
검까지 넣어버리고 오직 한가지에만 집중한 지호의 시도는 옳았다. 만
일 지호가 공격을 피하기 위해 크게 움직였다면 그들은 지호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공격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호의 움직임은 항상
최소였다.
다른 그림자들이 공격에 끼어들 여지가 적었고, 항상 동료를 공격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들
은 여전히 자그마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여
전히 날카로왔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하는 지호 역시
조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퍼억-
마침내 그림자들 간의 공격이 어긋나는 때가 왔다. 지호를 공격하던
검이 같은 편을 공격하고야 만 것이다. 지호는 순간적으로 그림자들
간에 생길 틈을 노렸다.
그러나 틈은 생기지 않았다. 몸에 검이 박힌 그림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공격을 계속했고, 그를 찔렀던 그림자들 또한 동
요 같은 것은 없었다.
지호의 온몸을 차가운 한기 같은 것이 훑고 지나갔다.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생사를 살피지도 않는 이 검은 그림자들은 그저 정체불명의 습
격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괴물(怪物)이었다.
지호는 흐트러진 마음을 필사적으로 추스렸다. 공포는 움직임을 둔하
게 한다. 그리고 마음의 흐름을 방해한다. 이들은 그런 흐트러진 마음
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삑-
작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지호를 쉴새없이 공격하던 검은 그림자들
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러나 지호는 여전히 그들 가운데
포위되어 있었다. 지호를 공격하던 검들이 물러나고, 검은 그림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호를 둘러쌌다.
설마, 화살을 날리려는 건가? 이렇게 둘러싼 상황에서 화살을 날리진
못할텐데?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들도 초조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
람이 한명 있었다.
"비켜!"
그는 지크힐트였다. 그의 앞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
다. 지크힐트 옆에 서있던 외팔의 그림자였다. 지크힐트는 차가운 목
소리로 말했다.
"이게 네가 말하던 섀도우 블레이드의 힘이냐? 내가 춤이나 보자고 이
따위 인형 같은 것들을 데리고 다니는 줄 아는건가? 춤이라면 이보다
더 잘 추는 놈들이 많아!"
"그는 특별합니다."
무릎을 꿇은 검은 그림자에게서 웅웅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지호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검은 그림자의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울리는 듯 공허하고 섬뜩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검은 그림자는 슬며시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안았다. 지
크힐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너더러 나서라고 했나?"
검은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오른팔을 재생시킨다면, 다음엔 네 목을 재생시킬 기회를 주지.
목 없는 사나이라, 그거 볼만하겠군."
지크힐트는 빈정거리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은 그림자를 향한 살
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검은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옆으로 비켜났다. 지크힐트는 똑바로 지호를 향했다.
색이 죽어버린 짧은 금발, 오직 살기로만 뭉쳐진 듯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비릿한 미소의 사내. 그가 또 다시 지호 앞에 나선 것이다.
"당신은……"
지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소리를 들었는지, 지크힐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어이 없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그
의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큭, 큭큭. 이거 정말 꼴이 우습게 됐군. 저 애송이 녀석은 날 기억하
지도 못하는데, 나는 저놈을 잡으려고 꽁지가 빠져라 뛰어다녀야 했다
니. 큭큭, 아주 꼴이 우습게 됐어."
지크힐트는 그대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지호를 노려보았다.
"하긴 패배한 놈들의 이름 따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
까 어차피 피장파장 일려나? 게다가, 자그마치 제국 총 기사단장의 뒤
통수를 친 장본인이시니 말야. 자아, 그럼 대화는……"
타악!
지크힐트는 갑자기 지호를 향해 도약했다.
"여기까지다!"
쉬잉!
지호는 가볍게 뒤로 움직여 지크힐트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지크힐트
가 다음 동작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호는 마치 그림자처럼 지크힐트의
사각(死角)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지크힐트의 검은 순순히 지호를
놓아주지 않았다.
휘릭!
지크힐트의 현란한 검술과 그 사각을 기묘하게 점하고 움직이는 지호
의 동작이 마치 춤사위처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목숨
을 건 춤사위였다.
점점 기울어가는 달빛은 초원을 환하게 비추었고, 원을 그린 십여개의
어두운 그림자들은 마치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지호와 지크힐트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펼쳐지고 있었다.
탁!
돌연 지크힐트가 동작을 멈추었다. 지호는 그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체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
은 오히려 분노 때문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
지크힐트가 눈을 빛냈다. 그의 눈에는 살기와 분노가 함께 빛나고 있
었다.
"왜 검을 뽑지 않는 거냐!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지호와 지크힐트가 어우러지기 시작한지도 꽤 시간이 되었지만, 지호
는 여전히 검을 빼내들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처럼 지크힐트의 사각에
서 사각으로 움직여다녔을 뿐. 바로 그것을 지크힐트는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호는 검을 빼어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검을 빼어들
수 없었던 것이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그림자들과의 싸움이 새벽이 가깝도록 계속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호는 한 순간도 쉴 수 없었다. 오히려 초조함
을 느끼며 싸우고, 질주해야 했다. 게다가 지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 자신의 기혈이 들끓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지금 지호는 필사적으로 불안감을 억누르며 순간 순간에 전력을 다하
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검을 든다는 것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
는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호가 대답이 없자 지크힐트의 얼굴이 잠깐 씰룩하더니, 입꼬리가 위
로 올라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아가씨, 앙피시아의 엘마이러였던가?"
지호가 움찔했다. 아이리스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것과 갑자기 그녀를
거론하는 것에 대한 의혹이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크힐트의
입에서 기어이 지호가 두려워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너 다음엔 그녀다. 앙피시아 공왕하고 약속을 했거든. 사이좋게 한가
족이 저승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말야. 어때? 눈물겹지 않나?"
지호의 눈빛이 변했다. 지크힐트는 지호의 반응따윈 상관없다는 듯,
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려 달빛에 비춰보았다. 그의 검은 다른 그림자
들의 검과 마찬가지로 전혀 빛나지 않는 검은 색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검을 가져올 걸 그랬어."
지크힐트는 천천히 지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먹이를 놀리는 뱀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말 많던 늙은이의 심장에 박아넣었던 검 말이야. 아마 엘윈이라고
했었지? 제국 대현자라던……"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앞에서 지크힐트가 무언가 말
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지호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
속에서는 방금전 지크힐트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지호
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상관하지 않
았다.
"지, 지금, 뭐라고…… 했지?"
무언가 얘기하고 있던 지크힐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지호
의 반응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지크힐트는 과장스런 몸짓으로 대답
했다.
"뭐야, 설마 아직 몰랐었던 건가? 이런, 이런."
지크힐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검의 옆면으로 자신
의 다리부분을 툭툭 치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주지. 네 스승 엘윈은 말야……"
쉬익!
지크힐트가 땅을 박차고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검이 지면
에서부터 위로 솟아오르며 지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먹
이를 노리는 뱀의 독니와도 같았다.
"내가 죽였다!"
지크힐트의 검이 지호의 눈 가득히 들어왔다. 피하려 했지만, 다리가
뒤따르지 못했다. 간신히 몸을 트는데 성공했나 싶더니 뺨에 무언가
번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지크힐트의 검이 지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
었다. 지크힐트의 검이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지호는 발에 힘을 주고 몸을 굽혔다. 본능적으로 지크힐트의 검과 거
리를 두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크힐트의 검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
다.
피잇!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지호의 측면으로 날아
들어왔다. 지호는 지면을 굴러 그의 검을 피했지만, 지크힐트의 검은
지호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왜 그래? 갑자기 두려워졌나? 그 늙은이처럼 죽게 될까봐? 땅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은데 그래!"
지크힐트는 막 몸을 일으키려는 지호를 향해 검을 내지르며 마치 발악
하듯 소리를 질렀다. 지호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도 지호는 단 하나만을 생각했다.
도망가선 안돼.
검을 보지 말아라! 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 검과 검이 맞서는 공간,
그 작은 공간을 장악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공간을 장악하는 것은
곧 그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 검에 쫓기는 자가 마
음을 알겠느냐? 마음을 모르는 자가 검의 공간을 장악할 수 있겠느냐?
아스라히 둘째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크힐트의 검이
지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지호의 두 눈에 지크힐트의 눈동
자가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지호는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는 실낱 같
은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호는 서슴없이 지크힐트를 향해 몸을 날
렸다.
치익-
지크힐트의 검이 지호의 귓바퀴를 가르고 지나갔다. 붉은 핏방울이 공
중을 날았고 잘린 귓바퀴가 불에 덴듯 화끈했지만 지호는 멈추지 않았
다. 그리고 지크힐트의 몸은 지호의 갑작스런 행동에 균형을 잃고 있
었다. 지호가 그의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우웃!"
지호와의 충돌로 닥쳐올 충격을 예감했는지, 지크힐트의 몸이 일순 경
직되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충격은 없었다. 지호는 마치
부드러운 깃털처럼 지크힐트의 품에 안겨왔다. 그리고 오히려 강하게
지크힐트를 잡아당겼다. 지크힐트가 움직이던 방향 그대로.
"타합!"
지호의 기합과 함께, 지크힐트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지호가 그대로
지크힐트를 날려버린 것이다. 지크힐트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
자들 사이를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막아라!"
한쪽팔이 없는 그자가 지크힐트를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지호가 지크힐트를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빼어든 숏
소드가 그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호는 절규했다.
"왜!"
그림자들은 명령과 함께 일제히 지크힐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순간 지크힐트의 몸이 그림자들과 충돌하며 지면에 나뒹굴었다. 그리
고 지크힐트를 뒤따르던 지호의 검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로막히
고 말았다.
채앵!
교차된 두개의 검이 지호를 막았다. 자신을 막아선 두명의 그림자들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외팔이 사내의 검이 지호의 등을 파고들었다.
"하압!"
기합소리와 함께 지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호의 검을 막고있
던 두 검은 그림자의 몸이 휘청할 정도였다. 그들이 검을 버티는 힘을
발판 삼아 지호가 공중으로 도약한 것이다.
외팔이 사내의 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피하는 지호를 뒤따르지는 않았
다. 그저 지크힐트를 향한 공격을 막기위한 공격을 뿐. 지호가 몸을
피하자 외팔이 사내는 급히 지크힐트에게 다가갔고, 나머지 그림자들
은 지크힐트를 보호하려는 듯 둥글게 에워쌌다.
"크윽……"
지크힐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또렷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충격이
심한 듯 했다. 기사들이 지금처럼 힘껏 내동댕이 쳐 지는 일은, 아마
도 말에서 떨어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이런 형식의 공격이 지크힐트에게는 의외의 헛점으로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호는 지호
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간, 미련없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빼
낸다면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저, 저놈을……"
"안됩니다. 우선……"
무언가 다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곧 멀어졌고, 뒤를 쫓는 기
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호는 미친듯이 땅을 박찼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쳐가고 검에 베인 귓바퀴가 욱씬거렸다. 어느새
새벽이 되었는지 하늘은 벌써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지호는 속도
를 늦추지도,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눈물로 얼룩지고 있
었다.
"왜! 대체 왜!"
왜 죽였냐고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여야만 했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무슨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
셔야 했던 이유를. 그러나 묻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도망해야 했
다. 마치 3년전 그때처럼.
자신은 패배자였다. 한발자국씩 내딛어 보겠다고, 그렇게 아이리스에
게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아직도 헤메이고 있었다. 복수도, 용서도,
희망도, 어느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도망치고만 있는 자신이
지호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지호를 더욱 절망감에 빠뜨렸다.
"으아아아!"
지호의 절규와 함께, 초원의 새벽이 깨어졌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셀러다인에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호를 뒤쫓았던 아이리스는 왕궁 바깥쪽에
서 그들의 흔적을 놓쳤고,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기색으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이리스를 맞았지만, 아
이리스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한낮이
될 때까지 아이리스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여사제 에반제린이 아이리스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녀는 탁자에 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남은 일행은 오늘
출발하려던 일정을 연기하기로 했고, 셀러다인 국왕은 보다 큰 규모의
수색대를 조직하여 지호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점심을 막 넘긴 시간이 되자, 아이리스는 여행을 위한 준비를 완벽히
갖추고서 밖으로 나왔다. 놀라는 일행과 국왕에게 아이리스는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정대로 모든 것을 진행할 것이라는 말 밖에
는.
연기하기로 했던 출발은 강행되었고, 일행은 아이리스의 결정에 대해
화를 냈다. 덩치와 엘런은 특히 심했다. 다행히 여사제 에반제린이 나
서서 일행이 나뉘어지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왕궁을 출발할 때까지도 꽤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리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볼뿐, 아무런 말도 없었
다. 그러나 그들이 셀러다인 수도를 벗어나는 순간, 일행은 그녀의 눈
이 젖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
는,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호를 제외한 일행은 셀러다인을 떠났다. 신생 국가연합 '벨
라'의 완성을 위해.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