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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해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애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게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 현장에는 당시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이들가운데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들어 온 사람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가 로마교회입니다.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사도행전1:10b
그런데 어떻해 바울은 단 한번도 가보지도 못한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말씀을 미루어 볼 때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해 로마교회에 관한 정황을 듣고 이방인의 사도로써 관심을 갖고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서신을 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주후41~54)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행18:1:21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자 거기엔 로마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온 천막제조업자 유대인 아굴라와 그의 부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바울은 직업상 그들에게 가서 함께 살며 일하는 기간 동안 충분히 로마 교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바울은 그들을 데리고 함께 움직이다 에베소에서 그들을 남겨 두고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에베소에서 자기 집을 개방하여 예배와 성도의 교제와 섬김의 장소로 내주었다는 걸 기록합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성경은 로마교회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이신가를 정확하게 꿰차고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행18:26)
바울은 이런 부부와 함께 살며 일하면서 안식일이 오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며 지내던 중 마게도냐로부터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와서 만나게 됩니다. 이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게 되는 걸 보면서 우린 바울이 아굴라 부부와 실라와 디모데와의 교제속에서 이전보다 더 그리스도관에 밝아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굴라 부부에게 언변 좋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를 만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게 역사하십니다. 그후 아볼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공중 앞에서 증언함으로서 유대인의 말을 전복시켜버립니다.
(행18:28)
어떠한 만남의 축복을 원하십니까? 내 눈의 비늘을 벗겨 줄 수 있는 만남을 원하십니까? 이전보다 더 환히,더 밝히 예수가 왜 그리스도이신가를 알 수 있는 만남을 원하십니까? 어느정도로 원하십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자들입니다. 피차 쌍방이 목숨 바쳐서 섬기고픈 복음의 일군들을 사는 날 동안에 만날 수 있다면 이만한 만남의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내 자신이 먼저 예수를 위해 목숨을 내놓지 않는 한 이런 만남은 요원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16:3~5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바울을 선교차원에서 영적 교제와 물질적인 헌신으로 도왔으면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까지도 이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로마교회에게 알려 주었을까요? 하다면 수신자인 로마교회를 향하여 이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능히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서를 묵상하려니 먼저 로마서를 쓰게 된 경위가 어떠한가 살펴보는 중에 얻은 수확이 있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도록 격동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격동이 무엇이였냐면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알게 된 로마서 교회에 꼭 주고 싶은 것이 바울 자신이 지금 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복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곳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고린도이며 주전 57년 혹은 58년으로 추정합니다
이 때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아굴라 부부나 복음의 정수인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알아서 진리안에서 교제하며 증거하던 중이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로마서를 기록했으니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찬사가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찬송이 되시기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함에 하나님의 복음(유앙겔리온)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예수 그리스도의 종,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말은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쓰여졌다 합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전쟁에서 이겼다고 전하는 승리의 소식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황제의 생일이나 결혼이나 득남이나
사면이나 승전보 등등 황제로 인해 파생된 모든 좋은 소식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유앙겔리온을 전하는 자를 전령관(Kerux.케룩스)이라 하고 이 전령관이 전하는 내용을 케리그마(Kerygma)라 합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기쁜 승리의 소식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때문에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함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완성됨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죄가 사해지고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는 "의"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나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과 하늘의 주로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하나님 보좌로부터 제자들에게 보내사 하늘의 주와 땅의 믿는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된 당신의 몸으로서의 교회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된 로마교회의 모든 성도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는 보이지 않던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현존하는 로마교회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롬1:8)
이 순간 저는 우리 조국에 밤이면 빨갛게 빛나는 수많은 교회의 십자가들을 보며 바울처럼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율법적인 판단과 비판과 정죄에 기인한 것이라면 분명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울은 이런 자를 향하여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롬2:1)"고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마땅히 지탄 받아야 할 부분들도 있지난 그보다 더 중요한 감사를 상실한 상태에서 칼질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 자리에 어느새 앉아버린 율법 지식인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된 바울이 유앙겔리온의 내용(케리그마)을 쓴 로마서는 당연히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은 가이사(모든 로마 황제에게 붙어진 칭호)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주가 가이사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때문에 순교당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삶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순교의 양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매 순간 순간 시간의 주께 나를 바쳐 주로하여금 쓰임받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을 기본으로 여러가지가 뒤따를 것입니다.
바울은 시간의 주 앞에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는 시간의 주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드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기도 시간에 얼굴도 보지 못한 너희(로마교회)를 말한다고 합니다. 복음 밖에서 불가능한 일이 복음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너희를 기도로 말하게 됨은 너희에게로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줌으로서 너희를 견고케 해주고 싶기 때문이라 합니다. 단 하나님 뜻안에서 입니다.
그리되면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롬1:9~12)
복음이 진정 복음이 될려면 내가 믿는 복음을 전하므로 듣게 된 자도 복음을 믿어 나와 함께 안식을 얻게 될 때입니다. 왜냐면 내가 진정 복음에 빚진 자라면 복음을 전함으로 맺혀진 열매를 보면서 화를 면하게 된 안위를 얻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복음의 빚을 진 자라는 바울의 부담감은 기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라는 것을 아는 자는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복음에 대한 전체적인 시선을 가진 바울은 감히 하나님을 증인으로 소환시킵니다. 바울이 자신의 증인으로 소환한 하나님은 그의 심층에 자리잡고 계시는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령은 자연적인 본성으로서의 심령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농부되신 아버지의 손에 다루어져 소생케 된 심령입니다
"자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심령)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57:15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당신의 증인이라 하심에 확신을 가지셨으니 그 주인의 그 종입니다. 이는 성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저주의 아이콘인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의 복음을 전함에 부끄럽지 않다 하십니다. 이는 저주의 아이콘인 십자가를 축복의 아이콘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능하신 하나님의 강력이 온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첫 열매로 살려내사 사망과 저주의 십자가를 생명과 축복으로 교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으로는 언약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성결의 영,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인에게서 잉태되어 남자(뱀)의 후손뿐인 인류사에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여인의 후손으로 오사 뱀의 머리(사망과 저주의 법)를 십자가에서 박살 내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음에는 사람이나 율법이나 어떠한 선행이나 제도가 인정하는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하여금 믿어지게 성령으로 감동시키십니다. 즉,유앙겔리온(복음)의 케리그마(내용,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긴가민가하면서도 결국은 마음이 쏠려지면서 믿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지면 끝이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어진 첫 순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첫 걸음마를 뗀 것입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첫 걸음마입니다. 이제 또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두번째 걸음마를 떼려면 이 역시 십자가의 예수께서 날 용서하사 의롭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음에서 믿음으로 걸음마를 떼다보면 보행이 자유로워지고 달리게도 됩니다. 종내는 경기장에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도록 온전한 믿음의 주와 함께 믿음의 선수가 되어 믿음의 법대로 달려서 믿음의 완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의인의 삶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