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쇼팽의 <영웅 폴로네즈>.
폴로네즈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볼로네즈 파스타와 헷갈리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파스타를 푸짐하게 삶아 줄 테다. 폴로네즈란 폴란드 무곡을 뜻하는 말인데 곡의 주선율은 과연 무곡풍이다. 서주부터 춤추는 듯한 선율이 이어져 듣는 이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 이 곡은 그야말로 난곡이다. 화음을 이루는 음표가 건반을 폭넓게 넘나들어 손이 작은 연주자가 치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연속되는 왼손 옥타브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거의 중노동 하듯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차라리 파스타를 삶는 게 훨씬 편하다. 실제로 중간부에 접어든 시점에서 내 손가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107)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건반을 힘주어서 정확히 치고 싶은 나머지 손끝에 체중이 실리도록 의자를 높게 조절하거든. 그런데 건반의 무게는 고작 70그램이야. 지압하듯 센 힘이 필요 없어. 앉은 위치를 낮추면 자연히 등허리가 세워지고 근육을 곧게 펴서 잘못된 자세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단다."
(123)
"자, 음이 연속해서 나면 드디어 연주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진 셈이야. 기본 요소는 세 가지인데 첫째 리듬, 둘째 음, 그리고 셋째 스타일. 리듬은 작품의 짜임새인 만큼 무조건 정확해야 할 것. 또 연속해서 내되 각각의 끝소리가 다음 소리와 붙어 버리면 안 돼. 리듬이 애매해지거든. 따라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필요가 있어.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음절의 울림을 나타내는 셈이니까, 여기서도 너무 강하게 쳐서 울리지 않게 하는 건 마이너스야."
(234)
영롱한 음 하나에 달빛 한 줄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음이 빛이 되어 마음속에 비쳐 든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더니 이내 정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미사키 씨에 따르면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달빛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쌍의 남녀가 한가로이 왈츠를 춘다. 시간마저 느릿느릿 흘러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위로 퇴락한 고성이 또렷이 떠오른다. 한 음이 끊어지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진다. 곡이 끝나자 나는 무척 후회했다. 왜 이런 곡을 그동안 허투루 들었을까. 선율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이었건만.
(271)
"아무리 근사한 옷이라도 취향과 체형에 맞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런 걸 오시키세(주인이 고용인에게 철마다 해 입히는 의복을 뜻하는 말)라고 하죠. 제 지인 중에도 실제로 있는데요, 주변의 기대와 착각 때문에 본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건 비극입니다. 인간은 물이 아니라서 준비된 그릇에 강제로 집어넣으면 뼈가 뒤틀리고 피멍도 생기지요. 그런데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무리를 거듭합니다. 그건 남의 인생을 사는 빈껍데기 같은 삶입니다. 그 괴로움과 허무함을 생각하니 암담한 기분이 드는군요."
(303-304)
"으음. 하긴 수업이나 레슨에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다만 그러다 보면 신체와 직감, 기술과 정신이 따로 놀게 돼. 마음에 곡의 이미지가 확립된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재현할 때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운지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반대로 새로운 움직임이 이미지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양쪽이 동떨어지면 연주는 절로 빈곤해지지. 잘 들으렴. 연주의 기본 요소 중 세 번째가 스타일이라는 건 전에 설명했지? 스타일이란 곡의 건축 형태를 가리켜. 연주자가 어떻게 칠 것인지는 곡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곡가의 어법을 연주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로 결정되지. 그리고 그 인식 방법은 직감과 조예를 통해 길러져. 악보에 기록된 이음줄, 악센트, 스타카토, 강약 등의 지시 기호를 존중한 상태에서 자신의 재능과 교양과 감수성이 그 곡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걸 선택하지.
(342)
쇼팽은 1831년 파리로 향하던 길에 고국인 폴란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짓밟힌 고향과 남겨 둔 가족. 이 곡(혁명)은 그때의 실망과 분노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곡 전반에 걸쳐 쇼팽의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곡은 왼손에서 시작해 낮은 음역부터 음계적으로 진행하고 내림나장조로 바뀐다. 도입부의 거친 화음은 몇 번이나 형태를 바꿔 나타나고 그때마다 흥분이 더해진다.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른 채 솟구치기만 한다. 선율을 배경으로 전쟁에 쓰러져 가는 민중과 무너져 가는 건물이 보인다. 권총, 파괴음, 그리고 아비규환. 관객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359)
그것이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목소리보다 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말보다 더 전달력 있는 말로 이야기한다. 나이, 성별, 국경, 언어와 같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꿈같았던 마법이 지금은 미사키 씨가 가능성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 허락된 유일한 재산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피아노밖에 없다.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나조차 아니게 된다. 그래서 매일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