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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한의사의 용한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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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선 반드시 회오리를 만나게 된다. 제아무리 잠잠한 인생일지라도 서른의 고비를 그냥 넘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기회는 모르겠지만 위기는 꼭 찾아오는 것 같다. 고요하던 내 인생에 첫 번째 회오리가 몰아닥친 건 스물아홉 겨울이었다. 소설속 주인공처럼 피를 토하며 쓰러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삼류 드라마처럼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여자의 품으로 떠 나갔다. 병은 약으로, 실연의 상처는 시간으로 해결했지만, 한 가지만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복부 팽만감’. 밥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오르는 증상은 질병과 실연만큼이나 나를 괴롭혔다. 시도 때도 없이 트림과 방귀를 ‘살포’해야만 살 수 있는 여자. 너무 치명적이지 않은가? 나는 그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복부 팽만감을 없애준다는 쥐똥 같은 환약을 한 줌씩 털어 넣어도 봤고, 몸을 차게 하는 채소 대신 육류 위주로 먹어도 봤다. 효과가 있었냐고? 트림의 강도만 세졌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위장 기능이 약해졌다거나 극심한 운동 부족이라고 하기에 내 증상은 꽤나 지속적이고 불편한 것이었다. 또 약으로도, 운동으로도, 시간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골칫덩이였다. 이제 남은 해결책은 한 가지 밖에 없다. 현대 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건강상의 문제가 나타났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렇다, 한의원이다. 한지 예술가 이종국 선생의 아내 이경옥 씨는 내 속사정을 듣고 꼭 한번 가보라며 충남 논산에 위치한 한의원을 소개해주었다. “용하기도 용하지만 특별한 분”이라며 이기웅 원장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기도 했다. 품이 넓은 계룡산 자락을 지나 사포리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니 황토로 지은 집이 보인다. ‘햇빛쉼터’라는 이름 처럼 햇빛이 잘 들고 쉬어 가기에 좋은 시골집. 한의원이라는 말보다 명상원 혹은 다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다. 커다란 차탁과 황토를 발라 지은 찜질방까지 ‘의료 기관’의 냄새를 풍기는 구석이라곤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전국 각지에서 시나브로 찾아드는 ‘단골 환자’만이 유일하게 그곳이 한의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윗쪽) ‘어설픈 한의사’ 이기웅 씨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액자 속 인물은 인도의 사상가 마하라 하라마슈. 이기웅 씨는 그의 텅 빈 눈빛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왼쪽)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손길. (오른쪽) 이기웅 한의사가 차려준 밥상은 그 자체로 치유의 수단이다. 슴슴하게 무친 도라지와 고사리나물, 구수한 조개 된장국 그리고 와인 한 잔. 이보다 더 맛있는 식탁이 있을까. 어설픔 속에 감춰진 진실 개성 없는 금테 안경에 까까머리를 하고 개량 한복을 입은 한의사, 손님을 대하는 말솜씨가 영 어눌하고 말까지 더듬는 한의사. 이쯤 되면 절대로 그 앞에 드러누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밀려든다. 사실 이기웅 원장을 처음 봤을 땐 ‘뭐야? 환자 경험이 별로 없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내게 그가 건넨 첫 마디는 “식사 먼저 하시죠?”다. ‘나 참, 맥도 짚기 전에 밥부터 먹자는 한의사는 처음 보네.’ 속으론 이렇게 말했지만 몸은 어느새 밥상 앞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절에서 공수해온 고사리와 도라지나물에 구수한 된장을 풀어 끓인 조갯국, 호박 숭숭 채 썰어 넣고 노릇하게 부쳐낸 부침개 그리고 찻잔에 따라 마시는 붉은 포도주…. 입안에 침이 고이고 식욕이 막 살아났다. 맛있는 음식 앞에 장사 없다고, 그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 먹고 나니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도 나도 속 깊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설퍼서 당황하셨죠? 전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고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그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세상은 잘난 사람만 인정해주는구나.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를 잣대로 인간을 판단하는구나. 하지만 저한테는 가치보다 사람의 본질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직업, 부, 명예 이런 걸 떼어놓고 보면 그 사람이 더 잘 보이죠. 기자로서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당신은 저 처럼 띨띨이예요. 감추고 있지만 제 눈엔 다 보여요.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거든요. 꿋꿋한 척하지 만 속은 텅 비어 있죠. 세상 바라보는 눈이 좀 시니컬하죠? 마음에 온기가 없어서 그래요. 혼자 있는 게 좋다고요? 외 로운 거 아니고요? 그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며 대화를 했지만 속마음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그는 읽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 과연 저 사람에게 몸을 맡겨도 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보통 의사들은 말을 잘하잖아요. 환자들은 그런 의사를 믿고요. 근데 어설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저를 정확하게 보고 핵심을 이야기하니까 당황스러워요. 성격이 시니컬하고 마음에 온기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심장을 찔린 것 같았어요.” “저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기운이 손끝으로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느껴져요. 밝은 기운, 어두운 기운, 외로운 기운, 상처의 기운…. 그런 사람을 보면 마치 사랑하는 이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죠. 저를 찾아오는 환자 대부분이 여자예요. 가만히 지켜보면 대체로 증상이 같죠. 마음에 온기가 없고 가슴에 화가 있어요. 남편이 바람 피워서, 내 인생을 가족에게 저당 잡혀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자궁은 따뜻한 아궁이 같았죠. 그 뜨뜻함으로 가족을 보듬고, 사랑하는 사람을 품었어요. 그런데 요즘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누군가를 욕심도,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없이 바라볼 줄 모르죠. 늘 아랫배가 차다고 하셨죠? 배가 찬 게 아니라 마음속에 아궁이가 없어서 그래요. 아마 사는 동안 누구도 당신을 따뜻한 눈으로 보듬어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걸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마음에 온기가 있거든요.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결혼이에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더없이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게 당신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오른쪽) 부처님이 곤히 잠들어 있는 이 방은 진료실이자 황토 찜질방. ‘진짜 만남’을 가져본 적 있나요? 이기웅 원장과의 만남엔 그의 오랜 친구인 ‘박 교수’라는 분이 함께했다. 서울에서 손님이 온다는 얘길 듣고 ‘지원 사격’을 나온 모양이었다. 우아하고 지적인 외모의 박 교수는 이 원장과 이성 친구로 지 낸 지 20년이 되어간다. 이 원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연애’라고 표현했는데, 그의 치료법이 마치 연애할 때의 감정과 비슷해서 그렇게 부른다. 여자 환자에게는 ‘수작 거는’ 의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박 교수는 첫눈에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30대 초반 원인 모를 두통과 반신마비에 시달리면서 박 교수는 친구 어머니에게서 이 원장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처음 만난 날, 이 원장이 건넨 첫 마디는 “영화나 보러 갑시다”였다. 거절할 법도 했지만 박 교수는 그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그다음 진료 시간엔 추어탕을 먹으러 갔고, 또 그다음엔 감자탕을 먹으러 갔다. 그러는 사이 편두통은 사라졌다. “이 원장 만나기 전엔 감자탕, 추어탕 같은 걸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식도 아닌데 이 원장이 먹으러 가자니까 그냥 당기더라고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제가 고양이처럼 돼지뼈를 싹싹 핥으면서 맛있게 먹는 거예요. 그걸 보더니 이 원장이 그러더라고요. 세상에 저처럼 감자탕 맛있게 먹는 여자는 처음 본다고요.” 이 원장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은 또 있다. 재즈 보컬리스트 유미경 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스무 살 되던 해부터 술집과 바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른 미경 씨는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한의원에 들어서는 순간, 이 원장은 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 씨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최고의 무대에서 그가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1년간의 노력 끝에 미경 씨가 대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계약을 성사시켰다. 지인을 총동원해 포스터 사진을 찍고, 팸플릿을 만드는 등 그가 기꺼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유미경이라는 사람과 ‘진짜 만남’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치로부터 벗어 난 인간 자체와의 만남. 미경 씨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그 만남의 시작점이다. “우리가 과연 ‘진짜 만남’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요? 가치로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 그 자체를 만난 적요. 갓 태어난 아기도 네 살이 넘으면 자기가 예쁜지, 영리한지 다 안대요. 가치 때문에 존재는 잊어버리는 거죠.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존재인지 아는 것, 그 우주적 존재감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제 치료의 본질이고요.”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잘 들어 이곳은 ‘햇빛쉼터’.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 이기웅 원장은 환자에게 침을 놓느라 진료실을 들락 거렸다. 그가 손수 지은 황토 찜질방이 진료실이었다. 그 정체가 궁금해 안으로 들어가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진료실’ 한쪽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부처의 사진 그리고 평온하게 누워 코를 고는 환자들…. 이기웅 원장은 그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만지며 침을 놓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뜨뜻한 구들장에 사르르 몸 이 녹고 잔잔한 명상 음악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와 내 발을 감쌌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을 다해 발의 체온을 느낀 그는 천천히 몸 구석구석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바늘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세포가 하나 하나 깨어나는 느낌. 순환… 피가 돈다. 빠르고, 뜨겁게 온몸을 순환한다. 손바닥을 아랫배에 갖다 대니 뜨거운 기운 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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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한의사입니다. 가치보다는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이 치료의 본질임에 동의합니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선생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의사는 환자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고 진짜로 사랑(?)을 나눠서 불륜하라는 말은 아니고.^^ 애정을 갖고 환자의 병을 돌봐주라는 말씀이시겠죠. 제가 아는 어떤 한의사분은 환자들한테 마사지나 추나를 거의 안 해줍니다. 남의 몸뚱이를 만지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그러나 환자를 애인처럼 생각하고 의사가 손으로 기를 넣어줄때 진정한 교감이 생겨나게됩니다. 이것은 약이나 침보다도 더 강력한 것 같습니다.
치료의 방법은 본인이 꺼려지는 것으로는 좋은 결과를 주기는 어렵겠지요. 침이든 마사지이든 추나든..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를 논하기보다는 치료자의 마음과 정성이 충만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치료한다면 좋은 결과를 낳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치료가 우선인 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