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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 그 가능성 조건
바라나시는 두 번째다. 아홉 번 오는 중에 바라나시에 두 번 왔다는 것은 자주 온 것이 아니다. 적게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힌두교의 성지 강가가 바라나시의 중심임을 생각하면 그렇다.
최초에 온 것은 처음 인도에 왔을 때이고, 여름이었다. 델리대 유학생 보경이 우리 가족을 안내해 주었다.(그때의 이야기는 『배낭에 담아온 인도』 참조)
14년이 지난 바라나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라나시에는 시계가 멈추어 서 있었다. 초침은 꿈쩍도 안 했다. 혼돈과 무질서, 악취와 쓰레기, 먼지 구덩이 그 자체다.
과연, 도시인가 싶다. 도시의 기능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도로의 정비와 인류(人流), 물류(物流)를 헤아려 보앙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이 먼저 닦여져야 한다. 당나라 장안은 그러했다 이른바 조방제(條坊制)가 그것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계획을 한 것이다. 이 바둑판 도시가 우리의 경주, 일본의 나라와 교토에까지 수출되었다. 경주의 경우, 그 흔적이 거의 없지만 교토는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길이 뚫리면 그 위를 다니는 사람과 탈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찻길 위에 다닐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 한정할 것인가? 차, 오토릭샤, 사이클릭샤, 소, 개, 돼지, 사람 --- 등등의 존재들 중에서 차별과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그리고 도로포장이 되어야 한다. 그 포장된 도로와 인도를 구분해 주는 것, 교차로에선는 교차해서 진행과 정지를 정리해 주어야 한다. 교통신호 체계가 도입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 바라나시에서는, 아직 교통신호를 본 일이 없다. 혹 있어도 안 지키면 그만이다. 경찰이 있어도 그 쏟아지는 인파를 어찌 통제하랴?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근본적으로는 인구문제까지 넘어가지만, 도시문제로만 한정해 보기로 하자. 바라나시의 도로폭이 좁아서 2차선에 인도를 활보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방법은 지하철 뿐일지도 모른다. 공사기간의 혼돈을 차치하더라도, 그 경비를 누가 댈 것인가? 델리는 중앙정부의 투자가 있었을 것이지만, 바라나시 시에서도 우다라쁘라데시 주에서도 그런 돈이 있을까 중앙정부의 예산을 끌어올 수 있을까? 중앙에서 본다면, 그런 곳이 어디 한 두 곳이겠는가. 그렇다면 방법은 민간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인데, 민간자본이 투자해서 그만큼 이익을 회수할 수 있을까?
결국 바라나시의혼돈은 방법도 대책도 없다는 이야기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백년하청이라 하니, 강가의 오염문제도 생각난다. 도착하는 날 신문 1면 헤드라인에서는 주정부인가 어떤 기관에서인가 “강가의 오염에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는 오염된 강가의 사진과 함께, 그 설명으로 “강가를 존경만 하지 말고, 깨끗이 하라(Don't just respect it. Clean it.)”고 하였다.
클린이라? 클린은 클린을 경험한 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클린을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는 오염은 오염일 수 없다. 그저 평상일 뿐이다. 맑아서 옥빛을 띄고 있는 청류(淸流)를 보지 않고서, 어찌 탁류(濁流)가 탁류임을 알 수 있겠는가.
일찍이 간디는 “어머니 강가를 더럽히지 말라. 섬긴다면 어찌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 말이 무슨 힘이 있으랴.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대책은 “강가는 강가로만 흐르게 하는 것”이다. 수원에서 발원한 물 이외에, 중도에 그 물 속은 흘러드는 것은 모두 강물을 오염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질에서 들어오는 물 역시 거절할 수 없지만, 다만 그 역시 발원지의 물 만큼 청정해야 할 것이다.
꽃, 시신을 태우고 남은 재, 인분, 소똥, 하수, 음식물, 꽃, 쓰레기, 빨래비누 물 등을 다 금지해야 한다. 빨래도, 목욕도, 화장도 다 못 하게 해야 한다. 가트에서 노숙하는 거지나 사두(sadhu, 힌두교 수행장)도 다 강가 곁에서 머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과연 그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신문보도 자체가 다 공염불이고 변명일 뿐인 것이다. 강가는 영원히 백년하청일 것이고, 바라나시는 그냥 혼돈의 바라나시로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 잔인한 진단이지만, 가장 정직한 진단이기도 할 것이다.
2. 녹야원, 권진(勸進)불교의 출발지
아침 일찍 사르나트(녹야원)로 갔다. 릭샤왈라가 데려다 준 곳이 대각회(Maha Bodhi Society)의 법당이다. 1931년에 지은 건물인데, 좋다. 크게 지어놓았다. 그 초입에 아나가리카 담마팔라(Anagarika Dhammapala)의 동상이 서있다. 절을 드리다. 그는 스리랑카 불교부흥의 아버지이자, 근대 인도에서 불교성지를 힌두교도들로부터 되찾고 보존하는 일을 한 선각자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이야말로 붓다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정신을 잘 구현한 분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대각회 참배 후, 녹야원으로 향했다. 예전(1999년 여름)과는 달리, 더러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어딘가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일을 하고도 있었다. 벌써 티벳불교도들은 다르마라지카 탑(Dharmarajika Stupa) 앞에 앉아서 독경을 하고 있다. 그들은 깔고 앉을 천막같은 것을 준비해 왔다. 우리도 그 탑을 오른쪽으로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등잔에 불을 밝혀 놓았고, 촛불을 켜두었다.
다마섹 스투파로 갔다. 역시 일군의 불자들이 스님의 인도하에 경을 읽는다. 태국분들인가 싶어서 보니, 문자가 다르다. 나중에 여쭈어 보니, 미얀마에서 오신 불자들이라 한다. 그분들의 독경이 끝나고, 나 혼자 합장하고 우리말 『반야심경』을 일독한다.
다마섹 스투파에서 좀 떨어진 곳에, 또 남방의 스님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수십명의 불자들과 함께 독경을 하고 있다. 모두들 경건하다. 고마운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몰라도, 힌두교도도 시크교도도 녹야원에 들어와서 참배(?) 내지 참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다섯비구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설하신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설법으로 나아가기 전,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내가 애써 설법을 한다 하더라도, 저들은 다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이는 허무이다. 쓸데없는 일이고, 소용없는 짓이라고 하는 인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의욕이 꺾이고, 풀이 죽는다. 나아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후퇴하는 발걸음이다.
이는 불교의 위기이자, 중생의 위기이다. 만약 그렇게 그 마음 그대로 법을 설하지 않으셨다면, 불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중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 제 업(業)대로 살았을 것이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업대로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가 조금만큼의 수행이나 반성도 없는 생을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조금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조금도 무상(無常)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저 욕망에 내 몸을 맡겼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행히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범천(梵天, Brahma)의 권청(勸請, 권유)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부처님,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애써 설해주신다면, 알아들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회의는 악마로, 회의의 극복은 범천의 권청이 있어서라고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적 표현인데, 사실은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기 전에 회의가 있었고 그것을 잘 극복했다는 이야기다.
그야 어떻든, 정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희망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설하면, 그 중에는 알아듣는 자도 있으리라”는 희망이야말로, 설하는 입장에 있는 자에게는, 선생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으면, 선생 노릇은 못한다.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雄) 선생의 말처럼, “선생은 한 번은 제자에게 배반당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배반을 당한 이후, 다시 제자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 믿지 않고서는 스승도 가르침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럴 때 스승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 것은 희망이다. “그래도 내 제자들 중에는 내 뜻을 이해하는 자가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녹야원은 바로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서 성립한 성지이다. 전법륜(轉法輪)의 성지이고, 권진불교의 성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부처님의 법륜을 다시 굴리고자 하는가? 여기 녹야원에서 깊은 반성의 염(念)을 가져본다. 내가 전할 뿐 아니라, 나로부터 전해받은 법을 다시 전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일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법을 강조하는 분을 우리 불교계에서는 잘 만나기 힘든 것같다. 오해하지 말기를 ---. 전법을 안 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법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많다. 다만, “당신들 역시 내가 당신에게 전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전법을 하시는 분이 많지 않은 것같다는 이야기다.
내 기억으로는 불광사의 광덕(光德)스님이 그런 분이셨다. 전법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셨다. 그래서 지금 불광사의 불광연구원에서 내는 논문집 이름이 『전법학연구』인데, 그 역시 깊은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법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전해진 법이 다시 전해지는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이 초전법륜의 정신인데, 그것은 다시 ‘전도(傳道)의 선언’에 잘 나타나 있음은 주지하는 바 아닌가.
3. 바라나시 강가(Varanasi Ganga)
바라나시 강가의 가트
사람들은 별로 없는데, 순례객도 목욕객도 별로 없는데
꽉꽉 들이찬 것은
배(舟)들 뿐이네
배를 저어서 저 어머니 강가강의
젖가슴에로 가보자, 유혹이네
"싼 보트 있어요, 좋은 보트 있어요"
나를 부르네
예전에는 없었던 깃대에 주황색 깃발
높이높이
펄럭이는데, 신을 그린 그림들도
신을 새긴 조각들도
지천으로 밟히는데, 신은 어디에
정말, 그분은 어디에
계시나요?
그대는 아시나요? 저 천막 다 헤어진 속에서
서양 고객 하나 맞이한
수염기른 사제는
알고 있을까?
인분, 소똥, 개똥 남자들의 지린내 속에
신의 얼굴은 숨어있나요?
그런 것들 하나 없는
깨끗한 정토에는
정말 신이 계시면 안 되는가요?
신을 찾는 이는 많은데
신을 파는 이도 많은데
신은, 정말 어디 있나요?
그대는 정말 어디 있나요?
어머니 강가는 정말 어머니같은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 중생들의 대답
모든 것들을 다 참아주면서
(2013. 11. 30 인도 바라나시 호텔 싯다르타)
4. 과연 강가의 물이 죄를 씻어줄까
--- 『천수경』 참회게(懺悔偈) 재고 ---
인도의 강가(Ganga, Ganges)강은 힌두교도들에게는 어머니강이다. 강가는 강 이름임과 동시에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한 강가강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는 것은 힌두교도들에게는 오랜 꿈의 하나이다. 다른 강에서도 목욕을 하지만, 혹은 호수같은 곳에서도(예컨대 푸쉬카르) 목욕을 하지만, 특히 바라나시 강가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생각한다.
과연 바라나시 강가에서는 그러했다. 물론 영화나 사진, TV에서 보았던 것같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목욕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목욕을 하는가? 그 이유는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다. 목욕재계라는 말이 있듯이, 청결하게 몸을 씻는 것만으로도 청결하게 마음을 씻는 일이 됨은 물론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다. 또 그러한 행위를 정화, 속죄 또는 참회를 위한 하나의 의례로 여긴다는 것 역시 의미가 없지는 않다. 목욕은 충분히 정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의례는 반드시 힌두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에도, 유대교에도 침례를 정화의 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크교의 경우만 하더라도, 다신교(그 다신은 모두 일신의 화현이라 보기도 하지만)의 힌두교 대신에 일신교의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 목욕의례는 힌두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시크교와는 반대의 길을 간다. 다신교라는 것은 받아들여서, 불교의 판테온에서는 신장(神將)이라 하여 하위의 계급 속으로 위치지우고 있으며, 또 그 영향을 받아서 다불(多佛) 다보살(多菩薩)을 모시게 된다. 하지만 시크교와 달리, 불교는 목욕에 의해서 죄가 정화된다고 하는 믿음은 거부한다.
강가이든 어느 물에서든, 목욕을 하는 것만으로 죄가 사라진다. 참회의 효과가 있다고 믿기에는, 불교에서 보는 죄의 발생과 소멸의 시스템이 힌두교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럼 불교에서 보는 죄의 발생과 소멸의 시스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간단한 대답이 『천수경』에 등장한다.
제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와 악업은
한량없는 예부터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몸, 입, 그리고 마음으로 지은 것이니
이제 그 모든 죄와 악업을 다 참회합니다.
자, 죄와 악업이 몸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면 그 몸을 씻음으로써 죄와 악업 역시 소멸할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즉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몸, 입, 그리고 의지작용 등은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때의 행위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회 역시 그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마음의 정화, 내지 마음의 개선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천수경』의 또 다른 참회게는 이렇게 그 원리를 말하고 있다.
죄라는 것은 본래 저절로 이루어지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그 마음이 멸하게 되면 죄도 또한 사라지네
그렇게 죄와 마음 둘 다 사라진다면
바로 그것을 진짜 참회라 이름한다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소멸이다. 마음 작용, 죄와 악업을 지을 때의 마음의 작용이 지멸(止滅)되는 것이다. 그때 진짜 참회는 이루어진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강가강의 목욕만으로 죄가 소멸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상징의례로 볼 수는 있겠는데, 그것을 하나의 상징의례로 받아들여서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정한다면 어떨까? 실제 그렇게 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발생한다. 힌두교에서도 어차피 업은 인정하지만, 그 업설에 따르는 한 마음의 자기책임으로 죄의 성립이 이루어진다고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100% 책임을 마음에게 물을 수 있다면, 불교처럼 되어야 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마음의 개선)를 주된 참회로 하면서 목욕을 보조적인 참회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원인에 대한 책임추궁이 불철저하게 흐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개선보다도 눈에 보이는 몸의 목욕이라는 데로 관심이 이동되어서, 근본원인인 마음의 지멸에는 관심이 덜하게 될 위험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가강에 목욕하는 것으로 죄와 악업의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믿는다면, 힌두교의 업설이 차지하는 윤리적 의미는 경감 내지 무화(無化)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에, 불교는 시크교가 힌두교의 목욕의례를 수용한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목욕의례를 통해서 죄와 악업의 정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다 그 종교의 자기선택이지만, 불교의 경우 윤리학적 철저성에 있어서는 보다 더 철저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죄와 악업의 최종적인 책임은 그 행위자에게, 그 행위자의 마음에서 구하는 것이므로 ---.
그렇게 해야만, 지나온 죄와 악업만이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죄와 악업 역시 미연에 방지하고, 더 이상 짓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이다. 강가강에 목욕함으로써 죄가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힌두교도에게서, 그런 이후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맹서의 강도(强度)는 어느만큼 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 정보를 지금의 나로서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3. 12. 2. 인도 콜카타 셔더스트리트 호텔 파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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