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시대의 로맨티스트 崔慶昌
그의 戀人 洪娘
홍랑이 누구인가. 일찍이 詩文에 능했던 洪原출신 名妓
다. 선조 6년(1573) 가을에 당시 三唐派 또는 八文章
으로 불리던 이름 높은 선비 최경창이 北道評事가 되어
함경도 鏡城에 부임할 때 사랑하는 임을 따라 그 곳까지
갔지만 다음해에 고죽이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조정의 부
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올 때 홍랑은 부득이 경성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선조 임금 때 로맨티스트
최경창 그의 호는 孤竹이다.
선조 6년(1573) 고죽은 함경도 北道評事의 사령장을 받고
鏡城으로 떠났다.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런 최경창이 기생들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
러운 일 아닌가?. 특히 그는 당나라 시풍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三唐詩人" 3인 중 한 사람으로서 기생들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如反掌이 이었으니........
최경창은 곧 경성 기생 중에서 특별히 이름이 나 있던 洪娘과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엄격한 봉건제국 유교주의 통치하
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섰다,
따라서 홍낭은 기생으로서가 아닌 한 여인으로서 사랑하는 임
고죽에게 순정을 바치게 되었고 이런 사랑은
몇 개월 지속되었다.
이듬해 따뜻한 봄날, 최경창은 관직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오
게 되었다, 홍낭은 작별을 아쉬워하며 雙城까지 따라왔다.
咸關嶺 고개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이별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별을 슬퍼하듯 하늘에선 궂은비가 내리고 또 해
는 저물어 어두워지며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홍낭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옷 자
락과 비단치마를 모두 적셨다. 이때 홍낭은 노래 1장을 지어
애끓는 간장을 실어 서름 겨운 목소리로, 고죽과 자신의 안타
까움을 노래하였다 하는데, 이 글이 오늘날까지 膾炙
된 저 유명한 折楊柳, 묏 버들시조이다.
고죽은 홍낭을 이별하고 떠나온 이듬해 봄(1575), 병으로 자리
에 누워 그 해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낭은 바로 그 날 집을 나서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밤낮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만에
서울에 닿아 최경창을 만났다.
그녀는 그리움이 가슴에 응어리져 그 맺힌 結晶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그렇게 소리 없이 흐느끼고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제도는 함경도, 평안도 기생은 서울로 데리
고 들어와 살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또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서거로 國喪중 이었고 이어 비
록 국상의 상복 기간은 지났지만, 평온한 시대와는 달라서 홍
낭은 서울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 고향인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 홍낭은 나라의 법을 한없이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길을
떠났는데,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 그 중 한 수는 여기에 소개하겠다
相看脈脈贈幽蘭
아쉬워 그대 가는 길 보고 또 보며 난초를 드리겠네
此去天涯幾日還
그대 이 길 가면 머나먼 이곳 어느 날이 돌아올 날인가?
莫唱咸關舊時曲
경성에서 즐겁던 지난날들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
至今雲雨暗靑山
아직도 궂은비 내려 그대 가는 첩첩 산길 어둡겠지
라고, 옛날 함관령 이별을 생각하며 읊었다.
최경창의 후손들에 의하면 홍낭은 洪原 기생으로 "愛節"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리고 최경창이 사망한 후에, 홍낭은 몸을 꾸미지 않고 아무
렇게나 하고 坡州무덤으로 달려와서, 묘 근처에 움막을 짓고
守墓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壬辰倭亂당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집안 살림살이를 다 버리고
오직 사랑했던 낭군 孤竹의 遺稿(詩文集)만을 가슴에 안고
다니며 난을 피했다한다, 고죽의 유고가 피비린내 나는 임진
전란의 와중에서도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은 홍랑의 가신님에
대한 지대한 사랑과 정성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녀가 죽자 해주 최씨 문중에서 회의가 시작되었고 결론은
고죽의 무덤아래 모시라는 메시지였다. 당시의 법제로는 커다
란 파격이었다. 진실한 사랑이란 신분과 재산 그 모든 조건을
뛰어넘는 아름다운이야기라는 것을 두 분은 묵시적으로 후대
에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여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나 있었다.
그리고 홍랑 할머니의 대가 지금까지 전해와 가문을 형성하고
있으니 두 분의 사랑은 사랑의 龜鑑으로 자리 매김 된 우리들
에게 전해져오는 진정 아름다운 이야기이리라
咸關嶺까지 배웅 나온 홍랑은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올
리며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읊어 작별했고, 서울에
돌아와 병석에 누운 孤竹은 어느 날 그 시조를 한문
가사로 번역하면서 그 옆에 홍랑과의 사연을 기록하여
세상에 남겼으며 홍랑의 시에 화답하여 漢詩 한 편을
지어 보냈다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送 別 -崔 慶 昌-
玉頰雙啼出鳳城
옥 두 뺨에 흐르는 눈물, 그대 한양에 보내니
曉鶯千轉爲離情
새벽 꾀꼬리 이별 아는지 이가지 저가지로
羅衫寶馬下關外
寶馬위 비단저고리 벌써 쌍성 밖으로
草色蕉焦送獨行
풀빛은 그렇게 푸른데 그대 홀로 보내다니
*홍랑의 묏 버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 孤竹의 뭣 버들 飜譯漢詩
折楊柳寄與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
사랑하는 여인이 읊어 준 시조를 漢譯歌로 옮겨 놓은 것은
얼마나 운치 있는 일이며, 그 시절 士大夫가 기생과의 사귐
을 스스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용기 있
는 일이라 하겠는데,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 내놓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사랑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후 孤竹은 다시 鏡城府使로 陞差하여 洪娘과 재회했으나
45세의 젊은 나이에 그 곳에서 병사하였고, 상여를 따라온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서 3년 동안 守墓를 하였을 뿐 아
니라, 그가 남겨 놓은 詩集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기
에 주옥같은 孤竹의 시가 壬辰亂의 兵禍를 면하고
후세에 전하여 졌다고 한다.
* 感 遇 -최경창- (1539-1583)
"그냥 생각이 나서"
人心如雲雨
사람의 마음은 비구름 같은 것
飜覆在須臾
잠깐 사이에도 이리저리 바뀌고
素絲染黑色
흰 실에 검정 물들이면
安能復其初
어찌 처음 색으로 돌아가리
啞啞群飛烏
까악까악 까마귀 떼 날아
集我田中廬
우리농막에 모여들었는데
雌雄竟莫辨
암수 구별할 수 없어
泣涕空
주르륵 부질없이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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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은 진짜 요로케 해버야 되는디! 아무조건도없이! ...홍랑은 관기였는데 최경창을 만나서 戀情을 느껴 관기도 마다하고 짧다면 짧은 세월동안 아주진한 사랑의 진수를 보연준 사랑로맨티스트였던것 같았다(두사람다..)홍랑은 최경창사후 3년동안 그의 무덤옆에서 살았을정도이니.. 아! 부럽다!
松都 開城의 明月 그리고 그 황진이(소세양의 연인)와 雙壁을 이룬 名技인 全北 부안의 매창 梅窓 (1573-1610) - 허균과 유희경의 연인 그리고 위에서 말한 홍랑(조선 선조시대 1574 )-최경창의 연인, 모두다 이조시대 선비문화가 낳은 불세출의 佳人들이니, 그 들의 정겨운 詩와 그리움을 담은 인간적인 사랑으로해서
그 조선시대가 더욱 아름답고 風流로워보인다. 홍랑, 최경창의 오래된 빛바랜 한지위에 쓴 깨끗하고 성실한 글씨가 그윽하고, 가람 李炳岐의 육필 역시 좋으니 웬 안복 (眼福) 이냐 !
옌날의 관기는 비록신분이 기생일찌라도 지조가있꼬,풍월을 읊을쭐아는 트인 여자라 나름대로는 대접을 받고 살은거 가태여 ~홍랑ㅇ의 야기는 유산거사가 다꿰뚫꼬 있쓰는데~ 청향거사도 만만치 않으여 죤글 고맙게잘보았씀
ㅎㅎㅎㅎㅎ 멋수로따지뿌마 유산이나 소나무는 소세양선비,최경창軍官나리,허균선생 모찌않아여..
ㅎㅎㅎ 깨끗하고 단아한 한복에 맵씨있는 흰 버선을 신은 佳人의 정겨운 눈과 손길은 맑고 밝은 말처럼 아름다우리. 고등학교때, 고무림(高戊林) 국어선생님이 古典시간에 자기는 술집에가면 한복입은 기생의 버선발이 좋다고 하였는 데 멋을 아는 분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