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지: 거제 20 * 30 * 10

1989년 5월 21일 / 청심
사랑하는 나의 아내 아녜스,
1989년 5월 21일
우리 하나가 되어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들은
한 낮 단꿈만 같은데 벌써 은혼식이라니요?
그 단꿈은 이젠 추억으로 남아 역사가 되었고
힘들었던 일들은 생활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온 우리 부부
그동안 돈 못 버는 능력 없는 저를 만나서
당신이 좋아하는 여행도 함께 못하였고
변변한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해줘서 정말 미안합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는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며
당신의 수줍은 미소에 반해 청혼했었는데
나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당신이
조각 살림에 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손 영 순 님,
많이 부족한 저를 선택해줘서
정말 감사하고
25년 동안 한 결 같이 내 곁을 지켜줘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한 병의 맥주를 반씩 나눠 마시며
잔을 따라 흐르는 거품 같이
넘치는 행복도 느꼈고
마이너스 통장이 플러스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소박한 기대와 보람도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우리 사랑 변치 말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운전 가르치며 큰 소리 질러서 미안했고
통장에 마이너스 됐다고 타박해서 미안하며
취미생활 한답시고 혼자만 나돌아 다녀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우리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당신께 미안한 일만 산더미처럼 쌓여있더군요,
늘 내 곁에 두고
내 품에 안아도
보고 싶어
그리움에 가슴시린 내 사랑
그대가 늘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은
그대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신만이 갖고 있는
수줍은 미소와 독특한 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구김 없이 한 세상을 살아야지요?
기약 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황혼까지 말입니다.
천 년 전에
우리 손가락 걸며 했던 언약으로 다시 만나
이렇게 한 몸 되어 살았듯이
또 앞으로도 천년동안 당신만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은혼식은 은으로 만든 것으로 선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금으로 만든 것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금혼식에는 당신의 손가락에 맞는
금반지를 꼭 선물하겠습니다.
금혼식까지도 제 곁을 지켜 달라고
당신의 약지에 은반지를 끼우며
앞으로 또 25년을 기약하오니
염치없는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는지요?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습니다.
꽃집은 어색해서 어떠한 꽃을 사야 될지 모르겠더군요,
망설이고 있는데 처녀 때 당신이 좋아했던 안개꽃이 보였습니다.
결혼 전 당신 생일 날 딱 한 번
당신께 안개꽃을 선물했던 기억이 나더군요,
안개꽃 한 보따리와
가운데 장미 한 송이 넣어달라며 주문했더니
꽃 집 아주머니가 ‘무슨 날이세요?’ 하더군요,
엉겁결에 21일은 ‘부부의 날이잖아요’ 라고
대답하며 꽃집을 나서는데
‘부럽네요, 부인은 참 자상한 남편을 두셨습니다.’
라는 꽃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비수되어 등 뒤에 꽂혔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당신께 꽃을 선물한 것이
25년 만에 처음이더군요......
여보! 고마워요
이렇게 많이 부족한 저를 사랑해줘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1989년 5월 22일 신혼여행지 경주에서...
첫댓글 아직도 두분 사랑이 식지 않으셨군요. 앞으로 25년도 걱정 없을듯합니다.
사모님 사랑의 글이 가득담겨 있네요. 감사, 또 감사 할 일입니다.